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강지석이 방에서 나온 건 형이 출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땐 오늘따라 햇빛이 좋아, 거실 소파에 앉아 형과 메시지를 나누고 있었다.
[퇴근하고 싶다.]
[방금 출근하셨잖아요.]
[원래 출근하면 바로 퇴근하고 싶은 법이야.]
[회사 대표님이 그런 말씀 하셔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거 뭐 있어. 대표도 사람이고 직장인인데 다 똑같은 마음이지, 뭐.]
[그래도 의욕적으로 일하셔야 직원분들이 본을 받죠.]
[아저씨 같은 말도 잘하네.]
마지막 메시지를 보자마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가 바로 ‘꼰대’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닐까.
거기다가 한참 형에다가 한 회사의 대표에게 보낸 메시지치고는 건방져도 너무 건방졌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주제넘었죠?]
[괜찮아.]
휴대폰 액정 너머로 분명 보이지 않아야 할 형의 눈웃음치는 눈꼬리가 비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참견하고 싶은 거, 잔소리하고 싶은 거, 말하고 싶은 거, 빼놓지 말고 다 해.]
[형한테 어떻게 그래요.]
[해줘. 기분 좋아.]
기분이 좋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답장도 쓰지 못하고 멈춰 있는 사이, 형의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넌 그래도 돼.]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훅 치고 들어오는 공격은 누구든 버티기가 힘들다. 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민망해서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고 목구멍에서는 혼란스러운 작은 비명이 메아리친다. 그 안으로 더 들어가 보면 박자를 무시한 채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맞닥뜨릴 수 있을 것이다.
‘형은 꼭 생각지도 못할 때 사람 혼을 쏙 빼놓는다니까.’
메시지라서 다행이다. 눈앞에 형이 있었다면 표정을 채 숨기지 못한 내 모습을 보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예, 예. 알았으니까 얼른 일하세요.]
태연한 척 메시지를 보내고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형의 답장이 오기도 전에 메시지 한 줄을 더 보냈다.
[그래야 일찍 퇴근하죠.]
메시지를 보내놓은 후에도 머릿속에는 갖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평범한 메시지로 보일까?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려나.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어떻게 하지?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런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때, 형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그것은 글로 된 메시지가 아니라 웬 사진 한 장이었다.
형이 보낸 사진은 셀카답게 그 혼자만이 담겨 있었다. 회사 대표실 의자에 앉아서 찍은 것처럼 보였는데, 멋스럽게 올린 앞머리와 유혹하듯 올라간 눈꼬리가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았다. 뒤이어 왼손 약지, 그것도 붉은 링이 자리 잡은 부위에 호선을 그린 입술을 살짝 대고 있는 게 보였다.
“아…, 정말…….”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 해서 참기가 힘들었다. 볼이 화끈거리는 건 햇빛 탓이라고 생각하련다.
연인들이나 주고받을 법한 사진을 받아버려서 그런지 심장이 콩닥거리고 열이 났다. 어째 형에게 고백받은 이후로는 얼굴에서 도통 열이 떠나지 않는 것 같다.
[일찍 들어갈 테니까 예뻐해 줘.]
‘형…, 7살 연하한테 예뻐해 달라뇨….’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형에게 어울리는 대사 같이 느껴지는지.
남이 했으면 오글거리고 기이해 보였을 대사가 자꾸만 머릿속을 건드려댄다. 뭘 어떻게 예뻐해 줘야 하는 건지 고민 중인 나도 참 웃기다.
달칵-
눈치 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기 바쁜 와중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태껏 방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를 강지석이 걸어 나온다.
“헬스장 가려고?”
물으면서도 그의 복장이 당장 운동 갈 차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외출복이 분명한 옷을 차려입은 그를 훑어보는 동안 점차 가까워져 온 강지석이 갑자기 헤실거리며 웃는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걸 전부 무너뜨리듯 천진하게 웃으니 나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좀 이중인격 같다? 너도 내가 모르는 아침 저기압이라도 있는 거야?”
“이중인격이라니. 난 언제나 똑같은걸.”
평소와 다름없는, 아니, 내게 고백하기 전쯤으로 돌아간 듯한 해맑은 얼굴이 불쑥 다가온다.
“우서야, 우리 나가자.”
“나가긴 어딜?”
“데이트!”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강지석의 가슴팍을 퍽 쳐버렸다. 형에게 들었던 것과 분명 같은 단어인데 이 자식이 내뱉으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황스럽다.
“미쳤냐? 그냥 놀러 가자고 해, 차라리.”
놀라서 꽤 세게 쳤던 것 같은데 강지석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기만 한다.
“둘이서 놀러 가면 데이트 아니야?”
“그렇게 치면 고딩 때부터 계속 데이트해온 게 되잖아. 우리가 둘이서 돌아다닌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러네.”
이제야 좀 납득한 줄 알았더니, 강지석이 황당한 소리를 한다.
“그때부터 쭉 데이트였던 건데, 내가 눈치 없는 바보였네.”
오늘 강지석은 잠이 덜 깬 게 확실하다. 그런 것치고는 눈빛이 너무 진지해 보였지만.
강지석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그의 손이 내 팔을 잡아 일으킨다.
“가자.”
“그러니까 어딜 가자는 건데?”
“까먹었어?”
강지석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서 휴대폰을 들어 액정 화면을 보여준다. 어째 낯익은 영화 포스터가 보인다. 화려한 SF 느낌의 블록버스터 영화로 보였는데, 그 하단에 적힌 필기체 제목과 개봉일을 확인하고서 그제야 알아챘다.
“이거 개봉 오늘이었어?”
“완전히 잊고 있었구나…. 마침 종강 다음 날이라 같이 가면 되겠다 싶어서 오늘만 기다렸는데…….”
그러고 보니 이 영화가 나오면 개봉 첫날부터 가서 보자고 강지석과 약속했던 적이 있다. 내놓는 족족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라며 칭송이 자자한 블록버스터 전문 영화감독의 신작으로, 국내 톱급 배우와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배우를 함께 기용하며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됐던 영화이기도 했다.
요즘 아무리 정신이 없었기로서니 이걸 잊고 있었다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는 이미 준비하고 있던 강지석보다도 먼저 현관에 섰다.
“예매는?”
“30분 뒤 거로 이미 했어. 보고 나와서 점심 먹으면 시간 딱 맞아.”
“이런 데서는 묘하게 센스 있어, 하여튼.”
그새 들떠서 기분 좋게 웃어 보이자, 강지석이 나 대신 문을 열어준다.
“이상하게 네 일에 대해선 센스가 있더라고, 내가.”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즐겁게 영화 보고 밥이나 먹은 후 돌아오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 * *
영화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퀄리티와 스토리도 그랬지만 특히나 국내 배우들의 굉장한 연기력은 몰입감을 한층 높여주어, 유명 감독이 왜 굳이 그들을 기용했는지 알만했다.
만족스러운 관람에 들떠, 식사를 하는 중에도 한창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초에 고등학생 때 강지석과 친해진 계기가 영화였다. 강지석과는 도플갱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화 취향이 딱 맞는 데다가 뭔가를 보고 난 이후의 감상도 거의 같아서, 그와 대화하면 언제나 설렐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게 이어지고 또 이어지면서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고, 잘 맞는 사람끼리의 설렘은 어느덧 나 혼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땐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강지석을 좋아하게 되고, 긴 시간 동안 짝사랑으로 속앓이를 하고, 이젠 그 짝사랑 상대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 예전의 나였다면 입을 닫을 필요가 뭐 있냐며 그냥 기뻐하며 받아주면 될 일이라 생각했겠지. 물론 정말 날 그런 쪽으로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야 했겠지만, 강지석이 서툰 키스를 했던 시점에 대부분의 의심은 다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고민할 것도 없이 드디어 이뤄진 사랑에 눈가를 훔치며 활짝 미소 지었겠지.
하지만 굳건하던 짝사랑이 조금씩 흔들리던 시점에 맞닥뜨린 강지석의 마음은 의심을 넘어 확신이 되었다.
친구를 빼앗길 것 같다는 조급함에서 튀어나온 가벼운 마음.
강지석의 고백은 그의 마음과 내 것의 무게가 결코 같지 않다는 걸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테이블에 올린 두 손을 맞잡아 꾸물거렸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면서 버릇처럼 꼼지락대던 손 위에 강지석의 손이 얹어진다.
눈을 들어 강지석을 바라보았다.
가볍고 가벼운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걸까.
눈앞에 있는 강지석은 내가 알던 가볍고 순진하던 눈빛 대신, 눈 깜짝할 새에 어른스러워진 빛을 보이고 있었다. 형이 생각날 정도로 진지한 눈이다.
“우서야, 나는…….”
강지석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낯설어서 고개를 돌리고 싶다. 아직 커피가 남았지만 리필을 핑계로 자리를 일어나고 싶다. 사람 많은 프랜차이즈 카페였다면 소란스러움에 묻혀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면 좋을 텐데.
몇 개 되지도 않는 테이블 중 유일하게 자리를 채운 우리 주변만 공기가 바뀐 것 같다. 그 공기를 타고 강지석의 진지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또렷이 꽂힌다.
“너와 링을 연결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