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일을 마치고 강지석과 우서가 있을 술집으로 향했다. 이동하면서 확인차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하고 얘기 좀 해. 오늘 일찍 들어갈 건데, 둘 다 바로 집으로 오지?]
[형하고 할 얘기 없어. 술 먹고 들어갈 거니까 기다리지 마.]
강지석의 메시지 위로 그의 매서운 경계의 눈초리가 떠오른다.
까칠하긴.
더 이상 메시지를 나누지 않고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 깊이 넣어두었다. 익숙한 술집 옆 골목에 차를 세워둔 후, 오는 길에 사 온 테이크아웃 커피를 입에 댔다. 시럽도 들어있지 않은 쓰디쓴 아메리카노였는데 어째서인지 달게 느껴진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휴대폰을 통해 우서의 위치를 주시했다. 혹시라도 자리를 옮기게 되면 티가 나지 않게 그들이 있을 곳으로 이동해야 하니,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서와 강지석은 차를 주차해둔 골목 바로 옆 술집에 자리를 잡고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꽤 넉넉한 양의 커피가 그새 바닥을 드러냈고, 계속 켜두고 주시했던 탓에 휴대폰의 배터리도 30%나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도 따분하진 않았다. 복잡한 수식이나 관계식의 변수를 생각하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어서 그런지, 머릿속으로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이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휴대폰에 붉은 점으로 나타나 깜빡거리는 우서의 위치와 가까운 거리에 멈춰있는 녹색의 점을 눈여겨보고 있는데, 돌연 한민아의 전화가 걸려 왔다. 집중하고 있던 차에 들어온 방해라서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이어셋을 꺼내 들었다.
-지건아, 아까 지석이한테 문자 왔었어.
“뭐라고 왔는데?”
통화를 하면서도 손은 차량용 거치대에 고정한 휴대폰을 건드리고 있었다. 통화 때문에 잠깐 화면이 바뀌었던 걸 다시 위치추적 앱 화면으로 바꿔 확인했다. 아주 잠깐이긴 해도 그사이 우서와 강지석이 이동했다면 계획을 또 손봐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액정의 빨간 점은 여전히 한 위치에서 점멸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한테 정 미안하면 오늘 너 좀 끌고 다녀달라더라.
“웃긴 새끼.”
하여튼 어리다, 어려.
우서는 그렇게나 어른스럽던데 내 동생은 겉만 컸지 어린 티가 팍팍 난다. 한심스럽게도.
한민아에겐 일부러 내가 그녀를 이용하게 된 과정과 결과를 강지석에게 미안한 척 낱낱이 말해두라 일렀었다. 사흘 전에 강지석이 내 멱살잡이를 하며 눈을 부릅뜬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한민아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었는데, 내가 말없이 웃기만 하니 이젠 캐묻는 걸 포기한 듯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알아서 보고해주니 고맙기도 하다.
커피를 입에 대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겠다고 해주던가. 어차피 내가 직접적으로 그 녀석 눈에 띌 생각은 없어. 상황 좀 보고 불씨만 더 넣어줄까 생각할 뿐이지.”
-그럼 말 좀 맞춰둬. 오늘 나한테 백화점 끌려간 거로.
“그럴게. 변수 생기면 대처는 알아서 유연하게 하고 메시지 남겨.”
-너야말로.
무슨 첩보 작전처럼 은밀히 말하던 한민아가 짧게 한숨을 쉰다.
-내가 왜 너희 형제 사이에 껴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언젠 몰래 하랬다가 대뜸 다 말하라고 했다가……. 어휴.
“너도 재미있으니까 발 못 빼고 있는 거잖아.”
이어셋 너머로 한민아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들켰어?
“진작.”
-아, 재미없게.
목소리의 무게가 다소 가벼워진 한민아가 웃음기 띤 목소리로 신난 듯 입을 연다.
-솔직히 재미있을 수밖에 없잖아. 강지건이 노리는 상대라는 게 친동생한테 몇 년간 푹 빠져 있는 한참 연하라는데, 안 되는 싸움은 시작조차 안 한다던 사람 맞아?
“안 되는 싸움이라고 누가 그래?”
그러쥔 왼손을 들어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내 손가락에 자리 잡은 링은 너무도 선명했다.
“이건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야.”
강지석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 링이 있는 한, 우서는 내 거야.
건너편에서 ‘같이 재밌게 상황 공유 좀 자주 해줘.’라는 말이 들렸다. 그때쯤, 휴대폰에 떠 있던 붉은 점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여유롭던 표정을 바꾸고 전화를 끊은 뒤, 마지막 남은 달큰한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붉은 점은 잠깐 움직인 게 아니었다. 점차 이동해, 곧 술집 밖으로 나왔다. 나 역시 휴대폰을 집어 든 채 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거리가 있어서 확실한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잔뜩 술에 취한 우서가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강지석이 그런 그를 안듯이 부축해 길가에 데리고 섰다.
‘저렇게 잔뜩 취하게 두면 어떻게 해.’
그 딴에는 술기운을 빌어서 우서에게 정면으로 고백해보려고 했던 거겠지만, 아쉽게도 실패한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분위기를 잡아도 모자랄 판에 저런 소란스러운 술집에서 고백이라니, 아무리 강지석이 덜떨어졌어도 그건 아닐 거다.
‘지석이가 생각이 짧아서 다행이네.’
술기운을 밀어 넣긴 하되, 인사불성 급으로 취하진 않게끔 조절해서 먹였어야지. 저렇게 만들어 놓고 고백은 무슨.
덕분에 이쪽은 생각한 대로 흘러가서 재미있어졌지만.
늘어진 우서를 부축하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지석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상태를 보고는 일부러 우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지석에게 기대어 힘없이 휴대폰을 꺼내 들던 우서는 그대로 떨어뜨릴 뻔하고, 그걸 강지석이 요령 좋게 받아 든다.
우서의 휴대폰 액정에 떴을 내 이름을 노려보던 강지석은 차가워진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왜, 형.
휴대폰 너머로 강지석의 서릿발 같은 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경계를 넘어 이젠 적의에 가까운 감정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그를 보며 입가를 끌어 올렸다.
“어디야?”
-아까 문자 했잖아. 술 먹고 들어간다고.
강지석의 목소리와 함께 우서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전화인데 왜 네가 받아…. 내놔….
웅얼거리는 목소리마저 귀엽다. 저 목소리를 이런 전자기기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들었다면 볼을 감싸고 눈을 맞대며 입술을 비비는 걸 멈추지 못했을 텐데.
우서를 부축하고 있는 게 강지석이 아닌 나였으면 좋겠다는 끓어 오르는 질투심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태연하게 말했다.
“잘 들어, 강지석. 우서에겐 티 나지 않게 태연하게 대화하는 척해. 그게 너한테도 나을 거야.”
-…….
강지석의 눈에 의문과 경계심이 어우러졌다. 내 말대로 할지, 아니면 전화를 확 끊어버릴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데리러 안 와도 돼. 우리 2차 갈 거야. …안 들어갈지도 몰라.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내 말에 응함과 동시에 선전포고를 한 거다. 우서를 데리러 올 생각이라면 관두라고, 2차뿐만 아니라 어쩌면 더 농도 짙은 무언가를 위해 다른 곳에 갈 수도 있으니 참견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딴 말을 진심으로 해봐야 내겐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할 텐데.
입을 열려는데 우서의 몸이 휘청했다. 이에 강지석이 우서의 몸을 마주 안듯 부축한다. 덕분에 우서의 얼굴이 그의 어깨에 얹어지고, 잔뜩 풀린 눈가가 훤히 보인다. 반사적으로 입가에 떠 있던 미소를 지운 채 표정을 바꿨다. 우서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줄 처연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다듬은 표정과 달리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온도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고백을 무기 삼을 수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우서를 부축해서 안아주느라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 강지석이 일순 화를 참듯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우서가 바로 옆에서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름대로 감정을 조절하려 애쓰는 듯했다.
-알아서 잘 들어갈 거라고. 우리가 뭐 어린애인 줄 알아?
“네 짝퉁이면 어때, 우서가 받아주기만 한다면야. 아니, 오히려 우서는 내가 더 편할 거야. 오랫동안 자기 마음도 알아주지 못한 너보다야.”
-형이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우서는 내가 챙겨.
우서만 없었다면 지금쯤 이를 갈며 내게 진심을 다해 대들었겠지. 오랫동안 절친이었다는 걸 빌미로 감히 우서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잘난 척 훈계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할 정도로 조급하고 초조할 텐데, 혼자 둘 수 없을 만큼 취해버린 우서가 그의 말을 막는 입마개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때, 우서의 흐릿하던 눈이 이쪽을 향했다. 나를 정확히 알아본 우서의 눈동자가 점차 커지고, 그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간다.
우서가 잘 볼 수 있도록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깊은 곳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처연하게, 애처롭게, 씁쓸하게.
“오늘 밤, 우서에게 고백할 거야.”
내 말은 조급함의 극치를 달려가던 강지석에게 초조함의 불씨를 집어넣어 활활 불타게 했다. 강지석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지고 있을지 상상하던 나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우서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보여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