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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54화 (54/99)

54화

내가 술김에 잘못 들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강지석도 기어코 취한 걸까.

“…무슨 뜻이야?”

내가 이해한 게 맞아?

네 말에 담긴 의미, 내가 이해한 게 맞냐고.

내 앞에 있는 굳센 눈가가 바르르 떨리고 그 안의 눈동자가 고민하듯 수없이 흔들린다.

강지석이 격앙된 감정으로 점철된 말을 이으려던 찰나.

잘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 어느새 우리가 탄 택시는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강지석의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그를 밀어내고 택시 밖으로 뛰쳐나왔다. 뒤에서 날 부르는 강지석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도 않고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걷고 또 걸었다.

혼란스러워서 무작정 겁이 났다. 강지석이 뭐라고 말하려는 건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와 달리 숨이 막힐 정도로 뛰어대는 가슴은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는다.

차라리 술김에 잘못 말한 거라고 해줘. 내가 바보같이 잘못 이해한 거라고 말해달란 말이야.

하지만 뒤따라 달려온 강지석은 내 기대를 철저히 부숴버렸다.

“너, 나 좋아하잖아.”

숨 가쁘게 뛰던 심장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덜컥 멈춘 느낌이다. 비틀거리긴 해도 나름대로 빠르게 나아가던 다리도 멈춰버리고, 그도 모자라 힘이 풀린 것처럼 쓰러질 뻔했다. 뒤에 바짝 다가서 있던 강지석이 뒤에서 끌어안아 주지 않았더라면 무릎부터 땅에 닿았을 것이다.

“나 좋아하는 거잖아, 우서야.”

머릿속이 강지석의 말로 가득 차다 못해 요란하게 울려댔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해주면 현실을 회피하긴커녕 도망도 못 가게 끌려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된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대체 언제부터?

물어야 하는데 가쁜 숨을 토하기 위해 벌려진 입술 사이로는 말 한마디 나오지 못했다.

가늠할 수 없는 공포가 몰려와 몸이 떨렸다.

‘강지석이 알았어. 강지석이……. 난…, 난 어떻게 해야…….’

강지석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내게 혐오감을 느낄까. 벌레처럼 생각하며 경멸하게 될까. 아니야, 강지석이라면 친구로서의 정을 생각해서 곤란한 듯 웃어주겠지. 마음만은 고맙다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그렇게 점점 거리를 두다가 나중에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머릿속에는 온갖 부정적인 예측이 난무하고 그 끝에는 언제나 강지석과 멀어진 내가 있었다.

내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혹시라도 언젠가 강지석이 이상하게 눈치 빠른 날이 있어,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응당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널 좋아해…?”

둔한 혀를 어렵사리 움직여 제법 또렷한 말을 뱉었다. 뒤에서 날 끌어안아 부축하는 강지석을 강하게 밀어내고 단호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친구로서라면 맞아…. 근데 그 이상은 아니야.”

술이 확 깬다는 느낌이야말로 진짜 이런 건가 보다. 몸은 위태롭게 휘청거려도 강지석을 바라보는 내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를 향한 목소리와 발음도 어떻게든 확실히 말하기 위해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덕분에 물러터진 머릿속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것 같았다.

실수하면 안 돼.

알고 있잖아.

“착각…하지 마.”

그래. 착각하지 마, 신우서.

강지석이 널 친구 이상으로 볼 일은 없으니까, 절대 착각하지 말라고.

5년간 그래왔지만, 이렇게 다짐할 때마다 가슴이 참 아프다. 저릿한 가슴을 움켜쥐기 위해 손이 올라가려는 걸 가까스로 억누르고 목소리도 떨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일말의 흔들림이라도 보였다가는 그의 말을 진실이라고 보여줘 버리는 꼴이다.

다행히 강지석은 내 말을 믿는 건지, 곤란한 얼굴로 눈꼬리를 내렸다. 내려가다 못해 안쓰럽게 처진 꼴이 된 그의 눈가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래…. 내 착각이었구나….”

막힌 숨이 트이는 안도감과 함께 가슴의 저릿함이 한층 거세졌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동안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했던 상황임에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최소한 이러는 게 그에게 거절당하는 것보다 낫겠지. 강지석에게 직접적으로 거절당하고 밀려나면 그거야말로 견딜 수 없을 거다.

‘잘한 거야.’

아프게 울리는 가슴을 달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어질 강지석의 반응이 정말 다행이라는 얼굴로 화사하게 바뀐다 해도 내 감정의 날것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랬는데…….

‘왜 그런 얼굴이야.’

강지석의 얼굴은 곤란함을 넣어 착잡함으로 바뀌어 갔다. 언제나 고민 따윈 전혀 없어 보이던 해맑은 얼굴은 어디 가고, 지금 내 앞에 선명히 남아 있는 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처연한 얼굴이다. 마치 지건 형을 따라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맞아. 형….’

순간적으로 지건 형이 돌아가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선 자리는 아파트 입구와 그리 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역시나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인다.

“우서야.”

갑자기 두 팔이 붙잡힌다. 몸도 돌릴 수 없게 붙잡혀 시선을 돌리니, 아까의 고민 가득하던 낯빛 대신 한없이 진지한 얼굴이 눈앞에 멈춰 섰다.

“술 취했을 때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지금 해야겠어.”

강지석의 목소리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게 술기운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게 술을 들이부었음에도 강지석은 오늘 이상할 정도로 멀쩡하다. 아마 메시지를 쓰게 한다면 진짜 취했을 때와 달리 오타 한 번 나지 않을 것이다.

강지석의 목소리 떨림만큼이나 유독 긴장한 것 같은 그의 손아귀가 날 벗어날 수 없도록 강하게 붙잡는다.

“좋아해, 우서야.”

선뜻 이해하지 못해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오늘 강지석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다. 이번엔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아니면 날 테스트하는 중인가? 내가 사실을 실토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멋대로 지껄이는 거냐고. 내 연기가 그렇게 부족했어?

입술을 아프게 다물다가 어렵사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장난치지 마…. 장난치지 말라고, 강지석….”

“장난 아니야.”

“장난이 아니면 뭔데? 내가 지금… 술 좀 취한 건 인정하는데…, 이런 거 웃어넘길 정도는 아니거든?”

아니야, 말을 잘못 했어.

그냥 태연하게 웃으면서 장난치지 말라고 해야 했는데, 너무 진지하게 답해버렸다. 지금이라도 표정을 바꿀까? 실없이 웃으면서 재미없는 장난은 안 치느니만 못하다고 말하면 될까?

온갖 것들로 꼬여버린 머릿속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빌어먹을 술이라도 안 마셨으면 머리가 좀 빨리빨리 돌아갈 텐데, 진짜 미칠 노릇이다.

“웃어넘기지 마.”

강지석이 입술을 떨며 내 시선을 붙든다. 그럼에도 내가 자꾸만 외면하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날 끌어당긴다.

입술에 뜨겁고 말랑한 것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비벼지던 살결이 입술을 간지럽히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내 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벌어져 있던 내 입술을 약간의 타액 품은 더 뜨거운 것이 할짝이다가 숨결을 따라 하듯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

깜짝 놀라 어깨를 크게 떨자, 강지석의 입술이 움찔하며 떨어진다. 술김이 뒤늦게 올라온 사람처럼 그새 잔뜩 붉어진 얼굴의 강지석이 눈가를 떨며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딱딱히 굳어버린 나와 시선을 맞춘다.

“이런 거… 절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서는 이것만이 방법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강지석의 눈동자는 나와 닮은 특별한 감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좋아해. 정말 좋아한다고, 신우서.”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또렷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무릎 뒤를 강하게 때린 것처럼 다리가 훅 꺾였다. 강지석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아 지탱해준다.

“이렇게 고백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후회 섞인 목소리로 착잡한 감정을 내게 흘려 넣는다.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내가 술 취했으니까 막…, 그냥 막 던지는 말 아니야?”

“설마 그러겠어? 아무리 취해도 다 기억하는 넌데.”

“그런 게 아니라면 대체 난 지금까지 왜……!”

억울함과 고조된 감정이 차올라 목구멍을 타고 터져 나왔다.

강지석이 진짜 날 좋아하는 거라고? 거짓말도 아니고 장난인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넌 여자… 좋아하잖아. 민아 누나 좋아하잖아….”

직접 입을 통해 말을 뱉고 나니 액체처럼 흐물거리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다. 강지석의 팔을 빠져나와 그와 거리를 두었다.

“예전부터 여자만 좋아했다며. 너, 3월에도 너한테 고백하던 남자 후배한테 남자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맞아. 그랬어.”

“사귈 거라면 여자가 좋다며. 남자는… 싫다고 했잖아.”

강지석의 눈이 내리깔린다. 그의 입에서 또다시 ‘맞아’라는 두 글자가 흘러나온다.

다시금 그가 날 갖고 장난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울컥하는데.

“근데 넌 달라. 성별 그딴 걸 떠나서, 넌 나한테 아주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야.”

언젠가 꼭 강지석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왜 지금 흘러나오는 건지.

“내가 왜 민아 누나를 좋아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좋은 누나 동생 사이일 뿐이야. 네 오해라고.”

한숨 섞인 강지석의 말이 날 뒤흔들고 또 뒤흔든다.

그만 흔들어, 어지러워 미칠 것 같으니까.

“나한텐 너밖에 없어.”

제발 그만 흔들라고.

설렘을 넘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충격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게 만들었다. 갑자기 다가온 강지석의 감정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날 야금야금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그때,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감정과 얼굴의 열기를 느낀 나는 어째서 고개를 돌린 걸까.

왜 내 시선은 당연한 것처럼 형이 있을 곳을 바라봤던 건가.

그리고 왜 하필 그때… 베란다에 형이 나와 있었던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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