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요!”
우서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밖에 강지석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듯한, 충동적이고도 위태로운 감정의 외침.
“형 감정이 그렇게 가벼운 거였어요? 내가 강지석한테 고백받았다는 것 때문에 링을 해제하자고?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기억도 다 잃는데, 그런데도 해제하자고요?!”
“그래!”
충동적인 감정에는 그만한 격한 감정을 부딪쳐줘야 하는 법이다. 얌전 빼고 있으면 우서가 금세 냉정을 되찾을지 모른다. 강지석이 우서와 함께 술을 마시게끔 유도한 것도 그가 감정을 다듬지 못해 충동적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순 없지.
얼굴을 흐트러뜨리고 우서에게서 점차 뒷걸음질 쳤다.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감정 때문에 눈물이 차오르는 연기만큼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걸 못 해내면 여태껏 다 만들어둔 판에 나 스스로 재를 뿌리는 거라고 생각하니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도 모자라 우서가 날 밀어내고 결국 떠나버리는 걸 상상하니 눈가에 피가 몰렸다.
“나는…, 나는 못 견딜 것 같아. 지금도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그보다 더한 걸 어떻게 견뎌.”
아파.
나 아파, 우서야.
널 제대로 못 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아파 죽을 것 같아.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알아서 덜덜 떨리고 피가 몰린 눈가에 시큰거림이 더해진다.
“너에게도 그게 맞는 거야. 나 같은 건 잊고 지석이만 바라보면 돼.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아니야.
나만 봐줘, 우서야.
지금처럼 나만 봐.
우서와의 거리를 벌리고 숨을 고르며 표정을 다듬고자 애썼다. 하지만 이미 눈가에 피가 몰릴 만큼 절실한 감정으로 가득 차버린 표정은 내가 원하던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은 척, 아픈 척 웃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우서가 날 밀어낼까 봐.
‘정신 차려, 강지건.’
연기를 위해 감정을 끌어올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필이면 모른척하던 부정적인 감정들마저 함께 찾아왔다. 강지석이 문밖에서 듣고 있기 때문일까.
‘내가 조급하면 어쩌자는 거야.’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아픈데도 태연한 척을 해야 우서를 더 흔들어 놓을 수 있다. 내 감정을 확실히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자, 우서의 요동치는 눈동자가 보였다. 덜덜 떠는 입술이 보이고 어깨를 움츠린 채 꽉 쥔 두 손을 보고 있자, 내가 감추지 못한 이 감정들이 오히려 그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이용해야지.
여유 속에 감춰진 감정을 우서가 집요할 정도로 찾게 만드는 것 대신, 깊은 곳에서 꺼덕거리는 생생한 날 것의 감정을 그가 직접 체감할 수 있도록 그대로 보여주자.
이번만큼은 가면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널 잡아야 하는 비참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체감해봐.
“…해제하자.”
내가 들어도 너무나 선명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엉망진창이 된 진심 어린 괴로운 목소리가 우서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싫어요….”
때론 진심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책략이 된다. 거짓으로 둘러싼 가면 대신 연기가 필요 없는 어둑한 감정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우서는 그렇게 나보다 더 아픈 표정을 짓게 되었다.
“아직은… 싫어요….”
우서의 달아오른 눈가와 먹먹한 목소리는 내가 원하는 승기를 잡았음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강지석과 저는…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친구예요.”
우서의 입에서 그가 강지석을 밀어냈음을 밝히는 말이 흘러나왔다.
“고백을 받은 건 맞아요. 맞는데…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럴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우서에게서 직접 들으니 이만한 쾌감이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기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감정이 몸속 여기저기를 굴러다녔는데, 지금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갈 정도로 기분이 좋다.
우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갔다. 금세 차오른 따뜻한 물기가 보기 좋게 방울져, 금방이라도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분명히 강지석을 좋아하는 게 맞는데…….”
도저히 답을 모르겠는 억울함과 복잡한 감정이 어우러져 우서를 괴롭혀댔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는 어째서 이리도 짜릿한지, 그것만으로도 전신에 뜨거운 열기가 차올라 미칠 것 같다.
“왜 난 바보같이 그걸 밀어냈는지 모르겠어요. 자꾸… 강지석에게서 형을 찾게 되고…….”
저런 말을 듣고 있는데 어떻게 미치지 않아.
내게서 강지석만을 찾던 우서가 점차 나와 그 녀석을 구분해서 바라보게 되고, 이윽고 강지석에게서 내 그림자를 찾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것이야말로 먼 옛날 쿠데타를 주도해 승리를 거머쥔 이들의 짜릿한 심정일까.
숨길 수 없었던 어두운 감정은 점차 희열에 물들어 다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다시금 가면을 쓸 필요도 없다. 이번에도 난 있는 그대로, 내가 느낀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우서야….”
나의 신우서.
사랑스러운 짝.
“넌 그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어.”
벌려둔 거리만큼 다가가 우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꽉 쥐어져 있느라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던 손바닥에 우서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그것은 곧 기분 좋은 전류가 되어 손끝부터 전신을 향해 뻗어 나갔다.
손안에 들어온 우서의 얼굴을 탐하고 탐한 끝에 산산이 부숴버릴 것 같아 겁이 났다.
조심해야지.
내 손에 어떻게 들어왔는데.
등 너머로 강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강지석은 우서와 그 사이에 벽이 생길까 봐 버젓이 열려 있는 문조차 열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다짜고짜 들어와 주면 나야 좋은 일이다. 감정을 가늠하지도 못하도록 둘 사이에 불투명한 벽을 만들어 줄 계기가 될 테니까. 어쩌면 우서가 미뤄둔 대답을 충동적으로 이 자리에서 내뱉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강지석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그 정도로 바보인 건 아닌가 보네.’
이 상황을 덮쳐봐야 강지석에게는 하등 이로울 게 없다. 지금보다 더 불리해지면 불리해졌지.
‘그럼 좀 더 보여줄까.’
우서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게 누구 때문인지, 명확하게 말이다.
붉게 상기되어 있는 우서의 얼굴에 점차 입술을 가져갔다.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게도 아직 기회가 있는 거면… 피하지 말아줘.”
우서의 눈동자가 또다시 흔들리고, 그의 눈가에 아슬아슬 맺혀 있던 따뜻한 물방울이 또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서의 숨을 삼키듯 그의 입술에 살을 비볐다. 얼굴의 열기보다 더한 뜨거움을 품은 부드러운 살결이, 맞닿은 내 입술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진다. 부드럽고 뜨거워서 이대로 입술만 비비고 있어도 황홀할 것 같다.
“흣….”
입술을 비비고 숨을 삼킨 것만으로도 우서의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뒷일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날 붙잡은 손끝이 떨리고 눈을 사르르 감아버린다. 그런 그의 허리를 팔로 휘감아 바짝 당겼다. 흠칫거리는 우서의 작은 입술을 혀끝으로 달래듯 쓸어주었다.
“나 좋을 대로 해석해도 될까?”
“…….”
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위태롭게 날 붙잡고 있던 두 손이 올라가, 내 목에 팔을 두른다.
입술이 닿아있어서 다행이다.
내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가는 걸 우서가 보지 못해서.
처음부터 직설적으로 들이댈 수도 있었다. 이걸 피하지 않으면 날 받아들인 거로 알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고, 링의 짝으로서 제대로 이어져 보자고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우서에겐 그렇게 다가가면 안 된다. 흔들 목적이 아니라면 직설적이고 급박하게 몰아세울 게 아니라, 내가 들어갈 자리를 아주 조금만 내어줘도 충분하다는 분위기를 풍겨줘야 했다. 부담스럽지 않게, 모든 선택권은 그에게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고 토닥여주듯이.
우서의 허리를 감아 안은 채, 그의 몸을 가뿐히 안아 들었다. 그러면서도 맞댄 입술을 떼지 않았다.
입술만 조심스레 핥던 걸 멈추고서 입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들어가자마자 머뭇거리고 있는 작은 살덩이를 붙잡아 강하게 빨아들였다.
“흐읍…!”
우서의 입에서 조금 큰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 입 안까지 끌고 들어온 혀를 놓아주며 그 끝을 부드럽게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럴 때마다 내 목에 걸친 우서의 팔이 움찔거린다.
파르르 떨리는 우서의 젖은 눈가도 핥아주고 싶은 걸 참아내며 그의 혀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그러면서 몸을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곳엔 강지석의 선명한 눈동자가 미동도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서 잘 봐둬, 지석아.
우서는 내 거라는 걸.
강지석에게 보란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이며 우서를 안아 든 채 침대로 향했다. 문틈의 눈동자가 점차 크게 흔들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