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다음날.
급한 척 대로변에 차를 세우고서 세 사람이 만나고 있을 카페로 달려가며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이럴 때마저도 불쌍해 보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꼴이라니.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었다. 우서가 그의 선택에 나를 향한 연민을 조금이라도 섞어서 고민해주면 좋겠다.
슬슬 보이기 시작한 카페 간판을 보며 전날에 한도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우서 씨의 사진을 봤었어요. 정확히는 지석 씨가 우서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죠.
한도진은 강지석의 고민을 들어줄 때, 얼굴을 가린 두 사람의 사진을 받았다. 얼굴이 가려져 있긴 했지만 우서의 손에 있는 링만 봐도 그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링에는 보유자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어요. 세세한 감정까지 낱낱이 보여줄 정도로 링은 아주 솔직하거든요.
말투가 마치 세상의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늙은이 같았다.
-강지건 씨가 우서 씨를 잡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인지 알아요. 방법과 과정이 절대 순수하지 않지만, 우서 씨가 강지건 씨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라는 건 링만 봐도 알죠.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던 한도진이 우습게도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강지건 씨를 돕는 건 우서 씨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자각했으면 해서예요. 하지만… 역시 링의 해제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한도진의 말투가 점차 조심스러워졌다. 그뿐 아니라 날 걱정하기까지 한다.
-제가 가장 걱정하는 건 강지건 씨예요. 정말 우서 씨가 링의 해제를 결정하면 그대로 따를 거예요? 기억을 잃으면 우서 씨에게 품었던 감정까지 전부 잃게 된다고요.
“알아요.”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우서가 정말 링의 해제를 선택하고 예전으로 돌아가, 모든 걸 기억하는 강지석의 손을 잡게 되지는 않을까 겁이 난다. 우서의 모든 정보를 차곡차곡 모으고 내가 그에게 품었던 감정을 백날 문서로 쌓아둔다 한들, 그렇게까지 필사적인 건 나뿐이라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는 공포가 되어 전신을 덮친다.
서로를 잊은 후, 우리는 어떻게 될까.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아니까 우서에게 선택권을 주는 거예요.”
결정을 내리는 자의 어깨에 얹어진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다.
절대 크다고 할 수 있는 회사는 아니지만, 주요 분야에서 확실히 영향력 있는 자리까지 올라온 기업의 대표로서 지금도 어깨에 지어진 짐이 무겁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무거워서 적응해버린 것뿐, 뭔가를 결정할 때마다 그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여파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고민하고 갖가지 자료를 모아 조금이라도 여파를 예측하고자 하는 거다.
하지만 그 결과를 안다면? 자신의 결정이 무엇을 바꿀지 이미 알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큰 중압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사인 한 번, 끄덕거림 한 번, 말 한 번에 크나큰 변화가 찾아온다. 누군가를 좌절시킬 수도 있고, 누군가를 기뻐 날뛰게 할 수도 있다. 그게 제 손끝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선택권을 쥔 누구든 어깨가 무겁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선택의 무게를 우서의 어깨에 차곡차곡 올려주고자 했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우서 역시 나에 대한 기억을 잃었을 때를 상상하며 두려워하고 있을 걸 알기에.
“한도진 씨는 내 부탁대로 우서의 감정만 끌어내 주면 됩니다. 결정은 우서가 할 거예요.”
-…알겠어요.
한도진은 전화를 끊는 순간까지도 뭐가 그렇게 걱정인지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일이 링 보유자들에게 이만큼이나 신경을 쏟는 것도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달려서 도착한 카페 앞에 서서 숨 고를 새도 없이 문을 열었다. 한도진이 알려준 대로 작은 카페 안에는 세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역시나 우서였다. 의자에 앉아 등 뒤에 왼손을 주먹 쥐어 감춘 채 눈을 내리깔고 있다.
우서의 얼굴만 봐도 알 것 같다.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생각과 감정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는 건지.
빠르게 걸어가 우서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숨겼던 왼손이 드러나자마자 그의 링부터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직도 우서를 기억하고 있으니 링이 해제됐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역시나 그의 약지에 링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고서 그제야 짧게 안도했다.
평소라면 다정하게, 혹은 불쌍한 척 애틋한 눈을 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의 난 일말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은 척해야 했으니까.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나와.”
싸늘한 목소리에 우서가 흠칫한다. 그러자 강지석이 벌떡 일어나 내 손목을 꽉 잡아 쥔다.
“손 놔. 우서가 무서워하잖아.”
“강지석….”
위협하듯 이를 드러내고 살기를 보였지만 강지석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손목을 붙잡은 녀석의 손아귀에 무시하지 못할 강한 힘이 실리더니, 단번에 내 손을 떼버린다.
“도진이 형이 부른 거예요?”
“링을 해제하기 위해선 둘 다 함께 있어야 해요. 그리고…….”
강지석의 물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한도진이 그를 향해 날카로운 빛을 보였다.
“지석 씨한테 들었던 것과는 좀 달라 보이네요.”
강지석은 우서가 내게 억지로 끌려다니는 것처럼 얘기했을 테니 링 보유자들에 관해 민감한 한도진으로서는 그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을 거다. 링에 담긴 우서의 흔들리는 감정을 읽었다면 더더욱.
몸을 돌린 한도진이 나를 힐끔 보더니 그대로 카페를 나섰다. 그러자 얼어있던 공기가 한층 더 진해진다.
우서를 제 등으로 가려 선 강지석이 겁도 없이 이죽거렸다.
“어지간히도 급했나 봐? 왜? 내가 우서한테 다 말해버릴까 봐?”
한기를 담은 강지석의 말이 꽤 날카롭게 울렸다.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우서의 눈동자가 의문을 담아 흔들린다.
“다 말해버리면 아무리 우서라도 분명히 링을 해제하자고 할걸. 그게 무서웠던 거지?”
강지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흘러나올수록 점점 초조했다. 기분 나쁜 긴장감이 찾아와 어깨를 누르기 시작한다.
굳이 연기를 할 것도 없었다.
들키지 않았으면 했던 부분들을 이제 하나씩 하나씩 드러낼 때가 되었다. 그에 대한 우서의 반응이 어떨까 생각하니 무서울 정도로 초조해졌다.
완전히 질려버린 우서가 당장이라도 한도진에게 전화를 걸어, 링의 해제를 요구할 것만 같다.
내게 보이던 선하고 따뜻하던 눈동자가 서릿발을 머금은 것처럼 차갑게 변할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마음을 무시하려던 과거의 나처럼 무심해질까 봐 두렵다.
우서는 내가 초조해하는 얼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른 건 다 참아도 우서 기만하는 건 못 참아.”
“웃기지 마. 네가 뭔데 감히 멋대로 굴어?”
험한 분위기를 여과 없이 흘리자, 강지석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
“언제까지고 링을 빌미로 맘껏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형 본심을 알면 우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걸?”
“너……!”
화를 이기지 못하는 척 강지석의 멱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차마 우서 앞에서 강지석을 때릴 순 없어, 이를 꽉 깨문 채 손을 내렸다. 대신 우서를 향해 잡아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우서야. 나가자.”
이제 우서도 들을 만큼 들었고 볼 만큼 봤다. 더 이상 강지석까지 우리 사이에 끼워서 얘기할 필요 없다.
손잡아줘, 우서야.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
속으로 우서를 부르는 내내 애가 탔다. 혹시라도 내 손을 거부하고 강지석 뒤에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아직은 안 되는데.
걱정과 초조함이 쌓여, 기껏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무너져 내릴 것 같다.
“형이… 날 기만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날 속였어요? 뭘……?”
우서의 목소리를 타고 그의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알아.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알아.
알기에 내 손을 잡아달라 말했다. 날 믿는다면, 내가 예상하는 것처럼 네 감정의 반이라도 날 향해 있다면 제발 잡아주길 바랐다. 그래야만 내가 짜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머뭇거리던 우서는 이내 내 손을 잡았다. 우서의 부드러운 손이 잡히는 순간, 욱신거리던 가슴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어차피 오늘 당장 결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어. 난 네게 충분히 도망칠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카페를 나서는 우서를 향해 말을 던진 강지석이 날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의 강지석에게선 아까의 살벌한 기운 대신 묘한 차분함과 단호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나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이라도 이런 확률 낮은 도박 대신 다른 길을 찾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가능할 거라고, 나라면 새로운 계략을 짜고 그것에 거짓말을 덧대어 전부 포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렇게 할까?’
교묘한 거짓말을 섞는다면 안 될 게 없다. 우서가 알아챌 수 없도록 정교한 거미줄을 만들어서……!
그러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는 순간, 핸들을 확 꺾어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복잡한 대로변과 달리 차가 적어서 뻥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길로 빠르게 나아갔다.
‘아니야, 거짓말은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만 가지고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 거짓은 커지면 커질수록 더 큰 악순환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차를 멈춰 세우고서 눈을 꾹 감았다.
“절 속였어요?”
우서의 떨림 섞인 말이 안쓰럽다. 혼란스럽겠지. 내가 뭘 속였는지, 뭘 하려 했던 건지, 왜 그랬는지.
“정말 속인 거라면… 뭘 속였는지 물어봐도 돼요?”
예상대로의 질문에 우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새 겁먹은 것처럼 두 손으로 안전띠를 꼭 쥔 채 눈가를 떠는 모습을 보고나니, 다시금 아무것도 아닌 척 그를 안아주고 강지석의 못된 장난에 불과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내가 널 속인 건 아무것도 없다고, 믿어달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우서야. 나는…….”
네가 내 어두운 부분까지 전부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의 링은 영원히 완전해질 수 없을 것만 같다. 반대로 네가 그걸 받아주기만 한다면 더 이상 속일 필요도 없겠지.
“네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그렇기에 처음으로 네 앞에서 비열한 진심을 입에 담았다.
그건 너를 완전히 내 손에 넣기 위한 마지막 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