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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85화 (85/99)

85화

밖에 나오자마자 알게 된 건,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는 거다. 휴대폰을 쓰고 있었음에도 육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서야 그걸 알아챘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이젠 연락처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고 직접 키패드를 입력해서 전화를 걸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형의 번호를 노려보며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걱정부터 앞섰다.

호텔을 나와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형의 그림자조차 없기에, 설마 벌써 멀리 떠났다거나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아닐지 우려가 되었다. 내 얼굴을 제대로 볼 생각이었다면 내가 깨어나기도 전에 덜컥 방을 나서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형은 단 두 번의 연결음 만에 내 전화를 받아주었다.

-더 쉬지 않고.

반가운 음색 대신 낮게 가라앉은 형의 목소리는 날 위협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힘든 내색을 지우기 위해 목에 힘을 주어 말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나자, 아까만 해도 온갖 말을 퍼부으려 했던 나 대신 걱정으로 똘똘 뭉친 신우서만이 남아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서두가 나오질 않아 입을 다물고 있는데, 대로변을 빠르게 지나가는 한 차량의 소음 때문에 형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밖이야? 밤도 늦었는데 왜 나왔어?

휴대폰 너머로 아주 작은 달칵-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깐 잤다고는 해도 아직 더 쉬어야 해. 어머니께는 내가 연락드려 뒀으니까 오늘은 호텔에서 푹 쉬어.

“들어가 있으면 올 거예요?”

다른 말보다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방에 들어가 있으면 다시 와줄 거냐고요.”

-…….

형은 말이 없었다. 내가 밖에 나와 있다는 게 걱정돼서 당장 차에서 내려설 정도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대답 못 해요? 호텔 방에 누워있는 것 정도로는 제대로 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말을 하면 할수록 점차 감정이 격앙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속이 아리고 가슴이 답답하며,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머리는 다시금 지끈거리며 아파진다.

“형 때문에 힘들어요….”

몸 곳곳에서 전해져오는 통증은 날 어린애처럼 만들었다. 단순해진 머릿속은 엄마에게도 부려본 적 없는 투정을 쏟아내게 한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

잠 못 드는 하루하루보다 형을 향한 마음과 도저히 풀리질 않을 것 같은 덩어리진 생각들 때문에 힘들었다.

형에게 농락당한 주제에 어째서 난 매시간 그를 기다렸던 건가. 날 걱정하면서도 부담 주지 않으려는 안부 메시지와 받지 않을 걸 알고 있음에도 꼬박꼬박 걸어주는 전화가 어째서 그토록 내 가슴을 뒤흔들었던 건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알고 있다.

“빨리 와서 나 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등 뒤에서 뭔가가 압박하며 안아왔다.

익숙한 담배 냄새, 익숙한 체온, 익숙한 숨결.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안달하며 떨고 있던 심장이 금세 얌전해졌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던 투정 부리는 말 대신 안도 섞인 따뜻한 숨이 내 앞에 소리 없이 흩어진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형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석상처럼 서서 마치 감상하듯 형의 기운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호텔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밖에서처럼 끌어안거나 손을 잡지도 않았다.

우린 우리만의 공간과 같은 방 안에 들어온 후에야 비로소 꽉 막혔던 숨이 트이듯 서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댄 형의 모습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잠을 못 잔 탓에 거뭇해진 눈 밑과 척 보기에도 혈색이 그리 좋지 않은 낯빛, 핏기가 옅어진 입술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깔끔하게 올려서 세팅하던 앞머리는 강지석처럼 힘없이 내려가 있어, 그 사이로 보이는 지친 눈동자의 떨림을 아슬아슬 가려주고 있다.

형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안 잤어요?”

잠들었던 내 옆자리를 매만져보고 홀로 온기를 품은 의자를 확인할 때만 해도 설마 했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그제야 형이 전혀 잠들지 않았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형은 그저 쓴웃음만 보여줄 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치 형이 감내해야 할 일이라는 것처럼 저리 웃는 걸 보니 다시금 속이 쓰려진다.

“미련하게 왜 안 잤냐고요. 그러다 쓰러지면…….”

말을 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울컥해, 목구멍이 떨리고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이것도 저한테 동정심 사려는 거죠? 일부러 버티다가 나보다 먼저 쓰러지면 제가 돌아봐 줄 테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죠?”

형은 반박하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저 내가 형을 탓하며 내쏟는 말을 얌전히 들어주고 있다.

“그렇게 제가 좋아요? 그렇게 좋으면 옆에 누워서 그냥 같이 자버리지 그랬어요. 왜 미련하게 버티는 건데요?”

“네가 싫어할까 봐.”

너무도 단순한 대답이었다.

“말했잖아. 네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라고. 반대로 말하면, 네가 싫어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자신이 옆에서 잠들면 내가 싫어할까 봐, 그래서 안 잤다고 한다.

무슨 이런 미련한 사람이 다 있지. 분명 누구보다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인데, 대체 내가 뭐라고…….

말문이 막혀서 바라만 보고 있는데, 형의 손이 내 얼굴을 감싸려다 멈칫한다. 그러더니 쓰게 웃으며 손을 내려 주먹을 쥔다.

“손대는 것도 신경 쓰이면 안 할게. 대신 너 재울 때 아예 접촉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손만이라도 잡게 해줘.”

형의 부탁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그마저 거절당할까 봐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나보다도 형이 자야죠.’

내가 자는 동안 전혀 잠들지 못했을 것 같은 피로한 안색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머릿속엔 온통 형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들만 나돌고 있었다.

“지금 그 말도 형 계략에 있는 대사예요?”

내 얼굴을 쓰다듬으려다 내려간 형의 손을 덮듯이 붙잡아 끌어 올렸다.

“내가 형 신경 쓰게 만들고 마음 약해지게 만들려는 거, 맞죠?”

형의 쓴웃음이 좀 더 진해지고, 눈가가 날 홀릴 것처럼 유연하게 휘어진다. 그걸 본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형의 손을 잡은 채 침대로 향했다. 그러고선 형을 침대에 밀어 눕혀버렸다.

“이제 형이 하는 말마다 전부 계획적으로 보여요.”

가만히 누워서 날 올려다보던 형은 내가 그의 손을 내 볼에 가져다 대자, 그제야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만져주는 것도, 쓰다듬어주는 것도, 날 위하는 말도, 전부 다 형의 계략이고 날 농락하려는 거 아는데…….”

내 입꼬리 역시 형을 따라 하듯, 느릿하게 올라가 쓴웃음을 만든다.

“그게 왜 다… 진심 같냐고…….”

형의 눈동자가 머리카락 사이에서 옅게 흔들려 간다. 날 올려다보는 눈동자의 파문을 따라 내 가슴 속 뭔가도 함께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형의 몸 위에 올라타, 그의 서늘한 손을 내 얼굴에 댄 것만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포근함과 안도가 밀려왔다. 그대로 몸을 숙여, 형의 몸 위에 완전히 누워버렸다.

쿵쿵-

형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귀를 기울이자, 닿아있는 부분과 소리를 통해 타인의 심장 박동이 완연히 체감되었다. 빠른 박동임에도 그 무엇보다 더 없이 듣기 좋은 음악 같아서 그런지 그대로 눈이 감겨 갔다.

“형은 정말 못된 인간이에요. 최악이야.”

“응….”

형은 순순히 대답하며 그의 몸에 덮어지듯 누워있는 내 허리를 한쪽 팔로 끌어 안았다. 몸에서 힘을 뺐다고는 하나 분명 묵직할 텐데, 형의 그 팔은 오히려 몸 위에서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드는 역할을 했다.

“날 속이고 모두를 이용하고…….”

“그래.”

형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형의 심장과 손길 사이에 끼어 양쪽의 따뜻함을 모두 느끼고 있으려니 제어할 틈도 없이 잠이 쏟아졌다.

“하나만……. 하나만 더 대답해줘요….”

“뭐든 다 대답해줄게. 숨기지 않고, 전부 다.”

머리 위에 형의 입술이 다가와 부드럽게 닿는다. 따뜻한 숨결이 머리끝에서부터 퍼져 나가, 심장과 손길이 채워주던 공간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 준다. 심장이 간질거리고 기분 좋은 감각이 전신을 지배해 갔다.

“형은 나와 함께 했던 것들 모두… 진심이었어요? 아니면 계략이었어요…?”

점점 의식이 흐려져 갔다. 그동안 못 잤던 탓인지, 이 정도 접촉만으로도 또다시 잠이 쏟아져 주체할 수가 없다.

머리에 키스하듯 입술을 누르고 있던 형이 따뜻한 숨을 흘리며 대답해준다.

“둘 다.”

그 짧은 대답이 뭐라고,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이 금세 흐려져 버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속으로 편안히 가라앉는 것처럼 온 정신이 끝도 없이 내려앉아, 금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내 복잡한 머릿속과 진흙탕 같던 마음은 형의 거짓 없는 대답 하나로 인해 말끔해질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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