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10. 강지건
우서의 감정 안에 날 깊이 박아 넣었다고 해서 그걸로 다 끝난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중요했다.
아무리 흔들어도 우서가 쉽게 떼어낼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흔들어야 했다. 기왕이면 확실하게.
* * *
“형, 미쳤어?”
강지석의 거친 목소리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담배를 입에 문 채 야경을 보던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그를 돌아보았다.
한민아의 집요한 연락을 받고 나갔던 강지석은 웬일로 돌아오자마자 우서가 아닌 날 먼저 찾아왔다. 그도 모자라 베란다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까지 확인한다.
성큼 다가온 강지석을 보며 그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뭔데 들어오자마자 난리야?”
베란다 문 쪽을 힐끔 바라보며 우서가 나오지 않았음을 확인한 강지석이 억눌린 거친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형이 민아 누나 이용했어?”
강지석의 말에 난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화가 난 강지석이 단번에 내 멱살을 틀어쥔다. 요즘 운동 좀 하더니만 멱살 쥐는 품새도 그렇고 힘도 제법이라 금세 목이 갑갑해졌다.
“말해 봐. 형이 누나 이용했냐고.”
“한민아가 그래? 내가 이용한 거라고?”
제대로 듣고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그러자 내가 여전히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한 강지석이 한층 거칠어진 목소리로 압박하듯 몰아붙였다.
“그때 백화점에서 누나한테 나 끌고 다니라고 문자 남겼던 거, 들어보니까 제대로 된 이유가 있었더라? 씨발,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형이 왜 그랬나 했지.”
“그때 대답하지 않았나? 별거 아닌 메시지였다고.”
“아니었잖아. 별거 아닌 메시지가 아니라 그게 형의 지시였던 거잖아.”
강지석의 우그러진 미간이 마치 펜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선명하다.
“누나가 가고 싶어 하는 회사 간부에 관한 정보의 대가였다며. 그래서 갑자기 학교까지 찾아왔던 거고, 우서 앞에서 일부러 날 끌고……!”
“오해하는 것 같은데, 지석아.”
일부러 여유로운 목소리를 내며 멱살 잡은 강지석의 손등 위에 내 손을 덮어 토닥였다.
“내가 한민아에게 뭘 부탁했건, 선택한 건 너야.”
“하…, 지금 인정한 거야? 민아 누나 이용한 거, 인정한 거냐고.”
“난 제안을 했을 뿐이고 한민아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 네가 한민아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처럼.”
강지석의 미간에 그려진 선이 좀 더 뚜렷해진다.
멱살을 잡은 손을 꽉 붙잡고서 그대로 떼어냈다. 셔츠의 볼품없이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매만져 펴며, 그새 재가 쌓인 담배 끝을 베란다 난간 위에 있는 재떨이에 툭툭 두드려 떨어뜨렸다.
“한민아가 널 붙잡고 끌고 다녔던 데에 응했던 건 너야. 한민아를 집에 불러들였을 때 눈치 없이 그 녀석 짐만 들어준 것도 너고, 손님 신경 쓴답시고 우서 앞에서 살뜰히 챙기던 것도 너지.”
강지석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갔다. 그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보며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자, 오늘따라 유달리 달콤한 연기가 폐부를 부드럽게 채워준다.
조금 더 자극해보면 이 연기가 마치 목구멍에 꿀을 그대로 흘려 넣은 것처럼 달아서 미칠 것 같지 않을까.
“한민아가 그 얘긴 안 해?”
“…무슨 얘기?”
달콤한 연기를 밤공기에 실어 흘려보내고서 씩 웃었다.
“우서와 키스하는 거, 봤을 텐데?”
“이……!”
강지석이 다시금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담배 끝을 재떨이에 처박은 내가 그보다 더 빨리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도 모자라 몸을 돌려 강지석을 밀고는 베란다 난간에 몰아붙인다.
“잘 들어, 강지석.”
이제까지와 다른 낮게 깔린 목소리로 강지석의 반항적인 눈을 마주 보았다.
“우서 마음도 모르고 그 앞에서 걔 마음 짓밟은 게 너야. 한민아가 내 사주를 받아서 움직였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어떻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게 아니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네 의지로 행동했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
목소리를 높이려던 강지석이 멈칫한다. 그러더니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의문을 표한다.
“우서 마음…이라니……. 형, 그게 무슨 말이야? 우서 마음이 왜…….”
멍청한 동생.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우서의 눈빛 하나 제대로 읽지 못했을까.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에 쥔 듯 너무도 선명히 알겠던데.
‘그리 달갑진 않지만, 알려줘야겠지.’
강지석이 평생 몰랐으면 싶기도 하지만, 확실히 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
“우서는 널 좋아하고 있었어, 지석아. 아주 예전부터, 어쩌면 네가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사실을 고스란히 알려줘도 강지석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일 뿐,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혹시라도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멍청한 동생을 위해 다시금 몰아붙였다.
“한 번이라도 우서를 제대로 보기나 했어? 우서의 눈이 언제나 누굴 향해 있었는지 알기나 해? 우서가 왜 날 밀어내지 못했던 건지 아냐고.”
감정적이 된 척, 억울한 척, 치가 떨리는 척.
“이젠 네 대용품 취급당하는 것도 그만하고 싶어.”
우서를 만나면서 부쩍 늘게 된 연기력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밤공기에 둘러싸인 강지석의 낯빛이 점차 어두워진다.
강지석의 멱살을 놔주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무것도 모르면 그쯤 해. 우서 희망고문하지 말고.”
난간에 기대어 선 강지석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혼란스러워했다.
그럴 만도 하지.
우서를 좋아하는 감정마저 그게 사랑인지 어린애 같은 애정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얼마나 더 알아듣겠어.
‘혼란스러워하면 할수록 좋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어렵사리 내리며 강지석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불안해하던 그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답답한 숨을 길게 흘린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우서가 나를…….”
숙였던 고개를 든 강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가슴이 따끔거렸다.
고개를 든 강지석의 얼굴은 아까의 어두움 대신 붉은 열기로 가득해져 있었다. 그게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딴 반응보다는 계속 혼란스러워하면 좋았을 텐데. 곤란하다는 얼굴로 당황하고 있으면 되는 건데.
‘괜찮아, 상관없어.’
강지석이 어떤 감정이든 솔직히 상관없다.
차라리 잘 된 거지.
강지석 역시 우서에게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게 확실해진 것이니만큼, 더 효율적인 이용이 가능하게 됐다. 그러니 가슴이 따끔거리든 말든 원 없이 이용하면 되는 거다.
가슴의 통증 대신 금세 짜릿한 희열이 차오른다.
* * *
[오늘 우서한테 고백할 거야. 형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
강지석의 문자를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났다.
단순한 강지석.
멍청한 내 동생.
사흘 전, 우서의 마음을 직접 알려준 뒤로 강지석은 꽤 집요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서는 다른 것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 그걸 미처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두 사람을 지켜보는 내게는 너무도 잘 보여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강지석은 애초에 우서를 좋아하고 있었다. 다만 그 감정은 농도 짙은 진득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소중한 친구.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절친한 녀석. 애인보다 더 가까운 애정하는 사람.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랑’이라 칭할 만한 감정은 강지석 본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커지다 못해 내 눈에도 훤히 띄기 시작할 정도였는데.
그래서 그 감정을 자각시켜주고자 우서의 마음을 알려주었다. 그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강지석은 그에 대한 미안함과 요동치는 감정의 폭풍에 그대로 노출되어 너무도 노골적으로 우서를 바라보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기 급급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꽤 즐거운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서가 예전 같았다면 그의 감정적 변화에 예민하게 굴었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내가 한창 휘저어둔 상태다. 당장만 해도 링의 해제와 내 고백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을 텐데, 강지석이 누굴 바라보고 있는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을까.
이때쯤이 딱 적당하겠지.
그런 마음으로 오늘 아침, 출근 직전에 강지석에게 불씨를 집어넣었다.
“이제 슬슬 제대로 작업 좀 쳐보려고.”
내 말에 딱딱히 굳어버렸던 강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시금 휴대폰 액정에 뜬 문자를 확인했다.
이렇게 문자로 경고하듯 통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강지석이 조급해하고 있다는 걸.
아무리 조급해도 강지석이 우서를 애지중지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름 성적이 중요한 그를 고려해 오늘 있을 시험이 끝난 후에야 말을 꺼낼 거다. 내가 아는 두 사람의 강의 시간표대로라면 마지막 시험이 끝날 즈음엔 이미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이겠지.
강지석은 술에 잘 취하진 않아도 큰 결심이나 고백이 필요할 땐 꼭 술기운을 빌리곤 한다. 그렇다면 시험이 끝나고 두 사람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