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13. 신우서
“저쪽 XX전자 노트북 말인데요….”
한 젊은 여자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진열대의 노트북 하나를 가리키며 제품에 관해 물으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으나, 막상 내 얼굴을 보며 꺼낸 말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오늘만 해도 벌써 네 번째 듣는 말이었다. 태연한 척 작은 미소를 띤 채 괜찮다고 답해줬지만,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거듭 괜찮다고 말해주며 여자가 가리킨 노트북 쪽으로 향했다.
“이번에 나온 신형을 봐주셨네요. 경량화에 초점을 둔 제품치고는 사양이 굉장히 좋게 나왔어요. 램 16GB, QLED 디스플레이에 고성능 그래픽 작업도 가능하고 보시다시피 SSD 용량도 1TB가 탑재되어 있죠. 그런데도 무게가 1kg 초반대라서 휴대하기 좋아요.”
“혹시 배터리는 얼마나 갈까요?”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서 작업처럼 간단한 작업이나 웹서핑 정도만 하신다면 최대 19시간까지 사용 가능하세요.”
“와아, 오래가는군요. 색상은 화이트랑 블랙뿐인가요?”
“며칠 전에 블루도 새로 출시되었는데, 워낙 인기가 좋은 색상이라서 예약을 해두셔야…….”
벼락치기로 외워둔 것들을 기반으로 사람 좋은 척 응대를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신이 반쯤 멍해서, 조금 전에 했던 말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내 골골대는 상태를 보고서 노트북 쪽만 맡겨둬서 다행이지, 데스크톱 컴퓨터나 관련 부속품 쪽까지 담당시켰다면 벌써 진작에 머릿속이 꼬였을 거다.
노트북의 파란색 샘플을 보고서 기대에 찬 얼굴로 예약신청서를 작성하는 그녀를 보고 있다 보니 순간 눈앞이 훅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운터를 손으로 짚고서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어 버티니 금세 시야가 되돌아온다.
‘이러다 진짜 쓰러지겠는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긴장 어린 숨을 내쉬었다.
잠을 자지 못한지 어느새 3일째였다.
‘잠깐이라도 좀 쉬겠다고 할까.’
고개를 들어 매장을 둘러보았다.
새로 확장한 가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가전제품이라면 거의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몰려있었다. 그렇다 보니 방문하는 손님들도 다양하고 많았는데 기존에 일하던 직원들만으로는 확실히 응대할 인력이 부족해 보였다. 엄마가 굳이 내게 도우러 오라고 할만도 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쉬겠다고 하면 엄마가 또 한소리 할 것 같았다. 최근 입맛이 없어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던 것부터 시작해서 대학 생활하는 동안 왜 더 비실비실해졌냐고 끝없는 핀잔을 늘어놓을 게 뻔했다.
‘그래도 이러다가 불시에 쓰러지는 것보다야…….’
잠자지 않고 버티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수시로 식은땀이 나고 날이 갈수록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몸은 어깨 가득 돌덩이를 지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 무겁고 순간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횟수도 늘어났다. 속은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고 머리는 지독한 두통 때문에 지끈거려서 이마를 짚지 않을 수가 없다.
객관적으로 봐도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참았었지?’
링이 발현한 후, 내가 지건 형에게 링의 상대라는 걸 들키기 전까지 제법 잘 버텼던 걸 기억한다. 그때는 절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서 그랬기도 했지만, 그전까지 불면증이란 건 내게 꽤 친숙했던 것이었기에 더 태연했던 것도 있었다.
그동안 매일 달콤한 잠을 취했던 게 화근인가 보다. 다시 예전처럼 불면증을 달고 살던 나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형도 많이 힘들겠지.’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형도 나처럼 한숨도 못 자고 있을 테니까.
이럴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손만 잡고 잠깐 잠드는 정도는 괜찮지 않나, 혹시라도 형이 쓰러졌으면 어쩌지, 난 그렇다 쳐도 형은 회사 대표이니만큼 불면증 때문에 피해가 클 텐데, 하는 생각.
‘또 형 걱정….’
나 자신이 너무도 바보 같았다. 이렇게 힘든 와중에도 내 몸보다 형 걱정이 가득했다. 나를 속인 사람인데, 강지석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까지 다 이용한 사람인데, 원하는 걸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인데…….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너무 아파, 카운터를 짚던 손을 떼어 이마를 짚었다. 지끈거림이 도저히 가실 줄은 모른다.
그때.
“우서야.”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내 어깨에 익숙한 크기의 손이 얹어졌다.
‘형…?’
어깨를 흠칫 떨고서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애석하게도 날 부르며 선 사람은 지건 형이 아닌 강지석이었다.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자마자 긴장했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목소리가 다른데 왜 착각했지.’
목소리의 음역보다도 그 안에 담긴 걱정과 다정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어깨를 짚은 손의 익숙한 크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저 내 바람이었던 걸까.
“야, 너 안색이…….”
“어떻게 왔어?”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 강지석의 팔을 걷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형과 닮은 얼굴이라서 강지석을 제대로 보기조차 어려웠다. 형 생각은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하필 눈앞에 있는 게 강지석이라니.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린 강지석이 주변을 둘러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왜 답장 안 해? 전화도 안 받고.”
내가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난 곧장 형의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짐가방에 몇 가지 옷과 필요한 것들만 챙겨 넣고서 말없이 집을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강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도 강지석에겐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전화를 받아, 한동안은 엄마 곁에 있을 거라 말했다. 그 후로는 강지석이든 지건 형이든, 지금까지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걱정하다 죽는 꼴 보고 싶은 건 아니지?”
“퍽이나 죽겠다. 얼굴 보러 온 거면 봤으니까 가. 일해야 해.”
강지석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손님들을 응대하기 위한 자리로 가려 하니, 그에게 팔을 붙잡혀 반대 방향으로 끌려간다.
“어머니께 말씀드렸어. 오늘은 내 핑계 대고 좀 쉬어.”
어느새 그는 내 가슴팍에 달린 명찰까지 떼서 카운터에 올려놓고는 그대로 문을 향해 걸었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다른 곳에서 손님과 대화 중이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상냥한 얼굴을 한 엄마가 짧게 눈짓하는 거로 보아, 강지석이 한 말은 사실인가 보다.
강지석에게 끌려나가 밝은 햇살을 받자마자 또다시 눈앞이 핑 돌았다.
“괜찮아?”
어깨를 둘러 안아주며 지탱해준 강지석이 내 이마를 짚어준다.
“열이 왜 이렇게 높아? 식은땀도 흘리네.”
목소리 사이사이마다 과분할 정도의 걱정이 담겨 있다. 어렴풋이 강지석의 목소리 위에 다른 사람의 음성이 덧씌워진다.
“열이 더 올랐어. 너무 뜨거운데, 어지럽지는 않아?”
지건 형의 전 애인에게 폭우 속에서 폭행당했던 그때가 생각났다. 감기에 걸려버린 내 이마를 짚으며 나보다 더 아픈 얼굴로 안쓰러워하던 형의 모습이 흐릿한 시야 속에 선명히 아른거렸다.
“너는 왜 똑같이 생겨서…….”
“응?”
“…아무것도 아냐.”
강지석의 손을 또 한 번 걷어내며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흐릿하던 눈앞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다.
“쉴 시간 만들어 준 건 고마운데, 그만 가라.”
“잠깐만, 우서야.”
“나 지금 네 얼굴 볼 기분 아니야.”
자꾸 형 생각난단 말이야. 그만 생각하고 싶어.
이참에 집에 가서 누워있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돌아서려는데, 강지석이 못 보내겠다며 팔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알아. 그래도 밥은 먹고 가. 오늘 점심도 걸렀다며.”
엄마에게 어디까지 얘기를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얼굴에 떠오른 단호함으로 보아 쉽사리 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귀찮아서 노려보니 얼굴을 불쌍한 척 일그러뜨리며 간절한 눈을 한다.
“나도 점심 못 먹어서 배고픈데…….”
오후 3시인데 이때까지 밥도 안 먹고 뭐 하고 다닌 거냐고 한소리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진짜든 아니든, 강지석은 내가 그를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겨 어쩔 수 없이 끼니를 챙겼으면 하는 속셈인 듯했다.
‘하긴, 강지석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형 때문에 강지석을 멀리하고 그를 탓하려 드는 건 명백한 잘못이었다. 오히려 나를 챙기러 먼 길을 달려온 강지석에게 고마워해야 마땅하다.
“…근처에 너 좋아하는 김치찌갯집 있어.”
“크-, 역시 나 알아주는 건 신우서밖에 없네.”
밝은 얼굴로 활짝 웃은 강지석이 내 손을 붙잡고서 신난 듯 흔들며 나아갔다. 쪽팔리니까 손 좀 놓으라고 해도 말을 들어 먹을 생각도 않는 강지석은 오히려 놓지 않으려는 듯이 더 꽉 붙잡는다.
링이 발현하기 전과 여전히 변함없는 강지석의 모습은 내 긴장감과 껄끄러움을 금세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쾌활하게 잡담을 시작하는 그를 보다 보니 머릿속을 꽉 채웠던 형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지워지는 것 같다.
새삼 날 찾아와준 강지석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어디선가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얼른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길을 걷는 사람들과 길가에 주차된 낯선 차들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다.
‘나도 참…….’
뭘 기대했던 걸까.
추궁하지도 않은 채 말없이 떠나버린 이 상황에서조차 형의 시선을 느꼈으면 하다니.
짧게 자조하며 씁쓸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또다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일 거라 생각하며 눈앞의 강지석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