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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77화 (77/99)

77화

다행히 손이 먼저 나가는 일은 없었다. 이런 어이없고 황당한 때일수록 냉정해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그때 다 봤으면서도 그런 소리를 잘도 하네.”

“봤으니까 하는 말이야. 내게는 형이 우서를 농락하고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어.”

우서가 감정을 터뜨리는 부분까지 다 보고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연기를 함으로써 우서의 감정을 확인하고자 휘두른 건 인정한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다. 각자 감정이 변하고 흘러가는 시간조차 다르고 그 농도가 짙어지거나 옅어지는 걸 일찍이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애석하게도 난 우서가 강지석 대신 언젠가 나 자체를 바라봐줄 날이 오겠지, 하는 태평한 생각에 찌들어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난 강지석의 조급함을 비웃을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우서와의 링이 생긴 걸 확인하자마자 가슴의 거친 박동을 주체하지 못해 조급해졌던 건 바로 나였다. 지금도 그 조급함의 조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저 깊은 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링이라는 절대적인 무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강지석을 이길 수 없었다. 언제나 아이 같던 남동생에게 생애 처음으로 느껴본 패배감은 그런 링 하나로 찍어 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가면 쓴 얼굴로 우서를 마주하고 강지석의 대용품을 자처했다. 링을 빌미로 거리를 좁히고 고동을 나눌 때마다 조급함과 불안함이 조금씩 사그라졌지만, 완전히 지워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이쯤이면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우서의 시야가 닿지 않는 저 밑바닥에서부터 강지석과 대등한 자리까지 올라온 지금이라면 조금쯤 의기양양해도 좋을 거라 자신했다.

우습게도 강지석은 그런 내게 ‘예전처럼 돌아가자’라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오래도록 품어왔던 우서에 대한 감정을 링의 해제를 통해 완전히 지워내자 말한다. 이후엔 이제껏 모르고 있었던 우서의 마음을 통째로 삼키겠다는데, 어린 동생의 치기라 여기기엔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저만큼 확신하며 말하려면 그만한 정보가 있다는 건데…….’

링의 해제에 대해 대충 들은 말 정도로는 링의 해제가 가져올 부작용을 알 리가 없다. 게다가 강지석은 좀 둔하긴 해도 머리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다. 링의 해제가 곧 기억상실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만약 어쭙잖은 정보망이었다면 코웃음치며 무시했을 거다.

‘커넥터를 만났나.’

한국에 몇 명이나 되는 커넥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도진 한 명일 수도 있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십, 수백 명일 수도 있다. 누구를 어떻게 찾아서 만났는지 몰라도 한가지 알 수 있는 건, 그가 만난 게 링 해제의 부작용을 확실히 설명해줄 커넥터임이 확실하다는 거다.

강지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그의 곁을 지나쳐 내 방으로 향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우서한테나 가 봐.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었으면 네가 수습해야지.”

일부러 강지석에게 그 말을 남기며 내 방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거실에 멈춰 서 있던 것 같은 강지석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역시나 우서의 방문을 노크했다.

‘단순하긴.’

우서에게 떠보고 싶은 것도 많고 얘기하고 싶은 것도 많겠지. 하지만 조금 전에 내게 한 것처럼 링의 해제에 관해 섣불리 말하긴 어려울 거다. 우서는 그 스스로의 의지로 링의 해제에 거부감을 보였고 오늘은 특히나 나와 시간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 강지석이 날 욕하며 링에 관해 압박한다면 제아무리 그를 좋아하는 우서라 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타이밍 나쁜 몰아세움은 오히려 이쪽에게 득이 되니, 강지석이 제대로 생각이 있다면 상황을 살피기만 할 것이다.

문을 열어놓은 채 내 방에 겉옷을 벗어놓았다. 열린 문을 통해 우서의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넥타이를 풀어내고서 방에서 나온 나는 맞은편에 있는 강지석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소리없이 방문을 부드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간 내 눈에, 강지석의 책상 위에 닫혀있는 노트북이 보였다.

노트북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번호도 걸려있지 않은 메인 화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강지석의 노트북을 열어 가장 먼저 한 일은 홈 화면의 검색창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강지석은 내 손가락에 링이 발현한 그날부터 한동안 컴퓨터만 붙들고 살았다. 링 해제, 링 수면, 링의 유지기간 등, 같은 검색어를 하루에 몇 번이나 다시 넣어 확인하며 혹여나 생겼을 새 정보에 주목했다. 그게 날 위해 밤낮없이 정보를 찾던 흔적이라는 걸 알기에 고맙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었다. 링의 상대가 우서라는 걸 알게 된 시점에는 링의 해제를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만두게 했지만.

실제로 강지석이 노트북이나 휴대폰으로 링의 해제에 관해 찾아다녔던 건 꽤 예전이었다. 말 잘 듣는 동생은 내가 그만두라 하니, 링의 상대와 잘 되고 있구나 하며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링에 관해 알아보던 건 확실히 그만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응당 강지석이 그간 입력해왔을 검색어는 다른 것들로 가득 차있어야 할 거다.

하지만 최근 검색어 목록에는 오로지 링에 관한 것뿐이었다.

“후우…, 강지석….”

링의 해제나 부작용에 관해서만 검색한 거라면 이처럼 속에 있는 뭔가가 꿈틀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저 귀엽게 보고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링의 연결>

<링 운명 연결>

<좋아하는 사람과 링으로 연결>

강지석은 해제뿐 아니라 연결마저 알아보고 있었다. 자신과 우서의 감정이 부딪히던 그날의 광경을 다 봤으면서도 태연히 그를 빼앗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눈가를 사정없이 찌푸린 채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다가 문득 우서가 예전에 링을 검색하던 걸 떠올렸다. 그때는 강지석이 주로 쓰는 검색용 포털 사이트가 아니라 무슨 온라인 모임 사이트였던 것 같다.

기억을 되짚은 덕분에 그 사이트는 검색 몇 번만으로도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서가 워낙 유명한 링 관련 사이트를 두루 뒤지며 게시글을 올리곤 했었기에 까탈스러울 것도 없었다.

가입을 해야만 글을 쓸 수 있는 사이트였지만 검색은 일부 가능했다.

마우스 커서를 검색창에 가져다가 클릭한 순간, 이전에 검색한 목록이 주르륵 펼쳐진다. 이 사이트도, 다른 사이트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서가 주로 쓰던 사이트를 전부 똑같이 썼다는 건…….’

이쯤되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혹시 몰라서 검색에 노출된 ‘링의 연결’을 찾아보았다.

[링이 이미 있는 사람과 링을 연결하고 싶어요.]

낯익은 닉네임이었다. 다른 사이트에도 검색해보니 같은 닉네임으로 이와 동일한 제목을 단 게시글이 있다.

‘확실해 보이네.’

링의 연결법을 찾는 게시글 중, ‘링이 이미 있는 사람’과 링을 연결하고 싶다는 게시글은 아주 드물었다. 보통은 단순히 해제법과 연결법을 찾곤 한다.

특이한 게시글이 올라왔던 어제는 우서와의 장면을 강지석에게 보여준 다음날이었다. 특히나 오늘은 웬일로 우서까지 떼놓고 누군가를 만난다며 외출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하면 우서의 시간표를 꿰고 있는 내가 그를 일찍부터 만날 것임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밖으로 향했다.

강지석은 커넥터와 접촉했던 우서와 똑같은 방식을 쓰고 있었다. 검색어부터 시작해서 이용하는 사이트도, 게시글도, 몰래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것조차.

우서와 그렇게 붙어 다녔으니 알아보는 것마저 겹치는 게 당연했다.

‘쓸데없는 걸 닮아준 덕분에 덜 귀찮겠어.’

내가 남긴 검색어와 건드린 흔적을 지운 뒤, 아무도 노트북을 열지 않았던 것처럼 조심스레 화면을 닫았다. 그대로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메시지를 남길까 하다가 그 녀석의 성격상 전화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흔적 남는 걸 싫어하는 녀석이니.

몇 번의 신호가 가고, 건너편에서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먼저 전화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무슨 일이세요?

“모르는 척하지 말죠.”

베스트를 벗어 던지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제 동생 만났죠?”

우서가 커넥터 한도진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기억하고 있던 나는 같은 방법을 쓴 강지석에게 접촉할만한 커넥터 역시 그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한도진은 한차례 멈칫하다가 한숨과 함께 순순히 대답한다.

-동생 분에게 비밀 지키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제 말이 이해되지 않았나 봐요.

“강지석은 딱히 그쪽을 지목하지 않았어요. 제가 찾아낸 거지.”

단추를 모두 풀어낸 셔츠를 벗으며 한도진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링조차 없는 제 동생과 만나서 멋대로 정보를 준 만큼, 그쪽도 절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요.”

-링이 없는 사람들에게 링을 연결해 주는 것도 제 일이니 비난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최우선적으로 도와야 하는 건 링을 이미 갖고 있는 분들이긴 하죠. 뭘 해주면 좋겠어요?

“별거 없어요.”

거추장스럽던 새하얀 셔츠를 의자에 던지듯 걸쳐두고서, 벗어둔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한도진 씨가 할 일은 강지석이 우서와 함께 그쪽을 만나는 날, 나와 말을 좀 맞춰주는 겁니다.”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어쩌면 이번이 우서를 완전히 삼킬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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