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냥 형 먼저 자. 우리 기다리지 말고.
‘괜찮아. 난 신경 쓰지 않아도…….’
강지석의 냉담한 목소리와 얽혀버린 소리 없는 말이 우서의 시선을 빼앗는다.
입 모양을 또렷하게 해서 문장을 만들려다가 울컥해서 차마 그러지 못한 척, 어렵사리 입을 다물었다. 구겨진 미간과 꾹 다물린 입술만 보여줘도 내가 우서에게 드러내고자 했던 감정이 무엇인지 정도는 충분히 전해질 것이다.
“기다릴 테니까, 이따가 집에서 보자.”
우서를 향해 아픈 듯한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우서에게는 그를 향한 다정한 메시지가 될 테고, 내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듣는 강지석에게는 분명한 경고가 될 것이다.
-어, 알았어.
짧은 말을 끝으로 강지석과의 통화가 끊어졌다.
강지석은 흐트러진 우서의 몸을 재차 부축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서의 시선은 내게 박힌 채 떨어질 줄 몰랐다. 이대로 있으면 강지석 또한 날 보게 될 거라, 마치 발이 떨어지지 않음에도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힘겹게 돌아섰다. 아쉬운 듯이 몸을 완전히 돌리기 직전까지도 우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몸을 돌린 내가 취해야 할 일은 별거 없었다.
자연스레 차를 몰아 집으로 향하는 것뿐.
술집 골목을 나와서 도로에 스며들 때, 백미러를 통해 멀어져가는 우서와 지석이를 주시했다. 우서는 강지석과 실랑이하는 그때에도 내가 탄 차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만 바라보면 자꾸 차를 돌리고 싶어지잖아.’
백미러 멀리 점이 되어가는 우서에게서 눈을 떼고서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조금만 틀어져도 크게 어긋날지 모를 상황을 만들어 놓고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우서가 내게서 눈도 돌리지 못하는 것을 보며 벌써부터 승리감에 도취해 버린 건지도 모른다. 아직 중요한 과정과 연기가 남아 있으니 방심하면 안 되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민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내용을 들어보니 강지석이 메시지를 보내서 날 붙들어두라고 재차 당부한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으며 우서의 위치를 확인했다. 빠른 움직임으로 보아 택시를 잡아탄 것 같은데, 방향이 집 쪽이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지석이는 정말 바보네.’
내 연기가 제대로 먹혔다면 우서는 지금쯤 내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 상황을 회피하기보다는 날 확인하려 할 거다. 내가 괜찮은 건지, 혹시라도 어딘가 아파서 망가진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겠지.
강지석은 그런 우서가 아무리 집에 돌아가겠다고 해도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향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조금이나마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여튼 강지석은 예나 지금이나 우서에게 약해 빠졌다. 그리고 한민아에게도.
한민아에게는 알았다는 답만 보내고서 모르는 척하고 있으라 말했다. 어차피 안심시킨 한민아가 사실은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그녀에게 언성 한 번 높일 줄 모르던 강지석이 이것저것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겉옷만 벗어둔 채 거실 소파에 앉았다. 이쪽으로 가까워져 가는 붉은 점의 위치를 확인하며 담배가 당기는 걸 참아냈다. 안달하는 사람처럼 미리 꺼내둔 담배 한 개비와 지포 라이터를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대었다.
붉은 점은 이내 내가 있는 곳 근처에 다다랐다. 위치상 우서가 있는 곳은 이 아파트 단지 바로 앞이었다. 그제야 소파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좌우로 늘어선 실외주차장의 차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택시가 보이고, 예상대로 이 아파트 단지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서와 강지석이 보였다.
층수가 있다 보니 둘이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보는 것도 그저 옷차림 정도나 조금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다였다.
흥미롭고 자극적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다. 꾹 참았던 불씨를 지피듯 라이터로 불을 붙인 새하얀 담배의 끝이 검은 재가 되어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물으나 마나 뻔하다.
“힘내.”
웃음기 띤 얼굴로 담배를 피우며 중얼거렸다.
“힘내 봐, 지석아.”
조급함은 일을 망치고 정신을 흐트러뜨린다. 그리고 초조함은 그마저도 인식하지 못하게 해서 더 열악한 환경을 만든다.
만약 강지석이 천천히 우서의 마음을 깨닫고 그와 동시에 그에게 뿌리박혀 있던 감정을 점차 진하게 다듬었다면 아무리 링이 있다고 해도 내게 그다지 큰 승산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계획을 세우는 내내 고배를 마셔야 했을지도 모른다. 녀석과 나의 시작점은 아득히 높은 플러스와 저 나락에 있는 마이너스와 같았기에.
‘그렇게 놔둘 순 없잖아.’
사람은 본디 어느 날 갑자기 급박하게 몰아쳐야 조급함을 느끼는 법이고 예기치 못한 불씨를 쑤셔 박혀야 초조해하는 법이다.
그걸 위해 난 일부러 거실부터 불을 환히 켜두고 베란다에 나와서 보란 듯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날 의식한 만큼 택시에서 내린 순간부터 집에 불이 켜져 있음을 확인했을 테고, 지금처럼 우서 몰래 가끔 고개를 들어 이쪽을 올려다본다.
한민아에게 끌려다니느라 집에 없을 줄 알았던 내가 버젓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강지석의 조급함은 궁지에 내몰린 쥐처럼 그저 급할 수밖에 없다. 급하고 급해서 우서가 어떤 심정일지 헤아릴 줄도 모르지.
거리 때문에 표정까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도 내가 지금 얼마나 비열하고 기분 좋게 웃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다가 입꼬리가 우뚝 멈췄다.
강지석이 우서의 몸을 끌어당겼다. 마주 보며 말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무리 봐도 너무 가깝다. 뭘 하고 있는 건지 너무도 단박에 알아채는 내가 짜증스럽다. 한숨과 함께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손으로는 반도 다 피우지 못한 담배를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비벼서 꺼버렸다.
‘흔적도 없이 닦아내야겠네.’
아까만 해도 달콤하던 연기가 독한 시가를 피운 것처럼 목구멍을 턱턱 막히게 했다. 이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적응이 안 된다. 애초에 적응할 생각도 없었지만.
뭐라 대화하던 도중, 우서가 고개를 돌리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있음에도 우서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이쯤이면 됐겠지.’
우서의 시선이 또 내게 박혀 떨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도 목구멍이 답답하고 과도하게 긴장한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지만 우서가 날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희열이 느껴진다. 이제 내가 깔아둘 밑밥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우서의 시선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대충 던져둔 겉옷을 들고 방에 들어가는데, 자꾸만 몸속 어딘가가 간질거려서 웃음이 났다.
날 의식하는 우서가 좋다.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우서가 좋다.
돌아오면 내게 휘둘린 것도 모르고 어쩔 줄 몰라 할 우서가 좋다.
“하아….”
기분 좋은 열기 띤 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혼자 멋대로 달아오른 몸 덕분에 오늘은 찬물로 샤워해도 좋을 것 같다.
모든 걸 보고 체념한 척, 생각을 정리하는 척, 일부러 문을 잠그고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에 들어온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귀찮을 정도로 우서를 따라다니는 강지석의 초조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어떤 대화를 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굳이 문을 열어 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화를 몰라도 두 사람의 언성만 들어보면 어떤 감정 상태인지 충분히 알만했다.
강지석의 서툰 고백이 성공할 확률은 희박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우서라면 머리가 터질 만큼 복잡한 상황에 아무리 강지석이 고백했다 해도 섣불리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거절해주면 더 좋고.
내가 우서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처럼 따라다니던 강지석은 그가 씻는 동안 내 방을 노크했다. 하지만 굳이 열어주지 않았다. 차마 소리를 내서 부를 순 없으니 내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읽지도 않았다. 욕실에서 떨어져 전화를 거는 것도 무시했다.
마음이 급했던 강지석은 얼마 가지 않아 포기한 듯했다.
밖의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데, 조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대기하고 있는 듯하던 강지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자정에 가까워져 있다.
‘술까지 마신 상태이니 슬슬 한계일 만도 하지.’
어딘가에 뻗어서 잠들어 있을 강지석을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잠들어 있는 강지석이 보이고, 뒤이어 욕실 문 앞에 멈춰 서 있는 우서가 보인다.
날 보고 굳어있는 우서를 보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평소라면 상냥하게 그러쥐었겠지만, 내게 그럴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그가 짐작해줬으면 했다. 소리가 날뻔한 입을 틀어막은 채 우서는 내가 끌면 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왔다. 뜨거운 샤워의 여파인지, 우서에게 잔뜩 머물러 있는 뜨끈한 온기가 벌써부터 기분 좋다.
방에 밀어 넣고는 당황해하는 우서를 바라보며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아니, 닫는 척했다.
아주 작은 틈새를 남겨둔 채 달칵, 문을 잠그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건 문 자체의 잠금만 했을 뿐,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은 그 틈새로 이곳과 밖의 공기를 열심히 뒤섞어주고 있었다.
자그마한 틈새 너머, 어렴풋이 강지석의 작은 잠꼬대 닮은 신음이 들렸다.
‘말했지, 우서야.’
우서에게는 감정을 가리기 위한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만을 보여주었다. 사실은 롤러코스터의 꼭대기에서 이제 막 떨어지기 시작한 열차의 첫머리에 앉은 기분이었는데.
‘걸림돌은 치워야 한다고. 다시는 걸림돌조차 될 수 없도록, 아주 깔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