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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56화 (56/99)

56화

문가에서 떨어진 형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무표정한 형의 얼굴이 순간 무서워서 뒷걸음질 쳤다. 그럼에도 형과 나의 거리는 벌어지기는커녕 점차 더 가까워져 갔다.

물러나던 등에 서랍장이 덜컥 부딪쳤다. 고개를 돌리니 시간이 지나 조금 검붉게 물든 장미꽃들이 내 시야를 장악한다.

뒤가 막히는 바람에 피하지도 못하고 멈춰 서 있던 그 찰나에 형이 두 팔을 뻗어 내 몸을 감쌌다. 그러더니 숨을 삼킬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과 형의 떨리는 팔이 내 몸을 구속해,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우서야…. 우서야….”

형은 할 말이 많은 걸 억지로 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저 힘겹게 내 이름만 불렀다. 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얌전히 안겨 형의 셔츠만 그러쥐었다. 그러다 내 손 안에 선명히 구겨져 가는 새하얀 옷감이 마치 형의 감정처럼 느껴져, 흠칫하며 손을 뗐다.

“오늘…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어….”

가까스로 감정을 삼킨 형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이 나 때문에 못 자면 큰일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형이 천천히 날 떼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적으로 보인 형의 얼굴은 아까의 무표정하던 것과 달리 위태롭게 무너져 있었다.

형은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들어, 강지석과 나눈 메시지 일부를 보여주었다.

[오늘 우서한테 고백할 거야. 형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

예전 같았으면 당장에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기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저 메시지 안에도 강지석의 생각은 명백히 드러나 있다.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어린아이 같은 소유욕.

내가 원하던 것과 다른 얕은 감정.

날뛸 뻔했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기쁘지 않던 아까의 고백이 떠올라 오히려 심장에 통증이 부여된다.

“고백…받은 거지?”

형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물어왔다. 나는 입을 다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동시에 형의 입에서 가냘픈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 역시 그랬구나….”

형의 목소리가 너무도 쓸쓸하다.

“형….”

“잘 됐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형이 애써 웃는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형이 보인 조금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내게 향해 있던 감정을 그새 갈무리한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지석이도 네 마음과 같은 거잖아. 정말 잘 됐어. 이제 대용품은… 없어도 되겠다.”

형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여전히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기 바쁘다.

“사실은 네게 고백할 게 있어.”

“…뭔데요?”

형은 감추려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떨림은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가슴이 먹먹하고 술기운이 올라있는 머릿속이 위험한 경고를 보내듯 쿵쿵 울린다.

“링을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어.”

형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커넥터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언제든 우리의 링을 가져가 줄 수 있는…….”

“링을 해제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들었어요?”

이젠 형보다도 내 목소리가 더 떨렸다. 정확히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내 어깨도, 내 손끝도, 내 시야마저 떨리고 있다.

형이 정말 커넥터를 찾아낸 거라면 모를 수가 없다. 링을 해제했을 때 돌아올 부작용을.

미소 짓고 있던 형의 입꼬리가 나만큼이나 떨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응.”

머리의 지끈거림이 한층 심해졌다.

형도 알고 말았다. 언젠가는 말해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이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다.

“해제한다고 해서 크게 지장 가는 건 없을 거야.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지. 불면증 없는 예전으로. 그게 다야.”

“거짓말하지 말아요.”

커넥터라는 명칭을 알고 있다. 형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그의 반응만은 내게 감추지 못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요동치는 감정을 끝자락부터 흘리기 시작했다.

“이미 다 알잖아요. 커넥터를 찾았으면 모를 리가 없잖아….”

“우서야, 무슨…….”

“기억을 잃게 되는 것도 다 아는 거잖아요!”

참지 못하고 감정을 터뜨렸다. 망할 술 때문에 도통 감정이 절제되지 않았다.

“형도 나도, 우릴 서로 잊게 된다고요.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다고…….”

“…….”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형은 이미 링의 해제가 가져올 부작용을 확실히 알고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할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내 어깨를 움찔하게 했다. 그 목소리는 조금 전의 애써 웃는 느낌도 아니었고, 그 이전의 떨림 가득한 위태로움을 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손을 내려 눈을 드니, 초조함과 괴로움으로 무너진 형의 얼굴이 보인다.

“네가 그토록 힘들어했던 짝사랑이 끝났어. 이제 넌 지석이와 원하던 나날을 보내며 살게 될 텐데, 더 이상 내가 걸림돌이 될 순 없잖아.”

형이 왼손을 보란 듯 들어 올렸다. 자연스레 그의 약지에 자리 잡은 붉은 링이 보인다.

“걸림돌은 치워야지, 우서야. 기왕이면 깔끔하게… 치워야 하는 거잖아.”

형은 자신을, 그의 감정을 걸림돌이라 칭하며 웃지도 못한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난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싶지 않아. …해제하자.”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요!”

울컥해서 언성을 높였다.

“형 감정이 그렇게 가벼운 거였어요? 내가 강지석한테 고백받았다는 것 때문에 링을 해제하자고?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기억도 다 잃는데, 그런데도 해제하자고요?!”

“그래!”

형의 목소리 또한 크게 터져 나왔다.

엉망이 되어 흐트러진 얼굴로 형이 뒤로 천천히 물러난다. 나와의 거리를 벌려가는 형의 모습을 보며 나는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는 못 견딜 것 같아. 지금도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그보다 더한 걸 어떻게 견뎌.”

형의 낮은 음성이 처연하게 떨리고 그 역시 나처럼 눈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술 때문에 억제하지 못한 감정이 차오른 나만큼이나 형 역시 태연한 척 참을 수는 없는 듯 보였다.

“너에게도 그게 맞는 거야. 나 같은 건 잊고 지석이만 바라보면 돼.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거의 문 근처까지 뒷걸음질 쳐 확연히 거리를 벌린 형이 숨을 골랐다. 어떻게든 표정을 다듬어보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마저도 힘든 듯 번번이 무너진다.

“…해제하자.”

형의 입술을 타고 그 스스로의 목을 옥죄는 듯한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싫어요….”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형이 굳은 얼굴로 시선을 마주한다.

“아직은… 싫어요….”

눈가가 달아오르고 목구멍 아래에 뭔가가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뭐라고 말해야 형이 해제하자는 말을 하지 않게 될까.

참 웃기게도, 링을 해제하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녔던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런 내가 링의 해제법을 알았음에도 싫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형이 링을 해제하자고 말하는 걸 막기 위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마비될 것 같다.

“강지석과 저는…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친구예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고백을 받은 건 맞아요. 맞는데… 대답하지 않았어요….”

왜 이런 걸 솔직하게 다 얘기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신없는 내 머리는 이게 형의 말을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말을 내뱉는 동안 내 눈가의 열기는 점차 강해져만 갔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가고 물기가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강지석의 허술한 고백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던 바보 같은 나를 이처럼 내 입으로 드러내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분명히 강지석을 좋아하는 게 맞는데…….”

울컥한 감정이 자꾸만 목을 막히게 했다. 지금도 내가 이상하다. 까짓거 좀 가벼운 감정이면 어때.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동안 쌓아온 짝사랑의 죄책감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건데.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내 짝사랑의 죄책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내게 뻗어있는 다른 이의 감정에 대한 죄책감이 가득 채우고 말 거라는 걸.

형과 나에게 정말 필요한 건 링의 해제가 가져올 기억 상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죄책감도, 이런 묵직하고 괴로운 감정도 모두 사라질 텐데.

“왜 난 바보같이 그걸 밀어냈는지 모르겠어요. 자꾸… 강지석에게서 형을 찾게 되고…….”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석에게서 타인을 찾으면 안 되는 건데.

“우서야….”

목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 거리를 벌렸던 형의 발끝이 앞으로 내뻗어지는 게 보였다. 물기 서린 눈을 들어 형을 바라보자, 그의 애처로운 얼굴에 일말의 기대감이 서려 있다.

“넌 그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어.”

형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떨었다. 내 주변에 희미하게 퍼져있던 검붉은 장미꽃의 향기가 날 휘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 더 다가온 형의 손끝이 내 볼을 감쌌다. 너무 꽉 쥐어서 열이 오르고 손톱자국까지 박혀 있는 형의 손이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다.

“내게도 아직 기회가 있는 거면… 피하지 말아줘.”

떨리는 손끝만큼이나 조심스레 다가온 형의 눈동자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까워진 서로의 숨결이 곧 뜨겁게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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