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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75화 (75/99)

75화

“형…?”

예상치 못한 지건 형의 등장에 깜짝 놀란 나머지 팔의 통증마저 잊고 말았다. 형은 내 왼손 약지를 확인하고 잠깐이나마 안도한 듯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나와.”

싸늘한 목소리에 어깨가 떨렸다. 붙잡힌 팔의 통증이 다시금 찾아와 아릿해진다.

형의 강한 힘에 이끌려 단숨에 몸이 일으켜진 것으로도 모자라 근거리에서 맞닥뜨린 눈동자가 너무도 무서워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때까지 내가 알던 형과는 다른 느낌이라서 그런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마치 처음 만나는 타인 같다.

숨통을 틀어막힌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있는데, 마주 앉았던 강지석이 벌떡 일어나서 형의 손목을 꽉 잡아 쥐었다.

“손 놔. 우서가 무서워하잖아.”

“강지석….”

씹어 뱉는 듯한 살기 품은 목소리에도 강지석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더 꽉 쥐어서는 억지로라도 비틀어 떼어낼 기세다.

분위기가 워낙 험악해서 놔달라는 말도 못 하고 굳어있었더니, 강지석이 단번에 힘을 줘서 형의 손을 떼어내 준다. 자유로워진 팔의 붙잡혔던 부분을 감싸며 주춤했다. 형이 붙잡았던 부분의 살결이 아프게 타들어 가는 것 같다.

형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험하게 노려보고 있던 강지석이 그 눈을 도진 형에게 향했다.

“도진이 형이 부른 거예요?”

“링을 해제하기 위해선 둘 다 함께 있어야 해요. 그리고…….”

도진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싱긋 웃으며 강지석을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인데도 어째 눈매는 도진 형답지 않게 날카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지석 씨한테 들었던 것과는 좀 달라 보이네요. 다음에 다시 봐요.”

도진 형은 강지석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리고는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카페를 나가기 전, 슬쩍 날 돌아본 도진 형이 묘한 기색을 띠며 눈가를 휘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파악할 새도 없이, 강지석의 등이 내 시야를 가리며 막아섰다.

“어지간히도 급했나 봐?”

날 등지고 선 강지석이 형을 향해 이죽거렸다. 평소의 강지석에게선 웬만큼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적잖이 놀랐다.

“왜? 내가 우서한테 다 말해버릴까 봐?”

얼음으로 만들어진 송곳이 음성 곳곳에 박혀 있는 것 같다. 강지석의 차디찬 음성은 나를 향한 게 아님에도 너무나 날카롭게 느껴졌다.

‘나한테 뭘 말해?’

날카로운 음성 속에 담긴 내용을 뒤늦게 이해하고서 강지석의 어깨너머로 형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무서운 얼굴의 형은 화를 참고 있다기보다도 초조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더 맞는 표현 같았다.

강지석의 음성은 재차 이어졌다.

“다 말해버리면 아무리 우서라도 분명히 링을 해제하자고 할걸. 그게 무서웠던 거지?”

형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강지석을 압박하는 위협은 그대로였지만, 형의 얼굴은 확실히 위태로워 보였다.

‘뭘 겁내는 거지?’

지금까지의 대화로 봐선 형이 겁내는 게 무엇인지 명백했다.

형이 감추고자 하는 무언가를 내가 알아버리는 것.

그게 무엇일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적어도 마음 편히 들어도 될만한 건 아닌 게 확실했다. 형은 내가 직접 링을 해제하자고 말할 정도로 충격적인 뭔가를 감추고 있나 보다.

당연하게도, 그게 무엇인지 너무도 궁금해졌다. 동시에 가슴 속의 절반을 차지해버린 형의 공간이 불안하게 꿈틀거렸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우서 기만하는 건 못 참아.”

“웃기지 마. 네가 뭔데 감히 멋대로 굴어?”

형의 살벌한 음성이 강지석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기세 좋게 소리를 높였다.

“언제까지고 링을 빌미로 맘껏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형 본심을 알면 우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걸?”

“너……!”

화를 이기지 못한 형이 강지석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강지석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내 눈을 보며 멈칫한 형이 이를 꽉 깨문 채 허공에서 주먹만 꾹 쥐었다. 형은 애써 표정을 누그러뜨린 채, 그 손을 강지석 너머에 있는 내게 잡아달라는 듯 내뻗었다.

“이리 와, 우서야.”

불안 섞인 다정한 목소리가 날 찾았다. 형의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고, 그의 눈가가 어렵사리 휘어진다.

“나가자.”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나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는 것처럼, 형은 내게로 손을 내민 채 애절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 잡아줘야 한다.

저 손을 잡지 않으면 형이 그대로 무너져 주저앉을 것만 같다.

하지만 강지석의 뒤에서 걸어 나온 난 섣불리 그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형이… 날 기만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기만.

그 단어의 뜻이라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날 속였어요? 뭘……?”

어딘가에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쩌적쩌적,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그 뭔가는 형이 차지해버린 내 가슴 속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우서야.”

형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힘없이 웃어 보였다.

“손…, 잡아주지 않을래?”

형의 떨리는 목소리가 기분 나쁜 균열 소리를 집어삼켰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손을 뻗었다. 바라는 대로 내가 잡아줘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허공에 뻗어지던 손이 형을 붙잡으려던 순간, 강지석이 내 팔을 잡아 멈춘다.

“가지 마. 갈 거 없어. 또 연기하는 거야.”

‘연기’라는 두 글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기? 무슨 연기? 형이 내게 연기를 한다고?

기만, 연기.

그 두 가지를 함께 붙이는 것만으로도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해진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형을 바라보니,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제발.

형이 저렇게나 두려운 눈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이다. 링을 해제하자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며칠 전, 그리고 오늘.

나는 그때처럼 형이 내민 손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다시 울려버리고 말 것 같아서.

강지석의 팔을 밀어내고 형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자, 차갑게 식은 손아귀가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꼭 그러쥔다.

그대로 형에게 이끌려 카페를 나서기 직전, 뒤에서 강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오늘 당장 결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어.”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니 강지석의 안쓰러워하면서도 단호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난 네게 충분히 도망칠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링의 해제. 강지석.

그 두 가지야말로 내가 형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어째서?

그렇게나 형이 위험한 건가? 아니면 강지석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나도 확실히 변한 모양이다. 거짓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언제나 착하기만 하던 강지석이 혹시나 다른 의도를 품고 저러는 게 아닐지 의심하게 된다. 아무리 그가 내게 말도 없이 도진 형을 데려다가 몰아세웠다고는 해도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난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과 강지석의 변화, 그리고 지건 형의 초조한 얼굴과 떨리는 손까지, 모두가 다 복잡한 수식의 난제와 같았다.

카페 밖으로 나온 나는 형에게 말없이 끌려가며 좁은 길을 벗어났다. 형은 어찌나 급했던지 차를 대로변에 대충 대두고서 달랑 비상등만 켜고 왔던 모양이다.

형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조수석 문을 열어 날 태웠다. 그 와중에도 직접 안전띠까지 꼼꼼히 채워주는 걸 보며 몇 번이나 말을 걸까 생각했지만 결국 나도 입을 다물었다. 형이 메준 안전띠가 마치 시트와 연결된 절대 풀리지 않는 사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운전석에 올라탄 형은 내게 해주던 것과 달리 안전띠도 매지 않은 채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수많은 차량과 섞여 달리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뭘 물어야 할지는 명백했다.

강지석이 했던 말은 사실인 건지, 사실이라면 어떤 게 기만이고 어떤 게 연기인 건지, 그리고 왜 그랬는지.

하지만 그걸 차마 입에 담아 물을 수 없었던 건, 괴로움을 꾹 참는 듯한 형의 얼굴 때문이었다.

‘답답해.’

사극에서나 나오는 딱딱한 재갈을 입에 물고 있는 기분이었다. 해야 할 말이 확실함에도 꺼낼 수 없는 답답함은 역시나 기분이 나쁘다.

형의 얼굴을 조심스레 힐끔거리던 그때, 갑자기 운전대가 거칠게 돌아갔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운전대를 옆으로 홱 돌려버리는 형의 모습은 초조함이 극에 달해 터져버린 것만 같았다.

차가 완전히 방향을 바꿔 대로변 옆에 있던 골목으로 쑥 들어갔다. 비교될 정도로 차가 적은 골목에 들어가 안으로 빠르게 나아가던 차는 머지않아 한 건물 옆에 거칠게 멈춰 섰다.

순간 숨을 고르던 형이 운전대에 이마를 대고서 눈을 꾹 감았다. 그 모습이 워낙 위태로워 보여, 나도 모르게 어깨를 감싸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언제까지고 링을 빌미로 맘껏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형 본심을 알면 우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걸?”

강지석이 했던 말이 떠올라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형의 어깨에 닿을 뻔한 손끝이 멈칫하다가 천천히 내려간다.

“형.”

이제야 입술이 열리고 목소리가 나온다.

“절 속였어요?”

형의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열린다. 아까와 달리 초조함 대신 체념에 가까운 냉기가 섞여 있어, 다시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 번 흘러나온 목소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 속인 거라면… 뭘 속였는지 물어봐도 돼요?”

점차 긴장하는 나와 달리, 운전대에서 이마를 떼고 날 똑바로 바라보는 형은 몇 달 전 재회했던 그때처럼 차갑고 건조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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