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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74화 (74/99)

74화

왜 이 사람이 여기 있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그러는 사이, 강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는 얼굴을 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여기 앉으세요.”

“고생은요, 뭘.”

강지석은 한도진 형의 등장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히 의자를 권했다. 도진 형도 그와 아는 사이인 건지, 웃는 얼굴로 편히 대답한다.

지금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강지석과 도진 형의 조합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기에 이 자리가 어이없기만 했다.

강지석은 내 반응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처럼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원치 않는 링이 생겨버린 것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형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는 것도 알아. 그래서 내가 널 좀 도와주려고.”

강지석의 말을 들으며 도진 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도진 형은 여전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아는 건지 모르겠지만, 강지석은 내가 지건 형과 링으로 이어진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정보도 거의 없는 링의 해제법이 ‘커넥터’라 불리는 도진 형에게 있다는 것마저 알고 있다. 링조차 없는 강지석이 어떻게 도진 형과 접촉해서 이런 자리에까지 그를 불러낼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게다가 도진 형은 내가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도진 형은 강지석과 함께 있는 날 보고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안부를 물었다. 대체 두 사람은 무슨 사이이며, 어떤 이야기를 나눴던 걸까.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긴장감이 밴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 거리낄 것 없이 물어도 될 상황이었지만, 도진 형이 내 링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멋대로 조심스러워졌다. 등 뒤로 감춘 왼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에 도진 형이 안쓰러운 눈으로 날 다독였다.

“긴장하지 말아요. 우서 씨가 원치 않는 일은 안 할 거예요.”

씁쓸하게 말한 도진 형이 강지석과의 일을 순순히 말해주기 시작했다.

“지석 씨와 알게 된 건 우서 씨 때처럼 인터넷 카페를 통해서예요. 우서 씨가 링의 해제에 관해 묻는 글을 올릴 때쯤부터 지석 씨도 올리기 시작했는데, 사나흘 만에 멈춰버려서 포기한 줄 알았어요.”

“그땐 형이 링의 상대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형도 해제할 생각 없어 보였고.”

강지석의 말까지 듣고 보니 대충 언제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형이 링의 상대가 나라는 걸 알게 된 즈음이었겠지.

새삼 형이 떠올라 눈을 내리깔았다.

형은 그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네가 지석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점차 거리를 뒀던 건데… 이렇게 다시 연결될 줄 몰랐어.”

링의 상대가 나라는 걸 알았을 때, 형은 좋아해 줬을까. 내가 상대라서 다행이라며 해제법 같은 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하는 나도 참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 같은 아이디로 전혀 다른 질문을 올리고 있더라고요.”

도진 형의 눈이 강지석을 향하며 가늘어진다.

“링이 있는 사람과 링을 연결하는 방법이 있나요, 라는 질문이었어요.”

그 말에 나 역시 강지석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흔들림 없는 강지석의 눈동자가 내게 고정된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전엔 분명 링을 해제할 방법을 찾던 사람인데 왜 지금은 링의 연결에 관해 묻고 다니는 건지 궁금했어요. 게다가 링이 있는 사람과 새 링을 연결하고 싶어 하는 게 좀 이상했죠.”

도진 형이 내 등 뒤에 숨어 있는 왼손을 의식하며 작게 웃는다.

“뒤늦게 그 상대가 우서 씨라는 걸 알았네요.”

강지석이 지건 형의 링 때문에 질문 글을 올리고 다녔던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링의 연결까지 알아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언제부터? 왜?

“우서야, 나는… 너와 링을 연결하고 싶어.”

강지석의 그 말은 진짜였던 건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강지석은 분명 내게 충동적인 감정을 가진 것뿐이라고 확신했었다. 지금처럼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가 가진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며,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향할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강지석은 그때와 확연히 달라 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불쑥 성숙해진 듯한 눈동자, 지건 형을 닮은 어른스러운 눈빛이 그의 감정을 대변한다.

강지석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걸까. 나를 향한 감정이 뭔가를 계기로 크게 변화하며 다듬어진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무서웠다.

‘왜 이제 와서…….’

강지석의 변화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와 가슴을 압박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선 속삭인다.

-아직 날 좋아하잖아.

-그 긴 시간 동안 좋아해 준 보상으로 이젠 내가 같은 마음을 가져줄게.

-그러니까 날 선택해.

강지석의 목소리를 흉내 낸 기괴한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머릿속을 헤집는다. 가슴을 압박하는 그의 감정이 버거워, 숨이 막히려 한다.

예전이었다면 그저 좋았겠지.

네가 날 바라보는 그 깊은 눈동자가 좋고, 좋고, 또 좋아서, 링이 가져올 여파를 알고 있음에도 제발 너와 연결해달라 말했겠지.

힘들었던 짝사랑을 드디어 해피 엔딩으로 끝낼 수 있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불가능해.

“난 네 거야.”

“그러니까 원하는 만큼 가져다 쓰고, 필요 없어지면 마음대로 버려도 돼.”

내게 모든 걸 내어주듯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 나와 너무도 똑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서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너무도 안타까운 사람이다.

그 사람의 아픔이 내 것과 같아서.

그 사람이 날 바라보던 눈빛이 내 것과 같아서.

그 사람이 내뱉은 말이 언젠가 내 입에서 나올 말 같아서.

그래서 외면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그 사람의 애정을 받아들였다. 강지석으로만 가득 차 있던 자리를 조금씩 밀어내고 그 빈자리에 형을 넣었다. 차곡차곡 들어차는 형의 감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커졌고, 이젠 그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측정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누구든 단 한 발.

한 발만 움직여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안일했던 거지.’

내가 그토록 원하던 한 발이 내디뎌졌음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 파문 없는 호수처럼 잔잔한 가슴 속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우서 씨, 링에 관해서는 결정했나요?”

내리깔려 있던 눈을 들어 도진 형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눈동자가 나를 다독이듯 다정한 빛을 띠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충분히 수용해줄 것 같은 눈이다.

“지금도 해제하고 싶어요?”

질문을 듣자마자 꾹 맞닿아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저는…….”

대답을 만들지 못하고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뱉는 대답이 굉장히 중요한 뭔가를 좌지우지하게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내 얼굴을 살피던 도진 형이 재차 물었다.

“상대 분과 얘기해봤죠? 뭐라고 하던가요?”

“형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요.”

“그럼 우서 씨의 결정이 중요하겠네요.”

도진 형이 나와 강지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석 씨는 링이 연결되었을 때와 해제했을 때의 여파를 모두 알고 있음에도 링의 연결을 원했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서 씨 마음이죠.”

그 말에 흠칫 놀라 강지석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씁쓸하게 미소 짓는다.

“우서 씨도 지석 씨를 좋아해 왔다는 걸 알아요. 만약 동의한다면 이 자리에서 링을 해제하고 지석 씨와의 새 링을 연결해줄게요.”

도진 형이 어떻게 내 감정을 알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링을 분석하고 그 안에 담긴 정보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서 알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어쩌면 강지석이 이때까지의 날 돌아보며 내 마음을 확신했기에 그와 같은 말을 전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서 씨의 감정, 알려줄래요?”

지금 중요한 건 도진 형이 내 링을 지우고 새 링을 연결해 줄 것까지 생각하고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이다.

내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감정의 형태에 따라 도진 형이 그의 능력을 이 자리에서 곧바로 쓰게 될지도 모른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지석의 흔들림 없는 눈도, 도진 형의 너무나 깊고 깊은 눈도, 모두가 내 감정의 형태를 보고 싶다며 압박한다.

뭉뚱그려둔 감정의 덩어리가 더는 피해갈 수 없도록 그물을 쳐둔 것 같다. 압박하고, 또 압박한다. 그 압박감은 도진 형처럼 내게 질문을 던진다.

-강지석과 링을 연결하고 싶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모르겠어.

-그럼 네 손에 있는 링은 어때? 해제하고 싶어?

아니.

-이대로 링에 묶인 채 상대가 없으면 잠도 못 자는 삶을 살아도 괜찮아?

아니. 하지만…….

‘난 형을 버릴 수 없어.’

맹목적으로 날 바라보는 그 눈을 저버릴 수가 없다. 나를 향해 무한히 쏟아지는 다정함과 그의 온기를 무시할 수가 없다. 내게 모든 걸 맡기는 형을 어떻게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형과의 인연을 잃어버리는 것만은… 싫어.’

등 뒤에 숨겼던 왼손을 더욱 꽉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는 통증이 점차 세게 느껴질수록 내 생각은 더욱 확고해져 갔다.

형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게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좋아한다. 잊고 싶지 않다.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그게 내가 입에 담을 수 있는 감정의 형태였다.

내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어렴풋한 카페 입구의 종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등 뒤에 숨긴 팔이 세게 붙잡혀 당겨진다.

“읏!”

팔에 가해진 통증에 눈가를 꿈틀하며 고개를 드니, 지금 한창 일하고 있어야 할 지건 형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형은 내 왼손 약지를 노려보며 오싹할 정도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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