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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78화 (78/99)

78화

이후, 옷을 갈아입은 채 베란다로 나왔다. 입에 담배를 물고서 한도진과 짧은 몇 마디 말을 나누니, 우려와 달리 그는 내 말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커넥터들에겐 묘한 사명감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건너 들은 외국의 다른 커넥터에 대한 것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링 보유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링조차 없는 강지석을 한도진이 굳이 만났던 이유가 이미 링 보유자와 커넥터로서 만났던 나나 우서가 얽혀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협박할 것 없이 알아서 OK 해줘서 다행이군.’

거창한 걸 부탁한 것도 아니지만, 한도진이 깊이 파고들지 않고 적정선에서 고개를 끄덕여 준 덕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허튼수작을 부리면 이쪽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매캐한 연기를 뿌리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서, 생각에 잠겨 바라보고 있던 휴대폰에서 그제야 눈을 뗐다.

‘다음은…….’

시선이 향한 곳은 우서의 방이었다. 베란다를 나와 우서의 방 앞에 선 나는 의아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분명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약간의 틈을 보이며 열려 있다. 커튼이 쳐져 있어서 강지석이나 우서가 방에서 나왔다가 들어간 걸 몰랐던 걸까. 통화 중이지 않았더라면 소리라도 들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틈으로 강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어머니랑 통화하고 나면 열나는 거 알아?”

열?

강지석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놀라 문틈을 들여다보았다. 침대에 앉아있는 우서의 등과 그를 바라보고 강지석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우서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열을 재더니, 이젠 볼을 감싸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너 좀 가만히 뒀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보니 우서의 집안사는 내가 완벽히 알고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가끔 강지석이 우리 부모님보다도 더 살갑게 대하며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는 사람이 우서의 엄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우서가 그 엄마를 유독 꺼린다는 것도.

“가끔 우서네 엄마는 우서를 도구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

“남의 엄마를 왜 그렇게 생각해? 너답지 않게.”

“나한테는 굉장히 잘해주시는데… 가끔 말씀하시는 거나 우서가 힘들어하는 거 보면 좀 그래. 우서가 어머니에게 당연히 헌신해야 하는 줄 아셔.”

언젠가 강지석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였다. 짧은 이야기이기도 했고 강지석도 우서의 집안사이니 더 구구절절 얘기하기 어려웠던 걸 테지만,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상황이 좀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우서의 얼굴을 쓰다듬는 강지석의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간, 구도상 이쪽을 바라보는 방향에 있던 강지석이 슬쩍 눈을 들었다. 우서가 알아채지 못한 차가운 눈이 문틈 사이에 있던 내 눈동자를 정확히 바라본다. 강지석의 다른 손까지 올라와, 우서의 얼굴을 가두듯이 그의 양 볼을 감쌌다.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 애를…….”

그제야 문이 살짝 열려 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참 귀엽기도 하지. 이딴 것도 복수랍시고.

문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 보다.

강지석의 행동이 짜증스럽다기보다 참 귀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덕분에 좋은 간섭할 거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갈등을 일으키는 인간과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응당 그와 상반되는 인간에게 기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기대게 된 인간에게 그 갈등을 해소해줄 능력까지 있다면 아예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런 정보는 꽤 중요하다.

조만간 우서의 부모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강지석을 향해 피식 웃어주었다. 그의 눈가가 살짝 꿈틀하는 게 보인다.

그때, 우서가 강지석의 손목을 붙잡아 떼려 한다.

“괜찮아. 이번엔 오랜만에 전화 온 거기도 하고.”

손목을 붙잡힌 강지석은 여전히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내게 정신이 팔려서인지 우서의 얼굴에서 도통 손을 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고맙다. 엄마한테 끌려갈 뻔한 걸 네가 살렸어.”

우서의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그건 어머니라는 사람이 남긴 여운 때문이라기보다, 강지석을 의식해서였다. 그도 얼굴을 붙잡고 있는 강지석에게서 석연치 않은 기운을 느꼈겠지.

‘어쩌나, 예전의 우서가 아닌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강지석을 의식하는 건 똑같겠지만, 그 기저에 깔린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예전에는 강지석이 너무 좋은 나머지 그걸 들키게 될까 봐 의식했다면, 지금은 순수히 설렐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가까웠다. 강지석이 그를 조급하게 헤집었던 게 큰 이유겠지만, 아마 내 탓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할 말 있어? 왜 자꾸 봐….”

우서가 곤란해하는 걸 보니 이대로 가만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모른 척 눈을 떼고 돌아갔다가 강지석이 또 조급히 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야 좋겠지만, 우서가 상처받거나 강지석을 더욱 신경 쓰게 되는 건 달갑지 않다.

문을 느릿하게 열었다. 이쪽을 본 강지석이 눈을 치뜨며 경계하는 게 보였다. 그래봤자 내겐 귀여워 보일 뿐인데.

똑똑-

화들짝 놀란 우서가 다급히 강지석의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강지석이 감쌌던 탓인지 조금 붉게 변한 볼이 신경 쓰였다.

“형, 이건…….”

내 것을 감쌌던 흔적이 이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을 줄이야. 아까의 여유로움이 흔들릴 것 같다.

방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 웃는 얼굴로 강지석을 붙잡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링의 연결을 노리고 있을 그를 눈으로 비웃어 주었다.

“지석아.”

강지석에게 가려 내 눈빛까지는 미처 보지 못한 우서가 그새 걱정스럽게 우릴 바라본다.

“내가 어릴 때부터 누누이 가르치지 않았어?”

웃는 얼굴로 목소리에 날카로움을 담아 경고했다.

“형 거엔 손대는 거 아니라고.”

강지석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요 며칠간 단번에 나이를 먹기라도 한 건지, 강지석의 눈빛이 꽤 어른스러우면서도 잘 벼려진 칼과 같다.

“우서가 왜 형 거야?”

목소리도 제법 깔 줄 알고.

“우서가 불편해할 만한 말은 하지 마.”

우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성장인가.

새삼 우리 형제에게 우서가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싶었다. 이런 어린애마저 업그레이드시키다니.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알았다고 해줄 생각은 없지만.’

난 눈을 치뜨고 노려보는 강지석을 향해 작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고선 강지석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네가 링 해제법을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우서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가 강지석의 어깨를 흠칫하게 한다.

“어디 한 번 해제해 봐.”

강지석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의 찌를 듯한 눈길이 느껴진다.

“링을 해제당했다고 해도 난 변하지 않아.”

고작 그딴 것 때문에 변하면 말이 안 되지.

링을 누군가가 해제할 수 있다는 것과 부작용을 알게 됐을 때부터 준비했던 게 있다.

내가 아는 우서에 관한 모든 정보, 그의 성격, 성품, 그리고 그에게 빠져들었던 시절의 교복을 입은 사진까지.

긴 시간 동안 그를 곁에 두고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걸 상쇄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를 모아두는 건 필수였다. 우서와 링이 연결된 걸 알게 된 시점부터 매일 기록해둔 그에 관한 것들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하나하나 되짚으며 신우서에 관한 모든 것을 모았다. 그의 부모에 관한 것도 우서의 입을 통해 곧 나의 묵직한 ‘신우서’ 폴더 안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겠지.

정보는 지식이 되고, 지식은 기억이 된다.

기억은 추억을 만들고, 추억은 애정을 낳는다.

그 모든 것은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내가 신우서라는 인간에게 얼마나 애절하게 집착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기억을 잃은 강지건에게 있어 그것들은 꽤 큰 충격이니,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감정을 갖게 될 게 뻔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니까.

우리의 링이 비록 완전치 않은 것처럼 관계 역시 완벽하지 않지만, 내 마음은 절대 쉽사리 망가뜨리고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 그걸 깨부수는 건 링을 해제할 수 있는 커넥터에게도, 내 동생 강지석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 자신한다.

“결국은 커넥터 앞에 우서를 질질 끌고 가서라도 다시금 링을 연결하게 될 거야.”

우서를 묶어둔 링이라는 족쇄가 사라지면 새것으로 다시 채워주면 될 거 아냐.

강지석의 얼굴이 단번에 험악해지더니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우서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보며 강지석에게만 보일 입술을 달싹였다.

말했잖아.

우서는 내 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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