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63화 (63/99)

63화

11. 신우서

강지석에게 고백을 받고 지건 형의 가슴 아픈 본심을 알게 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모든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종강을 맞은 오늘은 응당 마음이 가벼워야 했다. 꼬박꼬박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과제도 없으니 마음 편히 여름방학을 시작하면 될 일인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강지석.”

“아, 으응….”

시험이 끝났음에도 멍하니 있던 강지석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쭈뼛거리듯이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던 그가 내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꼼지락거린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너 뭐 잘못 먹었어? 어디 아파?”

“아니, 전혀…….”

“그런데 왜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물으면서도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사실은 나도 이렇게 태연하게 묻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강지석에게 고백을 받아놓고 대답도 미뤄둔 내가 이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구는 게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리를 둘 순 없잖아.’

강지석에게 고백하는 나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상황이 머릿속에 훤히 그려지곤 했었다. 가장 우려하고 무서워했던 일이다. 강지석에게 고백하고 나서 가차 없이 차인 내가 이전처럼 거리낌 없이 웃고 떠들 수가 없어서 어색하게 거리를 벌리는 그런 상상을 해온 게 벌써 5년째. 그런데 그걸 내가 아닌 강지석이 하고 있으니 지금도 꿈 같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당장에 거절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마음 못 받아준다고 딱 잘라 거절한 것도 아닌데 어색한 사이를 만드는 강지석이 참 못마땅했다. 오히려 확실한 대답조차 하지 않은 내가 죽일 놈이고 강지석에게 미안해할 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대답 못 하겠는 걸 어떻게 해….’

나도 이런 내가 싫다.

아직도 난 강지석을 좋아하고 있었고, 지금만 해도 그와의 서먹한 관계가 너무 싫어서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필사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건 형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지건 형은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고 한없이 다정하며, 강지석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형에게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둘을 향한 마음이 저울 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무게를 유지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선택을 해.

머릿속으로는 나 자신을 향해 온갖 욕을 퍼부으며 답 없는 문제에 한숨을 쉬고 있는데, 겉으로는 그런 내색도 없이 강지석의 안색을 살피기 바쁘다.

“또 넋 나가 있네. 열이라도 있는 거 아냐?”

혹시 또 감기에 걸린 건 아닐까 해서 강지석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는데, 티가 날 정도로 의식하며 어깨를 움찔하는 통에 머릿속의 생각이 우뚝 멈추고 말았다.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나 때문인 거 맞지?”

“어…?”

강지석의 이마에서 슬쩍 손을 떼며 이번엔 내가 시선을 돌렸다.

“…이럴 거면 말하지 말지 그랬어.”

“우서야, 그게…….”

“이렇게 의식하고 피할 거면 차라리 입 다물고 있지 그랬냐고.”

“…….”

잠시 기다려봤지만 강지석은 아무 말도 더하지 못했다. 마치 그가 죄인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내가 잘못해놓고 왜 저 녀석을 탓하고 있는 건지…….’

어깨를 움츠린 강지석을 바라보며 나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차갑게 굳어버린 공기를 더는 참을 수 없어, 내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지금 대답할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사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선택지에 따른 결과는 분명했다.

거절의 대답을 하면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악화될 거다. 대답을 듣지 못한 지금마저 저렇게 의식하고 시선을 돌리는데, 거절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난 아마도 당장 강지석 집에서 짐을 싸고 나와 싸구려 고시원이라도 알아봐야 할 거다. 목구멍을 꽉 짓누른 것처럼 턱턱 막히는 공기가 가득할 텐데 어떻게 버티고 있겠어.

그렇다고 나도 좋아한다, 사귀자, 이렇게 말할 수도 없다. 물론 그렇게 답한다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가까워져,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까지 함께할 수 있겠지.

‘그럼 형은?’

지건 형의 물기 머금은 눈동자가 지금도 생생하다. 절절하게 날 부르던 목소리도, 따뜻하게 안아주던 체온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 숨결을 넘겨주던 키스의 감촉까지 모두 뚜렷한데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외면해.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기회를 줘버렸는데 어떻게 모른 척 강지석의 손을 잡겠냐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미친 게 분명하다.

“대답하지 마.”

여태 조용하던 강지석이 대뜸 말했다. 어물거리던 것과 달리 그 목소리는 꽤 뚜렷했기에 다시 눈을 돌려 강지석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가 선 방향으로 몸까지 돌린 채 올려다보고 있던 강지석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 대답하지 말아줘.”

강지석의 눈빛이 이상하다. 아까는 정말 아픈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넋을 빼놓고 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서울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다.

날 집요할 정도로 올려다보고 있던 강지석이 돌연 짧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건성으로 멘 그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좀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

“뭐…, 미안할 것까진 없는데…….”

어째 눈빛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이상하다. 뭐랄까, 평소의 서글서글한 강지석 대신 지건 형과 엇비슷한 분위기가 난다고 해야 하나.

내가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강지석이 보기 좋은 미소를 걸친다.

“오늘 누구 좀 만나기로 해서 늦게 들어갈 것 같아. 형한테도 그렇게 전해줘.”

“어? 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서 얼결에 대답하니, 머리에 얹어진 손이 한차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지나간다. 강지석은 그렇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뭐야….”

강지석이 쓸어준 머리를 내 손으로 슥슥 쓸어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대답은 왜 하지 말라는 건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정하지도 못한 상태라서 순간 안도했던 건 맞지만, 그래도 강지석의 의중이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할 땐 또 왜 그렇게 진지한 건데, 가슴 철렁하게.

어색한 분위기에 긴장했던 심장이 지금은 더 빠르게 뛰고 있다. 이게 강지석의 분위기 때문인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줬기 때문인지 도통 모르겠다.

복잡한 머리 때문에 혼란스러운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리는데, 시험 때문에 가방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강지석인가 해서 휴대폰을 꺼내 액정에 뜬 메시지를 보니,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났다.

[시험 잘 보셨나요, 주인님.]

메시지를 보며 웃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험 끝난 강의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강지석이 떠나, 지금은 나 혼자뿐이다.

강지석과의 일은 벌써 잊은 것처럼 작은 미소를 띤 채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울렸을 즈음, 형의 ‘네, 주인님’ 소리가 들린다.

“형, 대체 그게 무슨 컨셉이에요? 제가 왜 주인님인데요?”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지 않아?

“전혀요. 오글거리거든요.”

-아쉽네. 좋아하면 쭉 해보려고 했는데.

어떻게 저런 소리를 저렇게 태연하게 하지.

-시험은 잘 봤어?

“아마도요.”

-다행이야. 아, 혹시 지석이랑 같이 있어?

형의 말에 고개를 돌려 강지석이 나간 강의실 문을 바라보았다. 훤히 열려 있는 문밖에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다.

“아뇨, 누구 만날 사람 있다고 늦게 들어갈 거라던데요.”

-상황까지 좋네. 홀가분하게 데이트할 수 있겠어.

형의 말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데……. 뭐라고요?”

-데이트.

“…예?”

-못 들은 척하는 것도 귀엽네. 곧 학교 앞이니까 바로 나오면 되겠다.

데이트라니, 상상도 못 해본 단어라서 얼이 빠졌다. 강지석을 좋아할 때부터 그런 연인다운 단어는 저 밑바닥에 묻어두고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끌려 올라올 줄은 몰랐다.

단어를 정확히 되새기고 나자, 그새 얼굴에 열감이 몰린다. 화끈거리는 볼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입 안에서 말을 굴렸다.

“저기, 형, 데이트는……. 그러니까…….”

왜 벌써 목소리가 잔뜩 긴장한 걸까.

-부담 주려던 건 아니었어. 네가 싫다고 하면 그냥 바로 집으로 갈게.

‘그렇게 처진 목소리를 섞으면 제가 어떻게 거절해요.’

얼굴에 몰린 열감은 자꾸 기세를 더해가고, 머릿속에는 형의 축 처지듯 내려간 눈꼬리가 선명히 그려진다.

“형…, 제가 뭐에 약한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죠?”

-글쎄. 그래서 언제 나올 거야? 벌써 도착했는데.

내 대답마저 짐작하고 있다는 듯, 형의 목소리는 그새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약았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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