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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70화 (70/99)

70화

‘그만 홀려요, 형.’

강지석도 가끔 애달픈 척 설득을 해올 때면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그때도 덩치 큰 여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지건 형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진지하게 형의 마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는 사이, 입술 사이로 들어와 있던 손가락이 스륵 빠져나간다.

“너무한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난 네가 어디든 상처 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상냥한 형은 내 몸 어디에 작은 생채기라도 생기면 몇 배나 아픈 표정을 지어줄 것 같다. 지금처럼.

그런 형에게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수가 없어, 눈을 내리깐 채 입 안에서 말을 골랐다.

“엄마가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셔서요.”

“집으로?”

형이 깜짝 놀라 눈을 들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다. 형이 얼마나 당황한 눈을 하고 있을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지석이가 잘 둘러대 줘서 엄마도 더는 강요하지 않을 것 같고요.”

두 손을 맞잡고서 형이 정성껏 붙여준 밴드의 표면을 엄지 끝으로 문질렀다. 밴드 특유의 미끈함과 통풍을 위한 작은 구멍들의 거슬림이 손끝을 타고 고스란히 느껴진다.

“형도 자야 할 텐데, 아무리 그래도 서로 떨어져 있을 순 없잖아요.”

서로 접촉해 있지 않으면 잠들 수 없으니 당연한 말임에도 가슴 속 어딘가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 든다. 마치 이 반질거리는 밴드의 작은 통풍구가 거슬리는 것처럼.

문지르고 긁어댄다 해도 사라질 리 없는 거슬림에 필요 이상의 신경이 쏠릴 때쯤, 그런 내 두 손 위에 형의 포근한 손이 덮인다.

고개를 든 내 눈앞에 닿은 것은 형의 미묘한 얼굴. 어딘가가 아픈 것도 같고 침울한 것도 같은, 그러나 절대 감정을 낱낱이 드러내 주진 않을 것 같은 어른다운 얼굴이었다.

“잠 때문에 걱정한 거라고 생각해?”

“그거야…….”

입을 열긴 했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반으로 갈라져서는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한쪽은 형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한쪽은 섣불리 그러지 못한 채 다른 생각을 끌어내어 눈앞에 진열하고 있는 느낌이다.

어떤 게 맞는지 스스로 판단하는 것조차 어려워하고 있는 내 두 손에서 형의 손바닥이 떨어져 간다. 그 손은 자연스레 올라와,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어려운 감정이 담긴 형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고 눈매 역시 빠져들 것처럼 예쁘게 휘어진다.

“가끔은 네가 내 생각을 금방금방 읽어줬으면 좋겠어.”

형의 의미심장한 말은 감미로운 온기를 담아 형의 손을 타고 내게 전해져 온다. 아까까지만 해도 반으로 갈라져 있던 머릿속이 하나로 합쳐져, 다시금 깊은 생각을 거듭한다.

링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잠이 이유가 되는 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그건 내게만 해당하는 게 아닐까. 형에게 있어 링은 그저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릴 만한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자의식 과잉에 과대망상이라며 스스로를 탓했을 생각이었지만, 이렇듯 마주한 형의 눈동자를 보고 있다 보면 그것 외엔 생각할 수가 없다.

눈동자는 한없이 직진하듯 부딪혀 오는데 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언제나 내가 놀라지 않도록 은근하게 다가온다. 정신을 차려보면 눈빛이든 말이든, 둘 다 내게 뭘 원하는 건지 확연히 알게 해준다.

그러한 깨달음과 동시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현상은 형을 만난 이후로 셀 수 없이 많이 겪어본 것 중 하나였다.

새삼 생각하게 된다.

‘링이 없었다면… 다른 말을 했을까?’

형도 자야 할 텐데 떨어져 있을 수는 없지 않냐는 말 대신, 약간의 감정이 담긴 다른 말을 했을 것 같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부끄러워지는, 그런 말을.

* * *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버렸다.

모처럼의 방학인데 알람까지 꼬박꼬박 맞춰가며 일찍 눈을 뜰 필요를 느끼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알람을 맞추지 않았음에도 고작해야 10여 분 정도 더 잠을 청한 게 다였다.

원룸에서 혼자 살 때도 나름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오후 강의더라도 아침 일찍 식사를 차려 먹는 습관을 들여뒀었다. 게다가 이쪽 집에 오고 난 후로는 출근하는 형을 위해서 꼭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아예 아침기상이 버릇된 모양이다.

누운 채로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평소와 다름없이 허리에 뭔가가 덜컥 걸리는 느낌이 들어,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열린 것은 청력이었다. 덩치에 비해 작은 숨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머릿속 깊은 곳을 간질이는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잠결의 흐릿한 시야가 단번에 밝아진다. 아침 햇살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밝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한 게 분명했다. 햇살이 닿아있는 잠든 얼굴과 하얀 티셔츠가 시야를 보기 좋은 백색으로 꽉 채워버렸다.

반소매 아래로 뻗어 나온 단단한 팔뚝이 내 허리를 휘감아 안고 있는 걸 보다 보니 이대로 다시 눕고 싶어진다. 이불보다 더한 포근함이 등에 내내 닿아있던 게 그리워져, 조금 더 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형의 팔 안에서 조심스레 몸을 돌리고는 깊이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숙여 조금 더 시선을 가까이한다.

‘그러고 보니 형보다 먼저 깬 건 처음이지 않나?’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알람을 들은 형과 같이 깨곤 했다. 술을 마신 다음 날은 알람도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드는 바람에 늦잠을 자다가 형이 깨워주는 게 보통이었고.

‘피곤하신가?’

어제 있었던 일을 곱씹어 보았다. 회사 일로도 바쁘고 힘들었을 텐데 자신을 데리고 이곳저곳 데려가며 신경 써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어젯밤에는 강지석이 빨리 잠들지 않아서 문제였다. 평소에는 자정이 되기도 전에 이미 숙면 중일 정도로 일찍 잠들곤 했는데, 어제는 녀석의 방 문틈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 도통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이상하긴 했지.’

형과의 험악한 분위기도 그랬지만, 날 대하던 게 특히나 이상했다. 마치 또 한 명의 지건 형을 앞에 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어제의 강지석을 떠올리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형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럴 땐 오히려 형이 강지석 같기도 하고…….’

하여튼 둘 다 왜 이렇게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겨서는.

그때, 형의 눈꼬리가 살짝 꿈틀했다.

“음….”

간지러운 바람이 눈가를 간질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씩 움직이던 미간이 한층 선명한 굴곡을 만들고,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진다. 내리깔려 있던 검은 속눈썹이 반쯤 올라가 눈동자가 드러났을 즈음엔, 이토록 빤히 바라보는 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눈을 돌리지 못했다.

역시 형은 여우인 게 틀림없다. 본인만 모를 뿐.

무의식중에 날 톡톡히 홀려버린 형의 눈동자가 금세 완전히 드러나 내 얼굴을 담아냈다. 잠에서 이제 막 깬 탓인지 눈동자가 꽤 몽롱해 보였으나, 그 안에 잡아둔 내 얼굴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안녕.”

탁한 저음이 내 정신을 툭 건드리듯 일깨웠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빼려 하니, 내 허리를 잡은 팔에 강한 힘이 들어가고 다른 손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듯 받쳐 잡는다.

당황한 얼굴로 눈을 굴리며 나 역시 어색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어…, 그…, 좋은 아침…이에요.”

내가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에 혹시라도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미 기분 나쁘신 것 같은데.’

평소와 달리 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날 올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눈을 뜨면서 평온하게 펴진 눈가를 재차 찌푸리지도 않았고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주거나 묘한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저 이제 막 잠에서 깬 아이처럼 눈만 느릿하게 깜빡이며 날 바라보고 있는 게 전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 채 내 뒷머리를 받치고 있던 형의 손을 내리며 웃었다.

“오늘은 웬일로 제가 먼저 일어났네요. 신기하다.”

어색함을 최대한 억누르며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뒤이어 허리를 감싼 팔을 풀어내려 하니, 갑자기 강한 힘으로 당겨져 눕혀진다. 눈 깜짝할 새에 형을 마주 안듯 누워버린 상황에 몸이 뻣뻣이 굳다가 곧바로 사르르 녹듯 편안해졌다.

링의 상대를 끌어안고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이 극도의 황홀감을 동반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조차 다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대로 잠들면 정말 꿀잠이라는 게 뭔지 톡톡히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매일 밤 느끼는 거긴 하지만.

“…더 자.”

“하지만 형, 슬슬 일어나지 않으면 강지석도 깰 거라서…….”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몸이 홱 돌아가 천장에 시선이 닿았다. 곧바로 몸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고, 형의 차가운 얼굴이 시야를 채운다.

“아침부터 딴 남자 이름 듣는 거,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딴 남자라니, 당신 동생이잖아!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이 집에 들어오는 게 결정되었을 즈음, 언젠가 강지석이 당부했던 말이 있었다.

“형이 아침에 좀 많이 저기압이야. 만약 제때 못 일어나면 휴대폰에 알람 설정해서 문틈으로 집어 넣어버려.”

“그냥 들어가서 깨우면 안 돼?”

“안 돼. 그러다 잡아 먹혀.”

그 말을 하며 강지석이 치를 떨었더랬다. 그가 말한 ‘잡아 먹힌다’의 뜻은 죽이려 든다는 것과 비슷했던 것 같은데, 형과 함께 잠 든지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전혀 체감하지 못했던 거라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태껏 형이 저기압이었던 적은 없었는걸.’

알람을 듣고 같이 눈을 떴을 때도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설마 형은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깨어 있었던 걸까. 그런 거라면 깬 상태로 알람이 울릴 때까지 쭉 날 끌어안고 있었다는 게 된다.

자각하자마자 엄청난 민망함이 몰려와, 두 손으로 얼굴을 확 가려버렸다. 지금 내 얼굴, 굉장히 엉망일 것 같은데.

“가리지 마.”

여전히 탁한 저음이 명령하듯 말했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고 있자, 내 얼굴을 덮은 손등에 아릿한 통증이 전해졌다. 흠칫하며 손을 떼어 확인해보는데,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잇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다.

“가리지 말라고.”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형을 황당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강지석의 말은 아무래도 진짜인가 보다. 어제까지만 해도 여우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덥석 물려서 잡아먹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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