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늦은 점심을 먹는 내내 강지석의 눈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배고프다는 건 역시나 거짓말이었던 건지, 강지석의 김치찌개는 도통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줄지 않는 내 몫의 사골국과 흰 쌀밥만 노려보던 강지석이 반찬들을 슬쩍 내 쪽으로 밀어준다.
“왜 이렇게 못 먹어. 내가 먹여줄까?”
“생각 없는 사람 끌고 온 게 누군데.”
막상 그렇게 말을 내뱉고 나니 미안해져서 슬쩍 강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컨디션이 최악인 탓에 애꿎은 그에게 예민하게 굴어버렸다.
강지석은 아무렇지 않은 척 배시시 웃으며 이게 맛있네, 저것도 네가 좋아하겠다, 등의 말을 덧붙여 반찬을 권했다. 고마우면서도 이렇게 그가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불편하다. 작은 호의에도 가슴 뛰며 설레하던 신우서는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지금은 그저 귀찮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만 챙기고 너나 먹어.”
“나도 잘 먹고 있어. 나보다도 네가 전혀…….”
“강지석.”
강지석을 차갑게 부르며 몇 번 쓰지도 않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숟가락이 테이블에 닿는 순간을 기점으로 머리의 지끈거림이 한층 심해진다.
“나 챙기려고 먹지도 않을 밥 타령한 건 알겠는데, 그냥 용건만 말하고 빨리 가면 안 돼?”
웃는 표정이던 강지석의 얼굴이 일순 움찔하더니 빠르게 어두워져 간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지금도 눈앞이 순간순간 점멸하는 탓에 말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거리를 두듯 날카롭게 내뱉는 내 말이 강지석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부드럽게 웃으며 태연한 척할 수가 없다.
눈을 내리깐 채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강지석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대로 있을 거야?”
“뭘?”
“형과 떨어진 채로 이대로 잠도 못 자고 버틸 거냐고.”
강지석의 물음에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안다. 이대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거라는 걸.
한 줌 남은 기력이 다하더라도 잠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 병원을 가더라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수액 좀 맞는 게 전부일까. 아마도 병원은 그놈의 링의 상대를 만나라는 말만 되풀이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형을 만날 수도 없다. 날 속이고 주변 사람들마저 철저히 이용한 형을 대체 무슨 얼굴로 마주해야 할까.
“우서야. 나는… 네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변명 대신 그 말만 되풀이하는 형인데.
어느새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가서 손바닥이 아릿해졌다. 형을 떠올릴 때마다 그만하라는 듯 주먹 쥔 손이 경고를 보내지만, 한 번도 그 말에 순응해본 적이 없다.
말 없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강지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이렇게 힘들어할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링을 해제하게 할 걸 그랬어.”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강지석의 태평한 말에 주먹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닿아있는 손가락뼈의 마디마디가 아프고 꼬집히듯 끼인 살결이 짓이겨질 것처럼 쓰라리다.
“어려울 게 뭐 있어? 어차피 형에 대한 기억만 잃게 되는 거잖아.”
강지석이 차가운 표정으로 냉정한 말을 내뱉었다.
“네 인생에서 형 하나 지워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없어. 과외를 해주던 선생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날 뿐이고, 친구 강지석의 형이 누구였더라, 그게 다야. 기억 잃은 이후의 넌 그것 외엔 아무 위화감 없이 잘 지낼 거라고.”
“어떻게 그리 쉽게 말해?”
네 일이 아니어서 그러는 건가. 그래서 한 사람을 내 기억 속에서 송두리째 지워내는 일에 그토록 태평한 거냐고.
“내 기억 속에서 형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쉬운 거였다면 진작에 해제했을 거야. 그렇게나 싫었던 엄마한테까지 도망와서 이렇게 웅크리고 있을 게 아니라, 도진 형에게 직접 전화해서 해제해달라고 부탁했을 거라고.”
“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형은 널 속였잖아. 나와 민아 누나까지 이용했어. 앞으로 뭘 더 이용하고 속일지 몰라. 그런 사람과 계속 함께 있을 수 있겠어? 나라면……!”
“알아! 안다고!”
감정이 격해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한가롭던 식당에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나도 아니까 화가 나는 거야!”
며칠간 형을 떠나 있으면서 예민해진 내 신경은 종종 머리가 아플 정도의 화를 끌어올렸다. 형을 탓하고 비난하기 위한 화가 아니라, 나 자신을 욕하고 몰아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아는데… 모르는 척할 수가 없단 말이야.”
형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날 좋아해서. 날 사랑해서.
그걸 알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다.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형을 매정하게 외면할 수가 없어서.
강지석을 짝사랑하던 난 그저 소심하게 옆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강지석 옆에 친구로서 머물러, 아무것도 시도해볼 생각조차 못 한 채 그저 가까이 있다는 데에 만족했다.
하지만 내 거울과 같다고 생각했던 형은 전혀 달랐다. 내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게 비난받아 마땅할 행위더라도 서슴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되었음에도 링을 해제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차라리 쭉 속여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서 수십 번 되뇌었다.
형이 지금 이때까지도 날 속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날 감싸 안은 채,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온갖 계략을 꾸미고 입에 발린 말을 속삭여줬다면 우린… 어쩌면 이상적인 연인 같은 게 되어 있지 않았을까.
가슴이 떨리다 못해 머리보다 더 지끈거렸다. 얼마 먹지도 못한 음식들을 죄다 게워낼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미안한데, 이만 가라.”
어렵사리 말하며 테이블을 돌아 카운터로 향했다. 지갑을 꺼내려는 나를 만류하고서 카운터의 점원에게 카드를 들이민 강지석이 내 팔을 잡아 부축하려 했다. 그럴 새도 없이 먼저 나와버리자, 또다시 햇빛을 받은 눈이 핑 돌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파진다. 그새 카드를 돌려받고 튀어나온 강지석이 어깨를 둘러 안아 부축했다.
“너 이대로는 안 돼. 진짜 병원 실려 가겠어.”
“또 링을 해제하자는 얘기나 할 거면…….”
“그런 거 아니야.”
비틀거리는 날 단단히 붙잡은 강지석이 앞으로 쏠린 내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쓴웃음을 보였다.
“링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난 네 친구로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강지석의 말과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네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무슨 의미야?”
눈이 마주친 강지석이 햇빛과 닮은 화사한 미소를 보였다.
“난 전적으로 네 편이라는 얘기야.”
그 미소는 예전이든 지금이든, 너무도 한결같았다.
강지석이 돌아간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싸늘한 집에 함께 도착한 강지석은 나를 위한 침대조차 없는 휑한 방을 둘러보다가 한숨과 함께 직접 장롱을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얇은 패드뿐 아니라 겨울용 이불까지 꺼내서 바닥을 두툼한 매트처럼 만든 강지석은 그 위에 억지로 날 눕혔다.
“못 자더라도 누워있어.”
안쓰러운 눈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준 강지석은 내 손에 휴대폰을 꼭 쥐여주기까지 했다.
“네가 하도 신경 쓰인다고 해서 가는 거지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새벽에 전화해도 받을 테니까 주저하지 말고. 그리고…….”
강지석은 뭔가 더 말할 것처럼 입을 열다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튼, 내 연락도 잘 좀 받아. 네 걱정만 하다가 암 걸리겠다.”
일어서서 문으로 향하는 강지석을 바라보다가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할 말 더 있으면… 하고 가.”
링을 해제하고 자신과 연결하자고 말하던 강지석이었다. 게다가 형이 날 속이고 있었음을 말해준 장본인이다. 내가 비록 꼴이 이렇다 해도 할 말이 많을 텐데, 어째서 챙기기만 하다가 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바보 같다며 윽박지르다가 억지로라도 도진 형을 불러서 압박하는 것도 방법일 텐데, 강지석은 어째 날 한껏 걱정하면서도 몰아세우지 않았다. 링을 해제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고, 모든 걸 기억하는 강지석은 그에 대한 마음밖에 없었던 나를 마주하며 링의 연결을 얼마든지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설마 강지석의 말이 단순한 장난이었던 걸까 생각하기엔, 지금도 날 바라보는 그의 눈이 너무도 또렷해서 숨이 흐트러진다.
그 또렷한 눈으로, 강지석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너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라서 내가 죽겠다고.”
왜인지 하고 싶은 말 대신 날 위한 말만 남긴 듯한 강지석이 미련 없는 얼굴로 집을 나섰다.
강지석이 떠난 집 안에는 벽에 대충 걸린 벽시계의 거슬리는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 소리는 점차 쌓이고 쌓여, 오늘도 내 머릿속에 많은 생각의 씨앗을 심기 시작한다. 그 씨앗이 고작 째깍거리는 소리 때문에 심어진 게 아니라 형이 뿌린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