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강지석의 짧은 말은 내가 억지로라도 고개를 들게끔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어지러운 시야 속, 강지석의 옆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굳어있는 것 같았다.
“아까 문자 했잖아. 술 먹고 들어간다고.”
나 못지않게 술을 잔뜩 먹었던 녀석인데, 어째 목소리도 또렷하고 혀도 둔하긴커녕 팔팔하다.
단단한 기둥처럼 서 있는 강지석을 붙잡은 채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건 형이 내게 건 전화라고 생각하니 자연히 내놓으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내 전화인데 왜 네가 받아…. 내놔….”
조금 어눌해진 발음으로 휴대폰을 달라고 해봤지만,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척 고개를 돌려 손을 피해낸다.
“데리러 안 와도 돼. 우리 2차 갈 거야. …안 들어갈지도 몰라.”
강지석이 뜻 모를 말을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쓰러질 것 같다며 술집을 나가자던 게 강지석이었는데, 나도 모르는 2차를 대체 언제 계획했다는 건지.
2차까지는 그렇다 쳐도 집에 안 들어갈 수는 없다. 나 때문에 형까지 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하는 건 계약에 어긋난다.
휴대폰을 재차 빼앗으려다가 멈칫했다.
‘계약….’
굳이 형과의 계약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잠이 필요하다. 그러니 형에게서 더 이상 강지석을 찾지 않게 된 지금, 그런 계약이 무슨 소용이며 일일이 신경 쓸 필요가 뭐 있을까.
휴대폰을 뺏을 것처럼 들고 있던 손을 힘없이 툭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몸이 한 번 크게 휘청거린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있던 강지석의 눈이 나를 향하고, 지탱해주기만 하던 팔이 내 몸을 휘감아 안는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강지석에게 마주 안긴 채 흐릿한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내가 안긴 사람이 누구인지 자각하고 나니 술김에 울리던 머리가 더 거세게 울린다. 쿵쿵, 정신 사나울 정도로.
“알아서 잘 들어갈 거라고. 우리가 뭐 어린애인 줄 알아? 형이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우서는 내가 챙겨.”
강지석의 냉담한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우서는 내가 챙겨’라는 말이 뭐라고, 저 차가운 목소리에도 가슴이 뛰어서 어질어질하다. 끌어안은 채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 때문에 자꾸 이대로 눈을 감고 싶게 만든다.
술에 취해서 움직일 힘도 없는 척 가만히 있었다.
이제야 조금, 머릿속에서 형이 지워져 간다. 날 좋아한다던 사람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이용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대로 잠들면 좋겠다.’
서 있는 상태이고 길거리이긴 하나, 이렇게 따뜻하고 설레는 기분으로 잠들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드는데.
“……!”
우리가 있던 술집 옆 골목에 낯익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재차 눈을 감았다가 뜨며 시야를 좀 더 또렷하게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자, 그제야 상대가 확실히 보인다.
검은 정장 차림에 말끔히 올린 앞머리, 강지석과 닮은 얼굴의 누군가가 휴대폰을 든 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냥 형 먼저 자. 우리 기다리지 말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설레던 강지석의 목소리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뀐 것 같았다. 그건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기보다, 그걸 듣는 내 상태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도,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맞닿은 가슴도, 이젠 단순한 촉감에 지나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그리도 흐렸던 시야인데, 지금은 지독할 정도로 또렷하다. 왜인지 아픈 듯 일그러져있는 형의 미간이 이 거리에서마저 너무 잘 보인다.
형의 입술이 달싹인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건 휴대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강지석을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해서라는 걸.
문장을 만들 것처럼 달싹거리던 형의 입술이 다물린다. 미간이 좀 더 구겨지고 입술이 꾹 다물려 처연한 씁쓸함을 흘린다.
남은 건 형의 애처로운 쓴웃음뿐.
“어, 알았어.”
통화를 끝내는 순간까지도 차가운 목소리던 강지석은 그제야 날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잘 서 봐. 못 서겠으면 업어줄까?”
평소와 다름없는 한없이 살갑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보다 내 시선 끝에 아슬아슬 매달린 형의 모습이 더 신경 쓰였다. 통화 끊긴 휴대폰을 힘없이 내리며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형의 모습은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형은 강지석에게 안겨 있는 날 보며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순간 형의 모습 위로 내가 덧씌워진다. 형이 선 자리에 내가 서고, 지금의 내 위치에 민아 누나를 세워 본다.
민아 누나를 마주 안고 있는 강지석, 그리고 그걸 씁쓸히 바라보고 있을 나.
시선을 떼고 어렵사리 돌아서는 지건 형의 등이 마치 나처럼 보인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틀어 잡힌 듯 아파지고 시야가 흔들린다. 날 지탱하고자 이젠 두 팔로 부축하며 안으려는 강지석을 강하게 밀어냈다. 마주 안았던 몸은 떨어졌으나, 휘청거리는 내 팔은 강지석에게 단단히 붙잡혔다.
“야아, 갑자기 왜 그래?”
“좀… 떨어져 봐….”
“혼자 서지도 못하잖아. 부축해줄 테니까……!”
“떨어지라고!”
이상한 감정이 격해져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지나가는 몇 사람이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시선은 형이 몸을 돌려 들어가 버린 골목에 닿은 채 멈춰버렸다.
곧 형이 들어갔던 골목에서 검은 차량 한 대가 빠져나왔다. 대로변으로 나와 내게서 등을 돌리듯 방향을 꺾어 멀어지는 뒷모습이 너무도 익숙하다.
“너…, 괜찮아?”
멀어져가는 형의 차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는 동안, 걱정스러운 얼굴의 강지석은 날 억지로 부축해 세웠다. 비틀거리는 몸이 녀석에게 닿아 점차 차분해져 간다.
“…집에 갈래.”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돌렸다. 보통은 집까지 걸어가거나 버스를 탔겠지만, 아직도 형의 뒷모습이 잊히질 않아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보다 빨리 집에 도착하기 위해선 택시만 한 게 없어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무작정 팔을 휘저었다. 뒤에서 강지석이 끌어안다시피 해서 당기고는 자기가 잡겠다며 진정하라고 난리다.
진정하겠냐고. 형이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가버렸는데.
술이라는 건 참 무섭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며칠간 안간힘을 썼던 형의 감정에 이토록 맥없이 동요하게 된다. 복잡했던 머릿속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화되어, 당장 내 눈앞에서 어렵사리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형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알았어, 택시 잡아줄 테니까 진정해.”
무의미하게 팔을 휘젓는 나를 붙든 강지석이 짧은 한숨과 함께 차도로 손을 뻗었다. 내가 그렇게 휘저을 땐 멈추지도 않던 차가 강지석의 손짓 한 번에 바로 멈춰 선다.
택시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나는 지친 듯 늘어져서 얌전히 숨을 골랐다. 형을 목격한 뒤로 그나마 돌아오던 정신은 택시 좌석의 편안함으로 인해 또다시 말랑해져 갔다. 그런데도 형의 마지막 모습만은 아직도 선명해, 눈을 꾹 감을 수밖에 없었다.
“졸려?”
옆에서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깨에 상냥한 팔이 둘리고 조심스러운 손길에 의해 내 머리가 강지석에게로 기운다. 머리가 닿은 어깨와 가슴팍의 경계로부터 강지석의 조금 빠른 박동이 느껴진다.
“졸리면 자도 돼.”
어깨를 토닥이는 손이 너무도 다정하다.
흠칫하며 눈을 뜨고는 날 붙잡고 있는 강지석을 밀어냈다. 눈에 보이는 건 지건 형처럼 미간을 찌푸린 의아한 얼굴이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강지석이 다정하게 대할 때마다 형이 생각난다. 형의 미소, 형의 목소리, 형의 체온이 떠올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그걸 잊고자 마신 술인데, 어째서인지 더 또렷해진다.
“왜 그래?”
강지석의 얼굴 여기저기에 의문이 가득하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고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문으로 바짝 붙어 거리를 벌리기가 무섭게 내 팔을 꽉 잡아 끌어당긴다. 떨어진 것보다 훨씬 가까워진 몸만큼이나 그의 얼굴 또한 바짝 가까워진다. 시야가 흐린 탓인지, 강지석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볼품없이 흐트러져 있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강지석의 질문에 곧장 고개가 저어졌다. 강지석은 아무 잘못도 없다. 잘못된 건, 애초에 나 하나였을 뿐.
“그럼 왜 그러는 건데?”
“내가… 뭘…….”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어물거리자, 강지석이 내 턱을 붙잡아 돌려 강제로 그를 바라보게 한다.
“왜 자꾸 밀어내? 왜 자꾸 피해?”
강지석의 미간이 아플 정도로 구겨진다.
내가… 강지석을 피하고 있었던가.
막상 말로 만들어져 다가오니 가슴이 철렁했다. 부정하고자 고개를 저어보지만 내 입에서는 어떠한 말도 나오지 못했다. 강지석에게서 연거푸 시선을 돌리고 밀어냈던 건 명백한 나였다.
차가워진 얼굴의 강지석이 형을 연상케 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반칙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