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가득해졌다.
엄마가 왜 전화했지?
뭐 잘못 했나?
혹시 말없이 원룸 나온 걸 아신 걸까?
아니면 시험이 어땠는가 확인하시려고?
하지만 시험이나 방학이 언제인지도 모르시는 분인데…….
머릿속이 터져 나갈 것처럼 생각이 쌓여 두통이 일었다. 휴대폰에 ‘엄마’라는 두 글자가 뜰 때면 언제나 겪는 현상이었음에도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채 느릿하게 통화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
“네, 엄…….”
-왜 이렇게 늦게 받니? 엄마가 딴짓하지 말고 재깍재깍 전화 받으라고 했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날카롭게 잘라낸 엄마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한 번 연락했을 때 빨리 받지 않으면 신호음 한 번에 몇 배의 화가 쌓이는 사람이다. 너무 오랜만에 온 연락이라서 주춤한 게 화근이었다.
순간 변명거리를 생각하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엄마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대답 안 해?
엄마의 목소리가 마치 내 목에 겨눠진 날카로운 칼 같아서 싫어도 입을 열게 됐다.
“죄송해요, 앞으로 주의할게요.”
-매번 죄송하다고 할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일을 만들지 좀 마.
엄마의 날카로운 잔소리는 언제나 힘들다. 이제 막 전화를 받은 건데도 심신이 지쳐 늘어지는 것 같다. 머리의 지끈거림 또한 더 심해져 갔다.
-방학은 언제부터니?
“내일부터요. 오늘 종강했어요.”
사실은 한참 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마 엄마라면 내 말을 확인하기 위해 강지석한테 가장 먼저 연락해볼 것이다. 같은 대학인 걸 알고 있으니 그 녀석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언제부터 방학인지 캐물을 테고 강지석은 또 헤실거리며 사실대로 대답해 드리겠지. 그렇다고 강지석에게 거짓말을 시킬 수도 없어서 결국은 순순히 대답해버렸다.
‘잘됐네’라고 말한 엄마가 조금 나아진 목소리로 말한다.
-원룸 방 빼고 엄마 집으로 들어와. 이번에 가게를 좀 확장하게 됐는데 일손이 부족해.
엄마가 운영하는 가게는 TV나 노트북, 냉장고 등, 각종 가전제품을 종합적으로 판매하는 매장이었다. 사업 수완이 좋으신 편이라 매장은 지금도 잘 운영되고 있었고, 가끔 넉살 좋은 강지석이 엄마에게 나를 대신해 안부 전화를 넣을 때면 가게가 성황이라는 소식을 물어다 주곤 했다. 그러니 가게를 확장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방을 빼라는 얘기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학 때 도와드리는 거면 굳이 방을 빼지 않아도…….”
-방학 때만 도와줘선 될 게 아니니까 그렇지. 아예 싹 정리하고 와. 어차피 물건도 없을 텐데 쓰레기 만들지 말고 다 버리고 오든지.
엄마의 말에 목구멍까지 뭔가가 차오르는 느낌이 났다. 날 전혀 배려하지 않는 말에는 이골이 났을 텐데도 이번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 저 아직 다음 학기가…….”
-휴학하면 되잖아. 2년만 휴학해.
어떻게 저리 쉽게 말씀하시지.
가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일찍이 아빠와 이혼한 후, 엄마는 매번 엄마 상황을 보라며 당연하게 뭔가를 요구하셨다. 엄마가 운영하는 가게는 원래 전자기기 쪽으로 도가 튼 아빠가 운영하던 곳이었으며, 일종의 이혼 위자료 명목으로 명의가 바뀐 것이었다. 사실 그것 자체는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고, 엄마의 상황도 아빠가 옆에 없다는 것만 빼면 그전보다 나아지면 나아졌지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꼭 내게 뭘 요구할 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어 날을 세운다.
-설마 엄마 일 도와주기 싫어서 그러니?
“하아…. 엄마,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엄마가 힘들게 가게 운영하는데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녀석이 도움도 못 주니? 어차피 컴퓨터과 다니고 있으니까 기계도 잘 알겠다, 엄마 좀 도와서 물건 팔면 뭐 어때서!
억울하다. 내가 들어간 학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앱을 개발하는 소프트웨어 쪽이지, 엄마 말처럼 기계를 다루는 쪽이 아니었다. 학과에 대해서도 그렇고 졸업하기 전까지는 휴학 없이 다니겠다는 말을 예전부터 해왔는데, 엄마는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제대로 귀담아듣지도 않는다.
-당장 휴학하고 집으로 들어와! 원룸 보증금은 엄마가 집주인한테 연락해서 돌려받을 테니까.
“엄마, 그건…….”
망했다. 보증금으로 들어갔던 돈은 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모두 돌려받았고, 그건 고스란히 다음 학기 등록금으로 쓸 예정이었다. 돈에 유독 민감한 엄마라서 다른 건 다 잊어도 내가 살던 원룸 집주인 아줌마의 휴대폰 번호는 꼭 갖고 있었다. 만약 그쪽으로 엄마가 전화했다가는 내가 말도 없이 방을 뺐고 그 보증금까지 다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럼 거리낄 것 없이 그 돈부터 달라고 하시겠지.
“진정하세요, 엄마. 당장 휴학하는 건 무리라니까요. 그냥 방학 동안 도와드리러…….”
엄마를 어떻게든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말을 잇다가 멈칫했다. 방학 동안 엄마의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는 당장 지건 형과 내가 잠을 못 자게 된다. 그런 생활을 하루라면 모를까, 이틀 이상은 절대 불가능하다.
‘어쩌지. 도와드리러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못 간다고 했다가는 노발대발하실 게 뻔하다. 자칫 서울까지 올라오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도 엄마는 화가 잔뜩 나서는 날 몰아세웠다. 잘만 일해주면 편하게 용돈 벌이하기 좋을 텐데 뭘 고민하냐고, 엄마보다 학업이 더 중요하냐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음에도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버릇처럼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똑똑-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와중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서야, 잠깐 들어가도 돼?”
강지석의 목소리다.
머리가 멈춘 것처럼 뭐라고 말을 만들어야 할지 몰라서 입만 뻐끔거렸다. 엄마와 통화 중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다.
엄마는 나와 아빠에게만 싸늘할 뿐, 타인에게는 이미지 관리를 철저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강지석은 언제나 엄마를 가리켜 우아하고 친절한 사람이라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강지석의 생각을 바꿔주고 싶었으나, 혹시라도 엄마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나와 티끌만큼이라도 거리를 둘까 걱정이 되어 차마 입도 열지 못했었다.
우습게도 그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신우서! 엄마 말 듣고 있는 거야?!
“아, 네.”
엄마의 사나운 목소리에 덜컥 큰 소리로 대답해버렸다. 그러자 잠기지 않은 문고리가 돌아가고 곧이어 문이 열린다. 문틈으로 강지석의 조심스러운 눈동자가 보였다. ‘네’라고 대답한 시점에서 이상한 걸 느끼고 돌아갔을 만도 한데, 이 녀석은 역시 눈치가 없는 건지 기어코 시선을 맞대다가 냉큼 안으로 들어온다.
-안 되겠다. 내일 엄마 올라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예? 엄마, 잠깐만요. 저 사는 곳 주소도 모르시잖아요.”
-그거야 집주인한테 물어보면 되지. 내 아들 집 주소 알려달라는데 안 알려주겠어, 설마?
미치겠다. 집주인한테 전화하면 방 뺀 거 바로 들킬 텐데.
‘어떻게 하지?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 그럼 돈부터 보내라고 하실 텐데…….’
차라리 그게 낫다 싶기도 했다. 돈 보내드리고 방학 때 휴일 없이 일하면 다음 학기 등록금은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엄마는 그마저도 안된다며 끌고 가려고 하실 것 같지만.
‘아니야, 그럼 이 집으로 찾아오려 하실 텐데 강지석도 그렇고 무엇보다 형한테 민폐야. 두 사람한테 폐 끼치지 않고 내 선에서 해결해야지.’
톡톡, 손톱 깨무는 소리가 머릿속을 흔들었다. 이대로 갉아대다 보면 곧 피가 날 게 분명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그…, 제가 지금 원룸이 아니라요.”
어떻게든 둘러대 보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손이 튀어나와 내 휴대폰을 가져간다. 당황해서 강지석을 돌아보니, 녀석이 헤실거리는 얼굴로 나 대신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 저 지석이에요!”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서 강지석은 저 혼자 몽글몽글한 기운을 가득 흘려대었다. 그게 엄마에게도 전해진 건지, 강지석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댈 때까지만 해도 표독스럽던 엄마의 목소리가 금세 차분해진 게 느껴졌다. 그도 모자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살풋 웃는 것 같은 작은 웃음소리까지 곁들인다.
“잘 지내셨죠? 저야 어머니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고 있죠. 가게는 좀 어떠세요? 저번에 안부 여쭐 때 좀 힘들다고 하셨었잖아요.”
엄마와 언제 안부 전화까지 나눈 거지.
엄지손톱을 이빨로 문 채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강지석이 내 손을 그러쥐어 빼낸다. 어느새 살까지 씹어버려 피가 나기 시작한 엄지를 자기가 더 아픈 듯 바라보던 강지석이 그것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간다.
“야, 너 뭐 하는……!”
당황하다가 말을 다 끝맺지도 못했다. 물어뜯긴 엄지 끝을 입가로 가져간 강지석이 붉은 혀를 내밀어 깨물린 살결을 할짝거린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날 오롯이 담은 채 흔들리지 않는다.
“어머니. 우서, 저랑 동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