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머릿속에 또다시 생각이 들어찬다.
처음에는 오늘 강지석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차근히 떠올려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시계 소리에 맞춰 그 이전의 일들까지 차곡차곡 쌓여 산을 이룬다.
‘또야.’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다. 그 생각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형이 있었다.
‘그만 생각해야 하는데.’
이런 순간에도 형이 전해주던 온기가 떠올라 미칠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나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을 형이 걱정되어 초조해진다.
형은 괜찮을까.
밥은 잘 먹고 다니려나.
혹시 쓰러져서 실려 가진 않았겠지.
역시 강지석에게 형은 어떤 상태인지 물어볼 걸 그랬어.
형에 대한 걱정이 머리를 뚫고 튀어나와 주변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형에 대한 걱정거리가 나뒹굴고, 눈을 감으면 그 데굴거리는 소리가 속삭임으로 변해 다가온다.
참다못해 이를 꽉 깨문 채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빼놓지 않고 갖고 다니던 내 손의 휴대폰을 노려보다가 완전히 이불을 박차고 집을 벗어났다.
겨울처럼 한기만 남아 있던 집을 나와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서 은은한 노을빛이 비친다. 대낮의 강한 햇빛보다는 훨씬 나아서 그런지 조금 숨이 트이는 기분이다.
지갑과 휴대폰만 챙긴 채 밖으로 나온 나는 느릿하게 길을 걸었다. 걸을수록 머리의 지끈거림이 강해지고 다리가 무거워졌지만 그래도 가슴의 답답함은 확실히 나아져 가고 있었다.
일부러 사람 없는 골목을 골라 걸음을 옮겼다. 지금 상태로는 지나가는 사람 중 누군가가 괜한 오지랖에 괜찮냐며 말을 걸 것 같기도 하고, 혹시라도 깜빡 쓰러지면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윽….”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형 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내젓다가 눈앞이 완전히 깜깜해져, 벽을 손으로 짚었다. 눈을 꾹 감은 채 숨을 몰아쉬는데, 어디선가 젊은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을 뜨자 이쪽을 힐끔거리며 지나쳐가는 두 명의 남학생이 보였다. 그들이 입은 낯익은 교복을 보고 있자니 쉴 새 없이 형과의 일이 떠오른다.
“그만큼 내가 너한테 진심이라는 소리야.”
“시간을 줘.”
“널 충분히 꼬실 수 있을 만큼의 시간.”
교복을 입은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마치 과거부터 하나하나 자신으로 덧칠할 것처럼 말하던 형이 너무도 선명하다.
‘시간… 많이 못 줬는데…….’
고작 며칠.
형에게도, 나에게도 너무 짧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기엔 일분일초가 너무도 커서 곱씹는 데만도 한참이 걸릴 지경이다. 나는 또 웃기게도 그 한참을 또다시 곱씹고 또다시 씹어, 끝나지 않는 쳇바퀴 위를 달리는 것처럼 생각을 거듭한다.
벽을 짚은 채 천천히 걸어가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홀린 것처럼 그 안에 담긴 사진을 띄워 내려다보자 목구멍에 뭔가가 차오른다.
휴대폰 속에 머무는 형은 너무도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똑같이 웃어도 강지석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한결같고 순수한, 오직 나만을 향한 미소였다.
형은 이전에 있었던 폭행 사건 때 USIM칩조차 건지지 못했다며, 아예 겉과 속 모두가 새것인 휴대폰을 사주었다. 난 애초에 뭔가를 휴대폰으로 잘 찍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고, 작은 기계 속에 뭘 가득 넣어두거나 설치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휴대폰 안에 담긴 거라고는 내가 며칠간 사용한 흔적이 다였다.
형을 찍은 사진.
형과 나눈 메시지.
형의 휴대폰 번호.
온통 형으로 가득하다.
형의 흔적은 휴대폰을 건드리는 내내 날 족쇄처럼 부여잡았다. 웃긴 건, 그 족쇄라는 게 언제든 내 마음대로 풀어버릴 수 있는 말랑한 것이라는 거다.
전부 다 지워버리면 될 텐데.
아예 없었던 것처럼 지우면 되는 건데.
‘왜 못하는 건데.’
답답한 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액정 한구석에 버젓이 떠 있는 붉은색 마크의 앱이 눈에 밟혔다.
형이 나 몰래 설치해뒀던 GPS 앱.
지금은 숨김 처리되어 있던 것을 형이 직접 화면으로 꺼내어 준 상태였다. 그래서 나 스스로 언제든 지울 수 있었다. 형이 직접 앱을 꺼내놓는 순간에 가차 없이 삭제를 누르거나 휴대폰 자체를 초기화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쯤은 나 혼자서도 얼마든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 간단한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위치를 일방적으로 추적하는 이런 앱 같은 건 당장이라도 지워버리는 게 맞는 건데.
내가 너무 웃겨서 자조가 끊이질 않았다.
‘뭘 기대하고 있는 거지, 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속으로 형을 몇 번이나 비난했으면서 휴대폰을 이대로 두는 이유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알기에 웃음이 나는 거다.
혹시라도 형이 내 위치를 못 찾을까 봐 앱조차 지우지 못한다. 습관처럼 일어나던 시간에 맞춰 걸어주는 형의 전화를 모닝콜 삼는 주제에 그걸 받지도 못하고 거절하지도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는 형의 걱정스러운 메시지를 제때 받기 위해 휴대폰을 좀처럼 몸에서 떨어뜨려 놓지도 못한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어.’
쿨하게 형을 쳐내지도 못하고 다 받아주지도 못할 거면서 어째서 질질 끌고 있는지 나조차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우유부단해진 건 처음이라, 나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오늘 강지석을 만났을 때, 내 어깨를 짚었던 손이 혹시나 형의 것인가 싶어 기대했던 내가 떠오른다. 앞뒤 생각 않고 도망쳐온 주제에 형이길 기대하기나 하고, 참 잘하는 짓이다.
한발 한발을 뗄 때마다 한숨 같은 지친 숨이 흘러나왔다. 휴대폰을 쥔 손은 그게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쥐고서 놓으려 하질 않는다.
‘이대로 끝낼까.’
손아귀의 힘에 반하듯, 힘없는 생각을 한다. 이대로 다 포기하고 강지석 말대로 링을 해제하면 좀 편해질까.
잠을 자든 못 자든, 내겐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자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오로지 형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뿐이다.
왼손을 들어 약지에 자리한 한 줄의 링을 내려다보았다.
끝내려면 이 링이 한 줄일 때 끝내야 했다. 이대로 자꾸만 형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어버리면 어느 순간 이 링이 완전해져 버릴 것 같다. 내 마음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 어떠한 족쇄보다 강한 이 링이 멋대로 내 손을 옭아매고 마음까지 묶어, 형에게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 만들겠지.
형도 나도, 모두 잊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신음이 흐를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지고 욱신거린다.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건, 오랜만에 만난 형이 보였던 싸늘하고 무심한 얼굴이었다.
되돌아가면 형은 그때처럼 내게 무심해질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지지는 않을까.
내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에 대한 것보다도 형이 날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가 가장 두렵고 무서웠다. 어차피 서로 기억을 잃은 상태라면 나 역시 형에게 무심해질 테니 서로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되든 상관없을 텐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속이 울렁거려 토기가 밀려오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벽을 힘없이 짚고 있던 것도 잠시, 곧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기절도 하지 못한 채 길거리에 쓰러져 있으면 참 가관이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눈을 감는데,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쓰러지려는 걸 알고 도와주러 오는 길 가던 행인인가 싶어서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이 들었다. 길 가던 사람에게 민폐나 끼치고 참 잘하는 짓이다.
나를 향해 달려오던 사람은 어찌나 전속력으로 달려온 건지, 내 몸이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아슬아슬 붙잡아 끌어당겨 안아준다.
‘담배 냄새….’
익숙한 담배 냄새가 났다. 상표는 거의 모르지만, 이 냄새만은 다른 사람들이 피우는 담배와 이상할 정도로 다른 느낌이라서 기억하고 있다.
감사한 행인 분은 눈을 뜰 기력도 없어서 지친 숨을 몰아쉬는 날 단숨에 안아 올렸다. 그런데 어째, 이대로 잠들 것만 같다.
‘왜 이러지….’
근래 순간순간 정신을 잃을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던 적이 여러 번인데 그땐 미칠 듯이 정신이 또렷해서 죽을 맛이었다. 눈을 감아도 절대 잘 수 없는 고통이 그토록 생생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른하고 까마득해진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들기 직전인 것처럼.
“우서야, 정신 차려 봐.”
너무도 무겁던 눈꺼풀이 순간 흠칫하며 움직인다. 몸은 이미 기력을 다한 것처럼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음에도 묵직한 눈꺼풀만은 어렵사리 움직일 수 있었다.
확인해야 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초점 없던 눈이 상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내 정신은 어둠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서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