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꿈을 꾼 건 오랜만이었다.
근래에는 잠을 전혀 못 자서 그럴 새가 없었고, 그전에는 형과 함께 누워있을 때마다 꿈조차 꾸지 않을 만큼 푹 잠들어서였다.
오랜만에 꾼 꿈은 내 과거를 짤막하게 잘라 하나씩 나열하듯 보여주고 있었다.
꿈이 보여준 가장 첫 번째 장면은 고2 때의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여느 때와 같이 학교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침 가게 보수 공사 때문에 일찍부터 집에 계시던 엄마가 왜인지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잘 갔다 왔냐는 흔한 말 대신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혹시 다니고 싶은 학원이나 그런 거 없어?”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했다. 혹시나 기말고사 성적이 엄마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하지만 중간고사 때보다 성적이 좋았는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엄마가 금세 눈가를 찌푸렸다.
“애가 왜 바로바로 대답을 못 해? 학원이든 과외든, 그런 거 다니고 싶은 곳 없냐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 당시 난 학업 외에도 별도로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강지석이 집에서 친형을 통해 미리 배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해두고 싶었다.
한두 달 전, 강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도 형한테 같이 배우자. 형이 대학 다닐 때 과외도 좀 해봐서 잘 가르쳐. 프로그래밍뿐만 아니라 어떤 과목이든 다 만능이야. 나랑 다르게 천재라니까? 형도 너라면 돈 안 받고 과외 해줄 수 있다고 했어.”
그때는 강지석의 권유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무리 내가 그와 친하고 지건 형과 안면이 있다 해도 무상으로 뻔뻔히 과외받을 수가 없어서였다. 창업 준비를 하면서 일이 년쯤 여유가 있으니 충분히 해줄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음에도 염치 때문에 순순히 응할 수가 없었다.
그래, 문제는 돈이었다.
“있어요. 하지만 돈이…….”
말끝을 흐리며 엄마의 눈치를 보았다.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았다.
비록 부모님이 이혼하시긴 했지만, 엄마의 좋은 수완 덕택에 집은 누가 보더라도 넉넉한 편에 가까웠다. 불시에 손님이 오더라도 좋은 차와 고급스러운 서양 쿠키를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고, 집 물건 중에 뭔가가 흠집나면 다음 날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사서 바꿔 놓기도 했다. 집은 하루에 8시간씩 청소와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와서 부족함 없이 관리해줬고, 엄마가 몰고 다니는 두 대의 신차는 할부마저 없었다.
넉넉한 살림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주저했다. 집이든 뭐든 눈에 보이는 모든 건 전부 엄마를 위한 것들뿐이다. 나는 엄마와 단둘이 된 시점부터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돈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다니고 싶은 곳 있으면 말해. 너도 곧 고3이잖아.”
엄마를 알 만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말에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돈에 예민한 엄마가 나를 위해 서슴없이 학원비를 쓰겠다고 말하는 게 도통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이어진 말을 듣자마자 반짝이며 빛나던 내 눈빛은 금세 가라앉았다.
“네 아빠가 너 고3 된다고 앞으로 매달 학원비도 얹어서 양육비 줄 거라고 하더라. 쪼잔하게 확인하고 다닐 수도 있으니까 적당한 곳 하나 잡아서 등록해. 과외도 좋고.”
엄마는 학원비 명목으로 아빠에게 그보다 더한 돈을 받으려고 하시나 보다. 아빠 딴에는 양육비 지급이 거의 1년 정도밖에 안 남은 셈이니,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아들을 향한 미안함과 배려로 학원을 언급한 것일 거다.
딱히 아빠가 고맙지는 않았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엄마에게도 그다지 감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인 건 확실했다.
그래서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 없이 당당히 요구했다. 그날 바로 강지석에게 전화를 걸어 과외 얘기를 꺼냈고, 지건 형도 흔쾌히 수락해줬다. 그렇게 난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거의 매일같이 강지석의 집을 찾아갔고, 그 따뜻한 공간에 당당히 함께 머물 수 있었다.
고3이 되어 과외를 받던 날이 전부 꿈에 나타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지나온 시간들이 뭉뚱그려 전해주는 감각은 꽤나 선명했다.
강지석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매일 매일 속에서 어느 순간, 내게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아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시선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태롭고 집착스러웠다.
시선을 느껴 돌아본 그 자리에 있는 건 ‘나’였다.
두 명의 내가 있을 리 없는데도 나는 날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꿈이니까 가능한 일이었고, 꿈이라서 알 수 있었다. 날 바라보던 게 ‘나’의 형상을 한 다른 사람이라는 걸.
서울을 떠나 엄마에게 돌아온 그 날, 도진 형은 내게 짧은 안부와 걱정 섞인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마저도 신경 쓰여서 메시지를 확인만 하고 답장도 하지 않았는데, 그 안에 있던 한 줄의 메시지가 꿈속에서 생생히 떠올라 머릿속을 채워갔다.
“모든 링은 닮은꼴이에요. 닮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어지는 거예요.”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이해의 깊이는 애정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지금의 난 ‘닮았다’라는 단어가 이해의 형태로 바뀌어 깊어진 걸 꿈을 통해 체감하는 중인 걸까.
그래서 어딜 보나 ‘나’로 보이는 눈앞의 형체가 점차 일그러져, 지건 형의 모습처럼 보이는가 보다.
‘나도 알아.’
형이 날 보는 게 내가 강지석을 바라봐오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형이 직접 말했듯, 외면하고 참으려 했지만 링이 발현된 순간 더는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는 심정도 이해하고 있다. 나 역시 그랬을 테니까.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우서야. 나는… 네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형이 했던 말은 강지석을 바라보며 속으로 누르고 누르기만 했던 내 마음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꽁꽁 싸매서 품고만 있었던 마음이자,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언제든 꺼내고 싶었던 진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지금은 어떨까.
형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눈앞의 ‘나’는 잔잔하게 웃는 얼굴로 두 팔을 뻗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물러날 생각이 들기는커녕, 묘한 기대감과 곧 전해져올 포근함에 가슴이 들뜨기까지 한다.
얌전히 안긴 형의 품은 따뜻했다. 잠들 때마다 느꼈던 포근함과 기분 좋은 감각이 전신을 어루만진다.
다른 건 다 속였어도, 형은 그의 진심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되짚어보면 형의 따뜻함은 처음부터 쭉 이어졌다. 내게 진심을 말하지 않고 그저 이해를 위한 계약적 관계인 척 강지석의 대용품을 자처하던 그때도 지금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날 최우선으로 챙기는 행동, 어루만지는 손길, 걱정과 애정을 품은 눈길, 언제든 내가 원하면 두 팔 벌려 내주던 품.
형이 날 속였다며 세세하게 꾸몄던 일들을 털어놓을 때조차, 형의 그 모든 건 여전했다.
내 지친 마음은 자꾸만 형을 이해하려 했다. 형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몸이 지친 것보다도 형의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이 며칠간 계속 요동치고 있어서 외면하기가 너무도 힘이 들었다.
형제가 반씩 차지하고 있던 가슴은 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어느새 하나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바라봐왔던 사람과 진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 대신, 내가 보낸 기나긴 응시의 시간만큼 날 바라보던 닮은꼴을 돌아보려 한다.
미쳤지. 진짜 미쳤지.
언제 또 속일지 모를 사람인데 왜 하필이면 그런 사람을 돌아보려 하는 걸까.
점점 형을 탓하는 게 아니라 나를 탓하게 된다. 형이 날 속이고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감정의 변화는 오롯이 내 것이었다. 동정이든 애정이든, 전부 다.
“모르겠으면 문제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방법이야.”
“계속 바라보고 있다 보면, 그 문제가 어떤 형태의 답을 원하는지 알게 될 때가 있어. 사람 감정도 똑같아.”
“답이 나올 때까지 바라봐. 그거면 돼.”
눈을 들어 날 안고 있는 형을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형의 눈가가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형태로, 오직 나만을 위한 곡선을 그린다.
가슴이 뛰었다. 언제나 형의 얼굴에서 보이던 강지석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가 없었고, 거짓 없이 자리 잡은 익숙한 미소는 단번에 내 시야를 장악했다.
형을 좋아한다.
무슨 짓을 했더라도 전부 받아들여 주고 싶을 만큼, 형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그 감정을 인정한 순간 선명하던 꿈이 흐려져 금세 흩어져버렸다.
따뜻하던 꿈에서 빠져나와 눈을 떴을 땐 웬 호텔방 침대에 나 혼자만이 누워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잠의 여파에 취할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서 당장 옆자리 시트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새하얀 시트의 차가움이 고스란히 느껴져 의아해하는 내 눈에,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의자 하나가 보였다.
누군가가 앉아 있었던 게 분명한 온기 담긴 의자, 그리고 그쪽으로 향해 있던 손만이 유독 따뜻한 이 느낌.
더 지체할 수 없었다.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협탁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고서 단번에 호텔방을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