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60화 (60/99)

60화

5년 전 어느 날이 생각난다.

시험을 앞두고 우서가 어려워하던 부분을 짚어주던 그 날은 아직 내가 그에 대한 마음을 제대로 자각하기도 전이었다.

한 가지에 막혀 끙끙거리던 우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풀어내지 못하는 문제에 봉착한 탓에 정신적으로 꽤 힘들어 보였다. 워낙 똑똑해서 금방 깨우치곤 하던 그였지만 망할 문제가 갖은 응용문제로 모습을 바꿔 나올 때마다 제 머리를 의심할 정도이니 힘들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지금의 나는 그 문제를 읽자마자 풀어낼 정도긴 해도 고등학생일 때는 적잖이 어려워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이런 문제, 시험에 거의 나오지도 않던데 그냥 포기할까요?”

지친 우서가 웬일로 약한 소리를 했다. 그의 말대로긴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우서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여주며 함께 문제를 내려다보았다.

“네 말대로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나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펜을 든 우서의 손을 감싸 쥐고서 문제 아래에 자그마한 단서부터 시작해, 점차 확실한 방법의 풀이를 적어놓았다.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쉽도록, 그리고 확실하게 풀 수 있도록.

“쉽게 나아갈 수 없는 문제는 네 앞에 놓인 걸림돌이야. 걸림돌은 아주 작은 거든, 커다란 거든, 깔끔하게 치워야 해. 그래야 걸려 넘어지지 않아.”

이전에 알려줄 때보다 좀 더 세밀하게 풀어서 해답을 적어주니, 우서의 지쳐있던 눈동자에 약간의 생기가 어린다. 매번 어렵다며 징징대기만 하던 동생의 반응과 워낙 달라서 그런지, 그럴 때마다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물론 걸림돌이 있어야 문제 푸는 것도 재미있는 법이지만.”

문제와 풀이를 내려다보던 우서의 눈동자가 날 향했다. 눈가가 사르르 곡선을 그리더니만 보기 드문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형이 말로만 듣던 사디스트인가 봐요.”

“건전한 고등학생이 쓸 단어가 아닌데, 어디서 배웠어?”

“그거야 친구들이……. 아, 여기에 대입을 이렇게 해야 했구나. 형, 그럼 여긴 이렇게 하면 돼요?”

금세 의욕적이 된 우서가 내 풀이에 자신만의 표시를 하며 덧그렸다. 그때 당시엔 그게 왜 그렇게 좋았던 건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그날을 떠올리며 한발 한발, 빠르지만 확실하게 나아갔다. 우서는 맹수에게 목을 드러낸 자그마한 초식동물처럼 거듭 바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물러나는 그의 등에 서랍장이 부딪쳐 덜컹거렸다. 색이 무르익었음을 나타내듯 농염한 검붉은 색감을 드러낸 장미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린다.

가까이 다가가 잔뜩 굳어있던 우서를 두 팔 가득 품어 가슴에 묻었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넘어오는 우서의 급박한 박동마저 사랑스럽다. 더 생생하게 느끼고자 강하게, 더 강하게 품는다.

“우서야…. 우서야….”

주문처럼 중얼거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를 때마다 미처 누르지 못한 희열이 떨림을 만들어냈지만, 자꾸만 끌려 올라가려는 내 입꼬리를 보지 못한 우서는 그마저도 안타깝게 느낄 것이다.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삼키고자 우서의 가느다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의 뼈대가 내 눈가의 부푼 열기를 머금기 시작한다.

“오늘…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어….”

아니, 너라면 강지석이 어떻게 몰아붙이든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하든, 반드시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네가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나 때문에.

“형이 나 때문에 못 자면 큰일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거봐,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버릇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서 올라가려는 손을 내린 채 그에게서 떨어졌다.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아프게 일그러뜨렸다.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강지석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어차피 그에게 보여줄 메시지의 위아래에 남아 있는 거라고는 강지석이 나와 대화하기 위해 시도를 한 흔적뿐이라, 뭘 지우고 보탤 것도 없었다.

휴대폰에 떠 있는 메시지 내용을 바라보던 우서의 눈동자가 한차례 흠칫하다가 깊이 가라앉았다. 곧 그의 눈가가 자그마한 돌덩이를 삼킨 것처럼 우그러진다.

“고백…받은 거지?”

우서는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았다. 차마 입을 여는 것조차 버거운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난 이미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아니길 바랐던 사람처럼 탄식의 숨을 흘렸다. 목 아래에 가득 힘을 주어 마치 목이 메기라도 한 듯한 쓸쓸하면서도 젖은 음성을 만들어냈다.

“그래…. 역시 그랬구나….”

그 목소리는 깊이 가라앉았던 우서의 눈동자를 어렵잖게 끌어 올렸다.

“형….”

“잘 됐어.”

잘 됐고말고.

애초에 강지석이 우서에게 고백이라 부르는 서툴고 급한 감정을 부딪쳐줘야 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멍청한 동생은 참 기특하게도, 체스판의 적당히 써먹기 좋은 나이트가 되어 내 오차범위 안에서 잘도 움직여주었다.

‘아, 그만 생각해야 해.’

자꾸 웃음이 나잖아. 이 상황에서는 표정관리만큼 중요한 게 없는데.

고개를 푹 숙여 멋대로 흘러나올 뻔한 진짜 감정을 삼켰다. 그럼에도 이미 올라간 입꼬리는 완전히 제지하지 못해, 어렵사리 쓴웃음인 척 입매를 다듬었다.

“지석이도 네 마음과 같은 거잖아. 정말 잘 됐어. 이제 대용품은… 없어도 되겠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게 진심인 척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적당한 떨림도 섞었고 호흡도 흐트러뜨렸으니 이 정도 거짓말은 우서 역시 알아챌 것이다.

슬슬 적당한 타이밍이지 않을까.

“사실은 네게 고백할 게 있어.”

“…뭔데요?”

“링을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어.”

우서의 눈동자가 크게 떠지고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정처 없이 흔들린다. 그 귀여운 눈동자를 통째로 핥아주고 싶은 걸 참아내며 여전히 목소리를 떨었다.

“커넥터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언제든 우리의 링을 가져가 줄 수 있는…….”

“링을 해제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들었어요?”

그럼, 잘 알지.

아니까 이러는 거야.

입가에 더욱 진한 미소를 걸며 아무렇지 않은 척 짧게 대답했다. 우서의 가녀리고 약한 얼굴에 점차 선이 또렷해져 간다. 혼란스럽기만 하던 표정이 다듬어져, 우서의 감정이 하나둘 얼굴 위에 드러난다.

“해제한다고 해서 크게 지장 가는 건 없을 거야.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지. 불면증 없는 예전으로. 그게 다야.”

“거짓말하지 말아요.”

우서의 어깨가 떨렸다. 그것은 아까처럼 겁을 먹은 작은 동물 같은 떨림이 아니라, 감정을 절제하고 분을 삭이고자 하는 것이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상상했던 것과는 천지 차이다.

“이미 다 알잖아요. 커넥터를 찾았으면 모를 리가 없잖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우서가 링의 불합리함에 분노했다. 링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깔려 있던 사실을 알게 된 내가 얼마나 좌절하고 가슴 아파했을지 상상하느라 그가 더 힘들어 보인다.

“기억을 잃게 되는 것도 다 아는 거잖아요!”

술기운이 가져다준 열기는 우서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주물러댄다. 급히 고백해온 강지석의 마음을 속속들이 헤아리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저 내가 체감했을 통증에만 집중하며 정작 그 본인의 감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있다.

“형도 나도, 우릴 서로 잊게 된다고요.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다고…….”

불안하고 애틋하게 입을 여는 우서를 끌어안고 싶다. 저토록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우서는 가히 사랑스럽다. 심지어 그 이유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기에, 끓어오르는 진한 애정을 어찌할 수 없어 주먹만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 덕분에 정신을 차려, 가까스로 내 비틀린 욕구와 검은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때.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토해진 감정을 절제하려던 우서는 몰랐지만, 때마침 기척을 느낀 난 알 수 있었다. 어깨너머로 슬쩍 눈을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작게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의 눈동자가 보인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참아내며 다시 우서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떨리는 머리카락이 내 시야를 아름다운 그림처럼 어지럽힌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할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우서의 어깨를 흔들고 그의 두 손을 걷어낸다. 괴로운 듯 일그러뜨린 얼굴로 위태롭게 말을 이었다.

“네가 그토록 힘들어했던 짝사랑이 끝났어. 이제 넌 지석이와 원하던 나날을 보내며 살게 될 텐데, 더 이상 내가 걸림돌이 될 순 없잖아.”

네가 과거에 그토록 어려워해서 포기할뻔했던 문제처럼, 지금까지의 나는 네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네게 들어 보인 이 왼손 약지의 붉은 링도 마찬가지이다.

“걸림돌은 치워야지, 우서야. 기왕이면 깔끔하게… 치워야 하는 거잖아.”

내가 알려주던 거, 기억하지?

걸림돌은 치워야 하는 거야. 안 그러면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거든. 네가 원하는 길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걸림돌 위로 위험하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거야.

“난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싶지 않아. …해제하자.”

그러니까 선택해.

이대로 날 치워버릴지, 아니면 문 너머에서 듣고 있을 네 짝사랑 상대를 걸림돌로 만들어버릴지.

어차피 네 선택은 알고 있지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