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설마 들은 건… 아니겠지?’
베란다에 있는 사람 실루엣이 형이라는 건 분명했다. 집에는 형뿐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거나 우리의 대화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파트 단지의 가로등 불빛이 제아무리 환해도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선 형이 우리를 또렷이 분간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만약 우리인 줄 알아챈다 하더라도 거리 때문에 대화는 절대 들릴 리가 없다.
‘형은 못 들었을 거야.’
강지석에게 고백받은 순간보다 더 떨리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안도하고자 했다. 그때마저 강지석은 내 마음도 모르고 또 흔들려고 작정을 한다.
“우서야, 난 정말……!”
“그만해!’
머리도 가슴도 터질 것 같아서 큰소리를 쳤다.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자꾸 네가 뭔가에 떠밀리듯 거짓말하는 것 같고…, 내일이면 장난이었는데 그걸 믿었냐고… 비웃을 것 같아.”
속으로만 생각하려 했던 게 내 입을 통해 줄줄 흘러나왔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말을 들어 놓고 그걸 내 입으로 부정하고 있다니, 스스로가 이해되질 않았다. 그냥 감격에 차서 마주 안으면 되는 것을 난 왜 이렇게 강지석의 말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려 드는 걸까.
강지석의 얼굴이 초조하게 변해갔다.
“갑작스러운 거 맞아. 맞는데… 진심이야. 믿어줘.”
사실은 알고 있다. 강지석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마음을 갖고 이토록 진지한 장난을 치진 않을 거라는 걸. 만약 이게 정말 장난이라면 내가 강지석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우리의 관계는 어색해지다 못해 당장 내일부터 거리를 두게 될 거다. 그건 기나긴 시간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내온 우리 사이가 하루아침에 산산이 조각난다는 것과 같았다. 그것만은 나도 강지석도, 서로 가장 무서워하는 부분이 아닐까.
그걸 알면서도 이런다는 건 강지석의 고백이 진실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언제…부터?”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며칠 전의 내가 떠오른다.
그 날도 난 지금처럼 열에 취해 있었다.
형의 고백을 듣고 지금과 같이 장난인 게 아니냐며 부정하다가 언제부터 날 좋아했는가를 물었다. 지금은 술 때문이고 그땐 감기 때문이었지만, 열 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필 그럴 때 불쑥 다가온 강렬한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고 뜨거웠다. 오늘도, 그날도.
너무나 닮은 형제라서 그런가. 어쩌면 이렇게 오버랩되는 순간이 많은 건지.
강지석에게 지건 형의 모습이 덧씌워진다.
그때 형은 뭐라고 했더라.
“내 마음을 인식한 건 네가 고3일 때였어. 하지만 좋아하게 된 건 훨씬 이전부터였을 거야.”
왠지 형과 같은 얼굴로 강지석도 같은 말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친 듯 요동친다.
“모르겠어.”
요동치던 게 무색할 정도로 강지석의 머뭇거리는 음성은 아무 맛이 없었다.
“난 그냥… 널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줄 알았어. 근데 요즘엔 그게 아니야. 자꾸 형이 네게 다가가는 걸 보면서 이제껏 가져본 적 없는 질투가 차오르고, 형이고 뭐고 어떻게든 네게서 떼어놓고 싶어 미치겠어.”
뭐지?
“네가 나만 봤으면 좋겠어. 언제나 나만 보고 내게만 웃어줬으면 좋겠어.”
뭐가 다른 거지?
“우서야…, 좋아해.”
강지석의 목소리는 애절할 정도로 흔들리며 그 어떤 것보다 달콤했다. 말에서 느껴지는 나를 향한 소유욕도 만족스러울 만했고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날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하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뭔가 부족한가? 아니야, 부족하다기보다는 좀 이상한데…….
그 이유는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강지석의 말 속에는 왜인지 지건 형이 들어있다. 지건 형이 나와 가까워지는 것 때문에 질투를 하고 떼어놓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고선 한다는 소리가 내가 그만을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건 너무하잖아.’
차라리 대놓고 날 거절하는 게 덜 아플 것 같다.
강지석은 어린아이 같은 녀석이다. 내게도 자주 듣는 소리였지만 다른 친구들에게도 종종 듣는 게 정신연령이 낮다는 얘기다. 물론 우스갯소리에 가깝긴 하나, 쓸데없이 어린애 같을 때가 자주 있어서 튀어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도 강지석은 어린애처럼 굴고 있다.
그는 그저 가장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게 싫은 거다. 아끼는 장난감을 누가 빼앗아갈까 봐 경계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러니 무작정 자기감정을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몰아붙이는 거지.
언제나 그만을 바라보던 내게 웃기게도 자신만 바라보라는 말을 내뱉으면서까지.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강지석이 내게 불쑥 고백한 게 상당히 충동적임과 더불어 그 감정의 깊이가 상당히 얕다는 것을 말이다. 아끼는 물건을 뺏길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정도의 얕고도 얕은 감정.
그러니 날 언제부터 좋아했냐는 질문에 모르겠다는 대답을 하지.
나도, 지건 형도, 상대를 언제부터 좋아했었는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상대를 바라봐온 시간이 길었고 확실했으며 감정의 깊이 또한 깊었다.
사실 난 이 순간에 고민할 게 없었다. 충동적이면 어때. 감정의 깊이가 얕으면 어때.
강지석이 날 좋아한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렇게라도 날 좋아해 주고 내게 집착해준다면 된 거잖아. 오랫동안 괴롭게 가슴을 갉아 먹던 짝사랑이 드디어 끝날 수 있게 되는 건데 문제 삼을 게 대체 뭐가 있어, 그저 기뻐하면 되는 거지.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괴로워진다.
퇴고되지 않은 어느 작가의 원고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이 날 거슬리게 했다. 왠지 순수하지 못한 감정을 맞닥뜨린 것 같아, 그 깊이만 가늠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내 입으로 강지석을 밀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밀어내야 한다고 마음먹어도 내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오는 건 그것과 다를 거다. 그렇다고 강지석을 향해 웃어주며 나 역시 네 마음과 같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건 겁이 난다기보다, 그동안 힘들어한 내 마음에 미안함이 들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내 마음과 저 마음의 무게가 같을 수가 있어.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알아. 나도 알아…. 내가 너무 몰아쳤지. 미안해.”
강지석의 손이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감촉은 분명 지건 형과 닮아있었고 자연스레 형이 떠올랐지만, 이상할 정도로 어색하다.
“대답은 천천히 해줘도 돼. 난 그냥 내 감정을 네가 알아줬으면 했을 뿐이야.”
강지석이 조심스럽게 날 끌어안았다. 그에게 안기며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시선을 돌렸다.
아파트 베란다에 있던 사람 실루엣은 어느새인가 사라져 있다.
* * *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조금 가시던 취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눈앞이 흐릿하고 정신이 몽롱하다.
욕실 안에서 가까스로 편한 옷을 챙겨 입고 세면대를 짚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니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이 반쯤 풀려 있는 내가 보인다. 예전 같았으면 이대로 쓰러지듯 잠들었을 텐데, 이토록 버티고 있는 걸 보니 진짜 신기하긴 하다.
물기 묻은 앞머리 끝을 타고 물방울이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그걸 따라 시선을 돌리다 보니 세면대를 짚은 손에 보란 듯이 자리한 붉은 링이 보인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지건 형의 얼굴.
‘형….’
사실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형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아까 씁쓸히 돌아서던 형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지석이 자꾸만 날 졸졸 쫓아다니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내 눈치만 보며 바짝 붙어 다니니 너무도 신경이 쓰였다. 그런 상황에 대뜸 형을 찾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특히나 강지석은 왜인지 형을 질투하고 있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형과 서로 살갑게 대한 게 있다고는 해도 사실 날 빼앗겼다고 생각할 만큼은 아니었을 텐데. 형 방에서 지냈던 게 그렇게나 거슬렸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울컥한다.
바보 같은 강지석. 사람 마음만 복잡하게.
몸을 돌려 욕실 문으로 향했다. 형은 우리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함에도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나와보지 않았다.
애가 탔다. 형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 감히 내가 가늠할 수도 없고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형이 그 방 안에서 혼자 쓸쓸히 있을 걸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아프게 눌리는 기분이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문을 열어보았다. 아까만 해도 서성거리던 강지석이 어째 보이질 않는다.
순간 욕실의 따뜻한 기운과 달리 찬기가 훅 끼쳐와서 머리가 어질했다. 문가를 짚으며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내 어지러운 시야 너머로 강지석이 보인다.
그는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은 얼굴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나 다름없다.
‘머릿속도 어린아이지, 넌.’
평소에는 그리도 좋던 저 얼굴이 지금만은 그렇질 않다.
잠든 강지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욕실 옆에 자리한 내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다른 곳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굳게 닫혀서 열릴 줄 모르던 지건 형의 방문이 열렸다. 뒤이어 활짝 열린 문으로 형이 성큼 걸어 나왔다.
내 흐린 시야 속으로 불쑥 다가온 형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예상하던 쓸쓸한 표정도 찾아볼 수가 없고, 그렇다고 평소의 상냥하던 얼굴도 아니었다.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게 된 형이 내 앞으로 다가와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그러더니 말없이 그의 방으로 끌고 간다.
놀란 나머지 혹시라도 소리가 나올까 봐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잠든 강지석이 깰까 봐 발소리마저 조심했다. 다행히 강지석은 내가 형의 방에 끌려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형 방에 밀어 넣어지자마자 달칵,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