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68화 (68/99)

68화

강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얼굴에 열이 몰렸다. 피가 난 내 손끝을 핥는 것으로도 모자라 ‘동거’라는 말을 쓰다니.

강지석은 예전에 내가 책을 넘기다가 종이에 베여 피가 났을 때도 지금처럼 스스럼없이 상처 부위를 핥아주곤 했다. 그가 내뱉은 ‘동거’라는 단어도 그의 머릿속에선 그저 ‘같이 산다’라는 뜻이 다일 뿐, 딱히 의미가 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유혹하는 것 같지.

당황해서 강지석에게 붙잡힌 손을 빼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는데, 강지석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그럼요. 우서가 월세도 주는걸요. 저는 괜찮다고 했는데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우서가 좀 착한가요.”

싱글거리며 웃던 강지석이 피가 난 내 손끝을 입 안에 살짝 넣고 쪽 빨아들였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쓰라린데, 표면을 혀끝으로 슥슥 닦듯이 핥고 있으니 이젠 쓰라림을 넘어 찌릿한 간지러움까지 찾아왔다.

“강지석, 손 좀 잠깐…….”

“원룸 보증금이요?”

강지석의 반문에 그의 귓가에 닿아있는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아니, 무슨 보증금 얘기를 강지석한테까지 해?

“지금 우서한테 없는데요. 다음 학기 때 지낼 월세까지 받아버려서요.”

강지석의 태연한 거짓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아는 강지석이 아닌 느낌이랄까.

여태껏 거짓말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써본 놈이고, 그마저도 어찌나 어색한지 듣자마자 금세 들통이 나곤 했다. 강지석 본인도 거짓말에 죄책감을 가질 정도로 순진한 녀석이라서 정말 급할 때가 아니면 절대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강지석이 너무도 당당히, 그것도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형이 이쪽 관련해서는 알아주는 회사 대표잖아요. 예전에 과외수업을 해주던 인연도 있으니 이참에 우서도 형 가까이에서 잘 배워두면 취업 걱정은 없지 않겠어요? 저도 그래서 더 같이 살자고 한 거죠.”

네가 언제 그랬어, 이 사기꾼아!

그냥 편한 친구기도 하고 집에 방이 하나 남으니까 같이 살자고 했던 거였잖아. 심지어 그 얘기의 발단은 지건 형이었고.

‘잠깐만, 지금 형까지 판 거야? 강지석 맞아?’

설마 지건 형이 장난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무리 지건 형이어도 강지석의 목소리나 눈꼬리 형태까지 따라 할 수는 없기에, 눈앞의 강지석은 본인이 확실했다. 헤실거리는 것도 그렇고.

“형이 우서 엄청 아껴요. 이대로만 졸업하면 바로 낚아채서 회사에 앉혀둘걸요.”

강지석은 자기가 더 들뜬 목소리를 냈다.

거짓말이고 뭐고 일단 확실한 건, 강지석이 우리 엄마를 구슬리는 데에 도가 튼 것 같다는 거다.

휴대폰 너머에서 듣고 있을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히 보이는 것 같다.

아들이 월세를 미리 내서라도 쭉 얹혀살고자 하는 집에는 꽤 잘 나가는 기업인이 있다. 그 사람은 예전에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서라도 꼭 과외를 받고 싶다고 고집했던 명문대 수석 졸업생이고, 지금은 회사 규모 대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회사 대표이다. 그런 사람이 제 아들을 아낀다. 졸업하면 취업 준비를 할 것도 없이 바로 데려가고 싶어 할 정도로.

엄마가 나보다도 친구인 강지석에게 더 관심이 많았던 데에는 한창 뉴스에서 떠들어대기도 했던 지건 형과 그의 회사 탓이 클 것이다.

“그럼요, 진짜죠. 걱정하지 마세요.”

둔해 빠진 줄 알았던 강지석은 그간 엄마와 자주 통화를 하며 그 모든 것을 짐작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해결이 되는지까지 다 파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에게 쭉 휘둘리고 압박당해왔던 나는 그걸 다 알면서도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는데.

“그럼 우서 다시 바꿔드릴게요, 어머니.”

상냥하고 밝게 응대한 강지석이 그제야 내 손을 놓아주며 휴대폰을 내어준다. 어느새 피가 멈춰버린 손으로 휴대폰을 받아들고는 머뭇거리다가 귀에 대었다.

“…엄마.”

-너는 그런 얘기를 어쩜 지석이한테 듣게 하니? 엄마 창피하다, 얘.

그 짧은 사이에 엄마의 기분이 많이 가라앉았다. 엄마의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억울하기도 했다. 강지석의 거짓말은 내가 미처 생각도 못 해본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사실이라고 한들 형이 날 취업시켜 줄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할까. 그랬다가 엄마가 생각한 대로 안 되면 찾아와서 난리를 피울 게 뻔한데.

-돈은 이미 다 냈다고 하니까 됐고, 그 형 심기 거스르지 말고 잘해. 방학 때 좀 졸라서 실무도 미리 배우고 그러라고.

조금 신이 난 엄마는 이제 내려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일손이 부족하다고 당장 오라고 할 땐 언제고, 차라리 그 시간에 형에게 빌붙어서 일을 배우라는 말이나 하고 있다.

-성적은 문제없지?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야 그 형네 회사 가서도 엄마 면이 서지.

엄마 면이 왜 서요? 형은 엄마랑 제대로 만난 적도 없고 그 회사가 엄마랑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울컥한다. 평소에는 그러려니 하고 흘려 들을만한 말인데, 자꾸 형을 이용하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엄마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사람이고 여태껏 능력 좀 있는 주변 사람들이라면 쭉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왜 새삼스레 실망을 하고 화가 나는 건지.

엄마가 떠드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 얌전히 있던 강지석이 다가와 날 달래듯 등을 쓸었다. 평소에도 강지석이 자주 하던 짓이라서 그런지, 당황하기보다는 그 손길을 느끼며 속을 달랬다.

-나중에 그 형이랑 자리나 좀 만들어 봐. 너 얹혀사는 거 잘 부탁한다고 말도 할 겸 안면 좀 터놓게.

“…….”

-대답 좀 해. 엄마가 우습니?

“아뇨…. 일단 말은 해 볼게요.”

한숨을 삼키며 결국 대답하자 그제야 엄마가 다시 누그러진다.

전화를 끊고 나자 막혔던 한숨이 밀려온다. 강지석은 그때까지도 내 등을 쓸어주며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 그냥 바꿔드리지 말고 내가 끊을 걸 그랬나?”

“아니야. 나도 엄마 반응을 확실히 봐야 했거든.”

그래야 엄마가 강지석 말에 진짜 넘어갔는지 아닌지도 알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가 있으니까.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나를 끌고 침대에 앉힌 강지석이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를 덮어주니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진다.

“너 어머니랑 통화하고 나면 열나는 거 알아?”

열이 안 나면 정상이 아니지. 통화할 때마다 엄마가 하도 사람 철렁할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시니 머리에 열이 몰리고 지끈지끈 아주 난리가 난다.

기분 좋게 시원한 강지석의 손이 이번엔 볼을 감쌌다.

“어머니가 너 좀 가만히 뒀으면 좋겠는데.”

평소에는 어머니가 그러실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조심스러워하기 바빴던 녀석이 웬일로 엄마를 탓했다.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 애를…….”

강지석의 다른 손도 내 볼을 감싸 매만진다. 픽 웃다가 지금 내가 누구 손에 매만져지고 있는지가 떠올라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괜찮아. 이번엔 오랜만에 전화 온 거기도 하고.”

강지석의 눈을 피하며 그의 손을 떼어내는데, 운동 좀 한다고 힘이 어찌나 좋은지 꿈쩍도 안 한다.

“그래도 고맙다. 엄마한테 끌려갈 뻔한 걸 네가 살렸어.”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가슴이 떨려 목이 탔다.

고백을 받았던 탓일까. 예전이었다면 그저 이런 행동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고 장난이나 쳤을 텐데,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설렘뿐만 아니라 강지석의 의중을 궁금해하는 긴장감이 자꾸만 압박해온다.

강지석이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바라보고만 있으니 이젠 내가 답답했다.

“할 말 있어? 왜 자꾸 봐….”

엄마와의 통화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이놈 때문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못참고 입을 떼자 강지석도 그제야 입술을 달싹였다.

똑똑-

예기치 못한 노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문 앞에는 옷을 갈아입고 온 형이 서 있었다.

“형, 이건…….”

강지석의 손을 떼어내려 힘을 주면서도 뭔가 변명을 할 것처럼 입이 열렸다. 내가 왜 변명을 해야만 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하지만 형은 내가 뭔가를 변명하기도 전에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러더니 웃는 얼굴로 강지석의 팔을 붙잡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내 손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강지석이 형의 앞에 마주 서고, 두 사람 주변의 공기는 나까지 푹푹 찔러댈 정도로 따가워졌다.

“지석아.”

강지석이 단번에 눈을 치켜뜨며 형을 반항적으로 노려보더니,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알던 강지석이 아닌 것처럼 그는 형에게 뭔가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그로 인해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져서 내가 끼어들 타이밍조차 놓쳐버렸다.

“내가 어릴 때부터 누누이 가르치지 않았어?”

분명 웃는 얼굴인데, 형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워서 저절로 겁이 났다.

“형 거엔 손대는 거 아니라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