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09. 신우서
“시간 됐다. 다들 답안 제출해.”
교수의 말에 따라 그때까지 프로그래밍 언어로 가득 차 있던 화면에서 눈을 떼고 가장 하단 구석에 있는 ‘답안 제출’ 버튼을 클릭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작은 알림창이 뜸과 동시에 테스트 창이 사라진다.
컴퓨터의 시스템 종료를 누르는 순간까지도 복잡한 머릿속은 도무지 나아지질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시험에 쏟을 신경을 한 가지 생각에 몰아넣을 수 있게 되어서 더 문제가 되었다.
화면이 꺼지면서 검게 변해 버린 모니터가 검은 도화지처럼 보인다. 그 위에 그려지는 것은 너무도 선명한 지건 형의 얼굴.
“너무 좋아하게 돼버렸는데… 어떡하지, 우서야.”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동안 바보같이 형의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뭉뚱그린 생각과 제멋대로인 판단만 앞세워 이럴 거다, 저럴 거다, 좋을 대로 판단해왔지.
‘형한테 너무 미안해.’
고백을 들은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형에게 매일 미안해서 도무지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형과 나의 관계 위로 나와 강지석을 덧씌워보았다.
끔찍해.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의 짝사랑 상대를 연기해줘야 했다니. 나라면 절대 못 할 일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그런데도 형은 미안해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나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그러니 제발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단다.
‘어떻게 그래요, 형.’
내가 형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데 그걸 모른 척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하루 내내 형 생각만 하다 보니 그야말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왼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다가 버릇처럼 약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선명한 한 줄의 링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링은… 어떻게 하지….’
링을 해제하고 서로 기억을 잃게 되면 이렇게 고민할 일도 없지 않을까.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고, 강지석을 통해 고작 인사 정도만 까딱이는 정도가 된다면 이렇게 머리 아플 일도 없을 텐데.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형에게 링의 해제로 인한 기억 상실에 대한 것도 털어놓아야 하는데 내가 그 말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형을 잊더라도 괜찮을 수 있을까.
“시험 잘 봤어?”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옆에서 불쑥 강지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내 틀에 박힌 대답보다도 그의 손이 먼저 내 이마에 닿는다.
“야, 너 괜찮아? 열은 다 내린 것 같은데…….”
예전 같았으면 이런 손길에 설레서 벌써 얼굴이 달아올랐을 텐데, 지금은 그런 감정의 동요마저 생기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이 없다.
“괜찮아. 시험이 좀 머리 아프게 나왔네.”
“그치?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어. 그래도 넌 딱히 시험공부 안 해도 학점 좋으니까 내가 걱정이 없다.”
강지석이 헤실거리며 내 가방을 대신 들어준다. 시험 때문에 고생했으니까 이 정도는 자기가 해주겠단다. 그 시험을 나뿐만 아니라 자기도 봤으면서.
앞서 걸으며 강의실을 나서는 강지석의 등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그의 호의가 그저 좋기만 하질 않는다. 결국 그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이리 줘. 내가 들게.”
“아직 덜 나은 것 같아서 그래.”
“다 나았어. 남이 보면 내가 너 가방 셔틀로 써먹는 줄 안다고.”
그렇게 말하고 지나가려는데 강지석이 집요하게 가방끈을 잡아당긴다.
“우서야, 시험 다 끝난 기념으로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할래?”
“아직 시험은 이틀이나 더 남았는데 기념은 무슨. 들어가서 내일 시험 볼 거나 준비해.”
“아-, 신우서, 요즘 왜 이렇게 까칠해-. 낯설다, 낯설어.”
뭐가 까칠하냐고 맞받아치려다가 움찔했다. 강지석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는 건가.
하긴, 요즘 계속 지건 형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긴 했다. 둔한 강지석까지 알아챌 정도라면 상태가 심각하다.
‘정신 차리자, 신우서.’
언제까지 넋 나가 있을 건데.
답답할 땐 술만큼 좋은 것도 없다. 잠깐이나마 머릿속을 환기시키고 싶은 마음에, 보란 듯이 울상을 지은 강지석의 머리에 살짝 딱밤을 먹였다.
“알았으니까 얼굴 펴. 안 그러면 술이고 뭐고 없어.”
“같이 마셔 줄 거야? 진짜지?”
강지석의 얼굴이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금세 밝아졌다. 내 어깨를 친근하게 둘러 안은 그가 성큼 나아간다.
“술집이야 뻔하지. 가던 곳 가자.”
* * * Ym
강지석이 어떤 술집에 갈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그가 애용하는 술집이라고는 한 곳뿐이다.
“마셔, 마셔. 오늘은 내가 쏜다!”
신나게 외친 강지석이 연거푸 소주잔을 기울였다. 나도 뒤따라 잔을 들며 맞춰보려 했지만, 이 녀석은 오늘 왜 이렇게 들뜬 건지 너무 빨라서 속도를 맞출 수가 없다.
“천천히 마셔. 그러다 훅 가.”
“괜찮아! 훅 가려고 마시는 거다, 뭐!”
강지석은 술잔을 한 번 더 비워내며 술집 점원에게 소주를 추가했다. 테이블에 새 소주가 올라오고 또다시 서로의 잔에 술을 주거니 받거니가 시작된다.
술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른 저녁을 챙겨 먹어도 될 시간이라, 안주를 좀 넉넉히 시킨 편이었다. 그런데도 강지석은 안주를 거의 집어 먹지 않은 채 소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평소에 안주도 금세 비우던 녀석이라서 오늘의 그는 유독 이상해 보였다.
“안주 좀 먹으면서 마셔. 속 다 버린다니까.”
“아-.”
강지석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벌리고서 들으란 듯 소리를 냈다. 누가 보더라도 ‘입에 먹을 것 좀 넣어줘’라고 말하는 모양새라, 흠칫하며 당황하고 말았다. 입에 뭐라도 태연하게 넣어주면 될 것을, 가끔 이럴 때마다 일일이 놀라게 된다.
“어우, 입이 쓰다. 빨리, 빨리.”
떼를 쓰듯 자꾸 귀엽게 입을 벌린다. 먹이를 원하는 덩치 큰 아기새 같은 모습에 곧 내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너 한 번씩 이럴 때마다 진짜 깨는 거 알아?”
“알지. 그러니까 너한테만 하잖아.”
강지석이 히죽거리며 또다시 입을 벌린다. 기어코 내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야 말겠다는 당찬 포부가 엿보여, 뭘 넣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강지석의 입에 내가 집어 든 부침개 조각이 쏙 들어갔다. 입술이 젓가락 끝을 꽤 강하게 붙잡더니, 이내 쏙 빠져나온다. 음식을 씹는 입이 오물거리는 동안에도 나를 향한 보기 좋은 호선은 가실 줄을 모른다.
‘닮았다….’
반쯤 넋을 놓은 채 강지석의 입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지석은 내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한시도 입가에서 미소를 떼어내지 못하던 지건 형과 너무 닮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예전에는 분명 지건 형을 보며 ‘강지석을 닮았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반대가 되어버렸다. 강지석을 보며 형을 떠올리다니.
동시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영문도 모르고 열이 올라버린 탓에 머릿속이 금세 또 뒤죽박죽되었다. 술과 강지석의 수다 덕분에 그나마 잊고 있었는데.
나도 강지석의 페이스에 맞춰 술잔을 마구 기울이게 된 건 그때쯤부터였다. 강지석은 자기가 더 신이 나서 내 술잔을 채우기 바빴고, 이젠 녀석이 내가 했던 것처럼 안주를 집어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지나가던 다른 학과 친구들이 우리를 보며 ‘시험 망친 기념으로 드디어 사귀냐?’ 같은 말을 했지만, 그때만 움찔할 뿐 계속 술잔을 비웠다.
술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우린 금세 취해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너무 취해버렸다.
“야아, 거기까지만 해라.”
미친 듯이 시작한 건 강지석인데 오히려 녀석이 날 말렸다. 그럴 만도 한 게, 벌써 눈앞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난리가 났다. 저번에 지건 형과 2차까지 마셨을 때도 지금처럼 취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 또 지건이 형….’
자조하며 술병을 들었다. 형은 대체 언제쯤 내 머릿속에서 나가줄 건지.
한 잔만 더 마시면 될까. 아니면 한 병?
차라리 취해서 잠들면 좋겠는데.
그럼 그 순간에라도 잊을 수 있으니까.
“우서야, 그만 가자. 너 쓰러질 거 같아.”
자리에서 일어난 강지석이 내 손에 있던 술병을 빼앗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언제 계산을 마친 건지, 그대로 날 끌어 부축하고는 가방까지 살뜰히 챙겨 문으로 향한다.
“나…, 더 마실 수 있는데…….”
둔해진 혀로 어렵사리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강지석의 만류뿐이었다.
술집 밖으로 나오니 까마득한 밤하늘과 야경만 가득하다. 그 외에 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시야가 흐린 내 눈에 구분되는 건 그 정도가 다였다.
“걸을 수 있겠어? 이러다 너 잠드는 거 아냐?”
강지석이 잔뜩 취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나를 보며 걱정 어린 말을 건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못 자….”
“뭐?”
“형 없으면… 못 잔다고…….”
웅얼거리며 대답하니, 강지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걷지 않고 멈춰있으니 그나마 강지석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보이는 것 같다.
‘강지석이 맞긴 맞나…?’
매달리다시피 부축받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웅-
재킷 안주머니에서 갑자기 긴 진동이 느껴졌다. 여러 번 울리는 거로 봐선 전화임이 분명했다. 진동 때문에 내 몸도 떨리는 기분이라 더 어질어질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누군가하고 휴대폰을 들다가 손에 힘이 없어서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형이 사준 새 휴대폰이라 상처 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으로 얼른 손을 뻗어보지만 시야가 흔들려서 허공만 휘적거렸다. 대신 강지석이 요령 좋게 낚아채어 액정 화면을 바라본다.
휴대폰을 달라고 하려는 순간.
“왜, 형.”
강지석이 멋대로 전화를 받아버렸다. 그것도 내 술김 일부가 날아갈 정도의 차가운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