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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66화 (66/99)

66화

교복의 영향일까.

어렴풋하기만 하던 고등학생 때를 차근히 곱씹으며 그땐 그랬지, 지금도 여전한 게 있지, 그래도 이런 건 바뀌었지, 끝없이 얘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옷을 갈아입고 카페를 나와서도 그때의 감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꽤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도 형이 가끔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었어요. 아무리 봐도 고3이 풀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투덜거리자, 형이 뒤에 가까이 붙어서는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도 잘만 풀던데.”

“그거야 한참 끙끙거리고 있으면 형이 힌트를 주곤 했으니까 그렇죠.”

피식 웃으며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첫 숫자를 누르기 직전,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는 감각에 손가락이 멈칫한다. 좋은 향기가 코끝에 머물고 등을 폭 뒤덮은 체온이 기분 좋게 전해졌다. 단단하고 포근한 품에 안겼다는 만족감은 형과 함께 잠들 때가 아닌 이런 순간까지도 비정상적인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지석이였으면 힌트도 안 줬을 거야.”

뒤에서 내 어깨에 얼굴을 얹듯이 기댄 형이 도어록을 열기 위해 뻗어둔 내 팔을 손으로 감싸듯 쥐었다. 천천히 내 손을 덮기 위해 미끄러지듯 뻗어 나가는 기다란 손가락이 간지러움을 넘어 야릇한 감각을 전해준다. 형이 호흡할 때마다 또 하나의 박동이 밀착한 등을 파고드는 느낌이 났다.

“너니까 줬지.”

형의 손이 내 손등을 완전히 감싸 쥐었을 때쯤엔 낯선 박동이 더 여실히 느껴졌다. 손목이 닿아있어서 그런 걸까.

‘심장…이 더 빨라졌는데…….’

닿아있는 곳들을 통해 형의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다지 오래 닿아있던 게 아니었음에도 금방 알아챌 정도로.

인식하고 나니 내 심장마저 발 빠르게 속도를 맞춘다.

손을 그러쥔 형이 그대로 내 검지를 함께 움직여 번호를 눌렀다. 평소에는 잘만 누르던 번호를 완전히 까먹기라도 한 것처럼, 난 형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번호가 눌리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다.

“들어가기 싫다….”

마지막 번호를 눌렀을 즈음, 형이 중얼거렸다. 야릇하면서도 애가 타는 듯한 목소리 때문에 귀 끝부터 화끈한 열이 올랐다.

형은 기껏 비밀번호를 다 눌러놓고도 마지막 별표 하나를 누르지 않았다. 마치 그건 자신이 누를 게 아니라는 것처럼, 내게 선택권을 넘기듯 손을 뗀다. 내 손등을 덮었던 커다란 손은 그대로 내려와 다른 팔과 함께 내 허리를 둘러 잡았다. 완전히 폭 둘러싸이다 못해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붙잡혀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거세게 요동친다.

형의 숨결 담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이대로…….”

삑- 달칵-

형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갑자기 문에서 멋대로 소리가 났다. 그도 모자라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다.

“왔으면 들어오지.”

태연스레 말을 건넨 건 집 안에서 문을 연 강지석이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에 당연히 귀가가 늦어지는 줄 알았는데, 설마 먼저 와 있었을 줄이야.

문을 연 강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삐딱하게 서서는 우리가 스스로 들어오길 기다리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완전히 굳어버린 나보다, 날 끌어안고 서 있는 형에게 무언의 말을 건네는 듯한 눈빛이다.

눈을 어디 둘 줄 몰라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상하게 보면 어떻게 하지? 누가 봐도 이미 이상한가.’

고백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뜸 친형과 이렇게 묘한 자세로 안고 있으면 당연히 이상하게 볼 거다. 그렇다고 형도 내게 고백했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니지. 고백받았다고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건 나조차 납득이 안 되는데.’

워낙 잘 때마다 안고 안기는 걸 반복해왔다 보니 너무 스스럼이 없었다. 링이 있는 것도 모르고 내가 형에게 고백받은 것조차 모를 강지석의 눈에는 이 장면이 얼마나 기이하게 보일까. 더군다나 강지석이 내게 고백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형에게 친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저연령급 질투 때문인데.

그제야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형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저기, 형. 이제 장난 그만 치고 이것 좀 놔주세요.”

그렇게 말했어도 형의 올가미 같은 팔은 도통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황하며 재차 말하려고 고개를 돌리자, 형의 싸늘해진 얼굴이 보인다. 나만 모를 뿐, 둘이서 눈으로 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그때, 강지석이 내 팔을 붙잡아 당기며 다른 손으로 형의 팔을 거칠게 떼어냈다.

“장난 그만 치라잖아.”

강지석의 목소리에서마저 한기가 느껴진다.

“장난이 아니라면 어쩌려고.”

받아치는 형의 목소리도 서릿발 같다.

형의 팔에서 풀려나 강지석에게 끌려 집 안으로 한발 들어갔다. 문 앞에 서 있던 형을 돌아보려는데, 강지석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 웃으며 헤실거린다.

“늦었네. 나 빼고 어디서 놀다 왔어? 밥은?”

“어? 어…, 먹었어.”

분위기가 완전히 확 바뀌어서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화난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내 팔을 끌고 들어간 강지석은 자연스레 어깨를 감싸 쥔 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까 단톡 봤어? 애들이 우리 방학 때 어디 놀러 가자고 하던데.”

“단톡?”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톡을 확인했다. 친한 동기들끼리 모여 만든 단체 메시지톡 방에 쌓인 미확인 메시지의 수가 벌써 300을 넘어가 있다.

“알림 꺼놔서 몰랐어.”

무슨 얘기를 이렇게 많이 한 건지 읽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질린 표정의 날 보며 강지석이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린다.

“너 빼고 아마 다들 확인했을걸. 놀러 갈 곳 사진도 엄청 올렸던데 한 번 봐봐.”

“응, 알았어.”

어깨에 얹어진 손을 걷어내며 내 방으로 향했다. 강지석의 말마따나 친구들이 신나서 여행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보고 있자니, 방학했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난다.

“우서야.”

방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기 직전, 형이 날 불렀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리자 형의 다정한 미소가 시야를 채운다.

“어울려주느라 수고했어. 푹 쉬어.”

형의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어딘지 모르게 답답해졌다.

‘어울려주다니…….’

확실히 제안을 한 건 형이었고, 거기에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이 응한 건 나였다. 그러니 틀린 말이 아닐 텐데, 왜 이렇게 가슴이 무거운 걸까.

‘꼭 내가 싫은데 억지로 끌려다닌 것 같잖아.’

그런 게 아닌데.

나도 충분히 즐거웠고 형과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기분까지 좋아졌다. 데이트라는 명칭은 과분할 정도로 거창했지만 추억을 되새기며 형과 마음 편히 웃었다는 것만으로도 함께 또 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만 해도 다음번에는 내가 먼저 놀러 가자고 할까 생각할 정도인데.

하지만 차마 입을 열어 속마음을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강지석은 아직도 날 바라보고 있었다. 형과 나 사이에 서서.

“오늘 재밌었어요, 형.”

강지석이 보는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그마저도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고 생각만 많아진다.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나니 그제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답답해.’

없는 넥타이를 꽉 묶은 것처럼 목이 갑갑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서 아예 창밖으로 얼굴까지 내밀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그나마 숨통을 트여준다.

창틀에 팔을 기댄 채 문을 바라보았다. 저 문 너머에 남아 있을 두 사람의 공기가 신경 쓰인다.

‘쟤는 왜 벌써 들어와 있는 거야.’

평소에는 따로 움직이더라도 집에 왔으면 왔다, 늦으면 늦는다, 어린아이처럼 보고도 잘 하던 녀석이 오늘은 왜 연락도 없었던 건지.

‘분위기가 좀 이상하던데, 만난다던 사람하고 무슨 일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곧장 고개를 저었다.

강지석이 이상해진 건 내게 고백했던 날 이후부터였다. 오히려 아까의 헤실거리던 얼굴을 보니 이제야 다시 강지석답게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형을 노려볼 땐 좀 무서웠지만…….’

새삼 강지석을 다시 보게 되었다. 강지석도 형처럼 그렇게 차가운 눈을 할 수 있구나.

역시 형제는 형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밀린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신나서 떠들어대는 내용들을 보고 있자니, 꽤 그럴듯한 펜션 사진 몇 장이 올라온다.

‘이런 곳 놀러 가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단체로 놀러 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딱히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가족 여행조차 꿈 같은 얘기였으니 친구들이 제안하는 이런 펜션 사진에 기분이 들뜰 만도 했다.

아까의 답답한 공기마저 잊은 것처럼 사진을 둘러보던 나는 문득 든 생각에 맨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모처럼의 여행 이야기에도 지금의 난 그저 좋아할 수가 없다.

‘형이 없으면 못 가잖아.’

당일치기로 가는 게 아닌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헛웃음이 나버렸다.

‘형하고 둘이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다니,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데이트 한 번 했다고 이젠 여행까지 생각하고 있다. 얼굴까지 달아올라서는 아주 제정신이 아닌 거지, 내가.

뜨뜻해진 볼을 매만지며 픽 웃었다.

그때,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액정 속 이름을 확인한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엄마]

아마도 액정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는 휴대폰을 쥔 내 손만큼이나 거세게 떨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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