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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73화 (73/99)

73화

덜컹-!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 때문에 카운터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점원이 우리 쪽을 슬쩍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잘못 들은 거 아닐까?

강지석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단어부터 의심했다. 그가 제대로 된 단어를 쓴 게 맞는지 확인하고자 입을 달싹이니, 나보다도 먼저 강지석이 말을 잇는다.

“갑작스럽다는 거 알아. 아직 내게 대답해주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상황을 재차 되짚는 듯한 말이었다. 그걸 뒷받침하듯 느릿하게 내리깐 속눈썹이 미약하게 흔들린다.

강지석은 벌떡 일어난 내 손을 여전히 붙잡은 채 그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아프지 않게, 하지만 놓치지 않도록 확실하게.

강지석의 손바닥은 평소의 따뜻함을 모두 잊은 것처럼 차가웠다. 그게 과도한 긴장으로 인한 영향이라고 생각하니 차마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심이야.”

진심이든 뭐든, 정말 알고나 있는 걸까. 링이 연결되면 어떻게 될지, 확실히 아는 거냐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한숨과 함께 강지석의 손을 밀어냈다. 그게 도망을 위한 행동이 아님을 인지한 강지석이 어쩔 수 없이 손을 놔주었다.

“진심이라는 말 함부로 쓰지 마.”

차갑게 말하며 흐트러진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푹신한 방석까지 있는 의자였지만 지금만은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바위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고 거슬린다.

의자에 힘없이 앉아서는 강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리깔려 있던 속눈썹과 눈꺼풀이 올라가고 그의 또렷한 눈동자가 날 바라본다.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보아, ‘진심’이라는 단어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알면 뭐해.’

링으로 연결되었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생각이나 해본 걸까.

연결된 사람끼리 진심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링은 언제나 미완성인 한 줄일 뿐이다. 함께 잠들면 극상의 숙면을 맛볼 수 있지만 떨어져 있을 땐 아무리 피곤하고 졸려도 잠들 수 없는 괴로움이 반복된다.

차라리 그뿐이었다면 이토록 화가 나진 않았을 텐데.

‘기억을 잃게 된다잖아.’

링으로 이어졌다가 그 후엔?

너와 내가 각각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면 어떻게 할 건데?

아무 인연도 없었던 것처럼 갈라서는 게 가능할까.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명백한 타인으로 돌아가게 되면, 너와 난 처음인 것처럼 눈을 마주치고 통성명을 나눠야 할 텐데.

너는 가능해도 난 안 돼.

그간 쌓아온 기억과 감정을 어떻게 잃어.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거대한 손아귀에 가슴이 부여 잡힌 것처럼 아프고 답답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짓눌려지면 끔찍한 비명과 함께 그대로 터질 것 같다. 그 손아귀는 강지석의 것처럼 차갑고 단단하겠지.

링이 처음 발현했을 땐 분명 너와 연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강지석이 상대가 아니라면 링 같은 건 절대 불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때와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너와는 절대, 링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구멍을 타고 입 안까지 다다른 말을 힘겹게 삼켜내었다. 진심 어린 말을 누르고 또 누른 후, 침착하게 다른 말부터 꺼냈다.

“링이라는 게 연결하고 싶다고 다 되는 줄 알아?”

내 감정을 줄줄이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뱉은 말은 링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누군가와 운명적으로 연결되고 싶다고 해서 그 사람과 링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 봐도 감정의 끝이 가리키는 사람과 실제로 링이 연결된 운명의 상대는 전혀 별개라는 사례가 한가득하다. 무엇보다 나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과 이어졌던 게 그 증거다.

문제는 강지석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을 거라는 거다. 형과 내 링이 발현한 후, 강지석도 한동안은 직접 나서서 링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곤 했다. 형제의 손가락에 갑자기 발현한 링의 존재는 매사 태평한 강지석조차 눈에 불을 켜게 만들었다.

그러니 강지석이 그런 상식적인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나도 알아.”

내 생각대로 강지석은 묵묵히 대답했다.

역시나 그냥 해본 말이었나 보다.

그 딴에는 내게 고백다운 고백을 위해 그냥 그의 감정이 이 정도이다, 라는 걸 말하고 싶었나 보다. 그때 늘어놓은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고백보다야 낫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레고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 손에 이미 링이 있기 때문인가.

본능적으로 왼손 약지의 링 자리를 힐끗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

“그렇게 싫었어?”

“당연하지. 누군가에게 그렇게나 연결돼서 묶이는 거 너무 싫어. 상대가 없으면 잠도 못 자는데 누가 좋다고 해?”

링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었다. 예전에 강지석도 링의 낭만적인 부분보다는 지건 형의 힘들어 보이던 모습 때문에 꽤나 부정적으로 보던 기억이 난다.

강지석은 거침없이 말하는 날 빤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지금도 싫겠네.”

“말했잖아, 싫다고.”

왜 자꾸 링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강지석은 링의 무게감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할 텐데.

이런 대화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강지석의 검지가 내 왼손을 툭툭 건드린다. 단순히 내 시선을 끌려는 행동이라면 굳이 내려다볼 필요도 없었지만, 그가 건드린 곳이 어느 위치인지 알고 있기에 흠칫하며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강지석의 검지가 가리키는 자리는 내 왼손 약지, 그것도 링이 있는 자리였다. 타인에게 보일 리 없음에도 강지석은 마치 그 자리에 붉은 링이 있는 걸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날 바라보았다.

“링, 싫은 거 맞지?”

강지석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의식중에 왼손을 홱 빼서 테이블 아래로 감추어버렸다.

들켜서는 안 될 걸 낱낱이 들킨 것처럼 심장이 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놀란 정도에 불과했던 박동이 이제는 막을 수 없이 커져 버려, 술이라도 거나하게 마신 것처럼 머릿속을 쿵쿵 울려댄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덮어 꾹 눌렀다. 강지석이 건드린 링 자리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내 손이 빠져나간 자리에 머물고 있던 강지석의 검지가 툭툭, 이번엔 테이블을 균일하게 두드렸다. 마치 내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와 펄떡이는 소리 같다.

“우서야.”

뭔가를 곱씹고 또 곱씹는 듯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강지석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우선 네 링부터 없애자.”

“뭐……?”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못 들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강지석의 말은 너무도 또렷하게 다가와 귓속을 파고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확신시켜주듯, 강지석이 다정한 미소를 걸며 재차 말한다.

“링이 그렇게 싫다면 없애는 게 맞잖아.”

“잠…깐, 잠깐만. 너 지금… 대체…….”

혼란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가 그 손이 왼손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움찔하며 등 뒤에 숨겼다.

강지석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깃든다.

“형과 원해서 연결된 것도 아니잖아. 없앨 방법을 찾았으니까 우선 링부터 없앤 후에…….”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강지석이 ‘형’을 입에 담았을 때부터 머릿속에서 그의 말이 윙윙거려 혼란스러웠다.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강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와 형이 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어째서……. 어떻게…….’

평생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좀 더 뒤에, 내가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의 한참 뒷일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이렇게 금방 알게 될 줄이야.

외면하고 있던 죄책감이 밀려와 어깨를 짓눌렀다. 눈이 내리깔리고 그 안에 담긴 내 눈동자는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형과의 링에 대해 밝히지 못한 걸 강지석에게 그럴듯하게 변명해야 한다. 형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도 말해야 한다. 강지석과 거리가 생길까 봐 전적으로 내가 숨기자 했던 거니까, 혹시라도 형에게 피해가 갈만한 부분이 있다면 내가 변호해야 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빨리 변명을 생각해둘 걸 그랬다. 입술은 뭐라도 말하기 위해 달싹이긴 하지만 말이 준비되어 있질 않으니 흘러나오는 건 그저 답답한 숨뿐이었다.

“우서야.”

어떻게 하지?

“우서야.”

답답해 죽을 것 같다. 멀쩡하던 머리가 돌덩이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도통 제대로 굴러가질 않는다.

“신우서.”

성까지 붙여서 이름을 불리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강지석이 계속 날 부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강지석의 진지한 얼굴을 마주하니, 죄책감과 불안함으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이 그대로 멈춘 것 같다.

“더 이상 형에게 휘둘릴 필요 없어.”

딸랑-

카페 현관 쪽에서 맑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카페 점원의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가 들리고, 곧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오랜만이네요, 우서 씨.”

가까이 온 음성을 듣자마자 목 뒤가 뻣뻣해졌다. 그래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테이블 옆에 서서 날 내려다보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기억에 남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이전에 봤을 때보다 한층 가벼워진 차림새로 싱긋 웃어준다. 그의 왼손 약지를 뒤덮듯 얽혀있는 수많은 링은 여전한 듯했다.

“연락 기다렸는데, 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 봐요?”

남자의 말에 난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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