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76화 (76/99)

76화

12. 강지건

내가 아는 동생 강지석은 참 한결같은 녀석이었다.

옛날에나 마음씩 착하다는 표현을 해줬지, 요즘에는 ‘호구’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 법한 과도한 이해심의 대인배였다. 상당한 오지랖도 무시할 수 없다.

자신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수시로 좋은 형 흉내를 내듯이 도와주려 안달이고, 누가 뭘 부탁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 잘도 끌려다니는 바람에 고등학교 1학년 땐 좀 거친 녀석들의 부탁으로 담배와 술을 사러 갔다가 내게 걸려서 된통 혼나기까지 했다.

그나마 녀석의 그런 점이 나아진 건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신우서라는 친구가 생긴 후였다.

우서는 얌전하게 생겨서는 나름 똑 부러진 면도 있고 생각도 깊었다. 그래서 지석이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곤란해할 때는 그가 대신 나서서 고개를 저어주었고, 어딘가 이용당할 것 같으면 알아서 미리 차단해 주기까지 했다. 그건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동기들이 집안사를 핑계로 조별과제를 떠넘기면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으로 대신해줬을 지석이의 개념을 꽉 붙잡아 준 사람이 우서였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예전의 한창 호구 같던 모습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물론 사회생활이 조금 걱정될 정도로 물러 터진 구석이 있긴 하나, 맥없이 끌려다니던 중고등학생 때와는 차이가 컸다.

나는 그 차이를 만든 게 우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예뻐하고 내가 나서서 과외를 해주겠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강지석은 우서와 만난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변화하고 있었다.

딱 그 정도에서 그쳤어야 했다.

더 변화하려 들지 않고 적당히 멈춰 서서 다른 녀석들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양보하고 고개를 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내 동생으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네가 알아서 내게 그래왔듯, 이번에도 순순히 물러나 주길 바랐다. 그렇게만 해주면 네가 모처럼 뭘 갖고 싶다, 뭘 하고 싶다고 말해도 다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왜 하필 지금에 와서야…….

* * *

“어울려주느라 수고했어. 푹 쉬어.”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 우서가 우리 사이에 서 있는 강지석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의외의 대답을 해준다.

“오늘 재밌었어요, 형.”

가슴 어딘가에 찌릿한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고작 재미있었다는 말 한마디에 강지석과의 신경전은 모두 잊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우서가 방으로 들어간 후, 나 역시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성큼 다가온 강지석이 앞을 막아 섰다.

“뭐야?”

우서의 말 덕분에 기분은 좋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송곳에 둘러싸인 듯한 이 공기가 바뀐 건 아니었다. 강지석은 명백히 반항적인 눈을 한 채 날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예전엔 이렇게까지 반항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우서가 사이에 끼면 예민해지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내게 눈을 부릅뜨며 한 대 칠 기세를 보이는 건 의외였다.

강지석은 승패를 나누는 일에 꽤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패가 난 일을 뒤집으려 한다거나 순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은 즉각 납득하곤 했다.

그래서 지난 이틀간 조용히 있던 이유가 당연히 내가 준 ‘패배감’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강지석은 우서에 대한 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가 어떤 마음인지 확인해버렸다. 더불어 나는 우서를 얻기 위해서라면 동생이든, 친구든, 그 무엇이든 다 이용할 생각이라는 것도.

‘무엇보다 내겐 링이 있어.’

거창하게 운명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단순한 붉은 실 한 줄이 다였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내 강력한 무기였다.

지금까지 봐온 강지석을 떠올려보면, 그는 이쯤에서 물러나야 했다. 우서의 마음도 모르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어버렸으니 당연히 단념해야 하지 않나. 뒤늦게 우서를 바라보는 눈이 나와 같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어디 갔다 왔어?”

강지석은 용의자를 취조하는 형사처럼 제법 매서운 눈으로 캐물었다.

“내가 그걸 일일이 말해야 해? 피곤하니까 비켜.”

말이 끝났음에도 비킬 기색이 없는 강지석을 보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힘으로 밀어내고 지나가려니, 근래 운동 좀 했다고 힘이 상당해진 강지석이 어깨의 손을 쳐내었다.

“어디 갔다 왔냐고.”

우서 덕분에 좋아졌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강지석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픽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게 그렇게 알고 싶어?”

우서와 둘이 찍은 배경화면 대신, 그가 교복 차림으로 예쁘게 웃고 있는 모습을 화면에 채워 보여주었다. 그걸 본 강지석의 눈가가 움찔거린다.

“내가 바보같이 굴었던 그때부터 천천히 채워 넣어보려고.”

차곡차곡 빈 곳 없이 틈틈이 채워야 내게로 오지. 강지석 혼자서 다 차지한 채 내어주지 않던 그곳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으면 하나씩 하나씩 내 공간을 넓혀가야 하지 않겠어?

내가 넣기 시작해야 할 부분은 우서가 강지석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내 마음을 바보같이 억누르기만 하던 그 시절이었다. 강지석과 같은 얼굴로 천천히 그를 지워내며 그 공간에 나를 대신 채워주려 한다. 뭘 지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도록 꼼꼼히.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강지석의 얼굴이 금세 험악해졌다. 녀석은 내 손목을 꽉 붙잡더니만 눈썹이 꿈틀할 정도로 부러뜨릴 듯 힘을 주었다.

“우서와 링이 있다는 건 알겠어. 형이 진짜 우서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겠고. 근데…….”

숨을 한차례 고른 강지석이 단호하게 말을 잇는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우서가 속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속아? 뭘?”

손목의 통증조차 잊은 채 피식 웃으며 반박했다.

“내가 우서를 속인 건 하나뿐이야. 링이 발현되기 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던 주제에 선뜻 말할 수 없어서 링을 빌미로 곁에 두려고 했던 거.”

가볍던 미소는 금세 차갑게 돌변했다.

“우서는 5년 전부터 널 좋아하고 있었으면서 관계가 깨질까 봐 차마 말도 못 꺼냈어. ‘절친’이라는 타이틀을 빌미로 네 곁에 계속 머무는 게 우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

그 말에 강지석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나랑 우서는 닮은꼴이야. 감정을 견디는 방법도, 누군가를 바라보는 방법도 같았어.”

강지석의 손을 떼어낼 즈음엔 내 얼굴에 걸려있던 차가운 미소마저 사라져 있었다.

“날 비난하려면 우서도 함께 비난해야 해. 네게 그게 가능하기나 해?”

가능할 리가 없지.

강지석이 신우서를 비난할 일은 없다. 다른 사람 모두가 당연스럽게 우서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강지석은 언제까지나 우서의 편에 설 것이다.

“…형이 나와 민아 누나를 이용해서라도 우서의 마음을 돌리려는 건 알아. 알겠는데… 그건 솔직하지 못한 거잖아. 우서가 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짓 환경을 만들어서 흔들고 있는 게 언제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제 나이를 좀 먹어서 그런지 강지석도 그럴듯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진지한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나는 형이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우서가 아니라?”

강지석이 한차례 눈을 내리깔더니, 다시금 결연한 눈으로 날 마주 본다.

“그러니까 포기 안 해.”

강지석의 두 주먹이 꽉 쥐어지고, 그의 반듯한 넓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우서만은 포기 못 해.”

헛웃음이 났다. 내가 알던 막냇동생 강지석은 어디 가고, 눈앞에는 처음 보는 낯선 청년 한 사람이 서 있는 기분이다.

우서가 그를 향한 강지석의 집념마저 변화시킨 걸까. 아니면 그의 말마따나 ‘나를 위해’인 걸까.

“포기 못 하면?”

답답한 넥타이의 매듭에 손가락을 걸어 풀어냈다. 찌를 듯한 공기가 허술하게 풀려버린 셔츠의 깃 사이로 파고든다.

강지석의 딱딱하던 얼굴이 천천히 부드러워지더니, 내가 자주 지었던 씁쓸한 미소를 만들어낸다.

“우서가 가진 링, 내가 해제해 줄 거야.”

“뭐……?”

강지석의 발언을 잠깐 곱씹어보고서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게 그렇게나 쉽게 해제할 수 있는 건 줄 알아?”

“링을 해제하면 서로의 기억이 사라진다고 들었어.”

비웃던 입꼬리가 내려가고 내 눈가가 저절로 일그러져갔다.

링의 해제는 곧 서로의 인연을 끊어내는 것. 그동안 쌓아온 기억과 추억마저 사라지고 만다.

그걸 아는 건 커넥터와 접촉한 사람뿐이었다. 링을 보유하지도 않은 강지석이 어째서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형이 우서에게 솔직해지지 못하고 계속 망가져 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러느니 차라리 둘 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게 낫지.”

“미쳤어?”

“아니, 아주 정상이야.”

강지석이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짚으며 당당히 내뱉는다.

“우서의 마음도 이젠 나도 확실히 알고 있잖아. 날 쭉 좋아해 왔다는 것도. 그러니까 형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나면 우서 마음 외면하지 않고 내가 먼저 다가가서 안아줄게.”

이런 미친 새끼.

하도 어이없는 말을 들어버려서 순간 나도 모르게 한 대 칠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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