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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51화 (51/99)

51화

우서는 숨이 막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요하다 못해 숨소리마저 내 것만 남은 것 같다. 조금 전의 고백이 우서에게 제대로 닿기나 한 건지 의문일 정도로 그는 그저 내 눈만 바라보고 있다.

열띤 얼굴에 뒤늦게 호흡이 돌아온 것처럼 깊이 숨을 들이마신 우서가 시선을 돌린 채 어떻게든 내가 한 말을 회피하려 들었다.

“장난…하시는 거죠? 형이 왜 날…….”

가슴팍을 밀어내기에 순순히 물러나기보다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시선은 돌리더라도 그의 정면에는 항상 내가 있을 수 있도록 그의 얼굴을 감싸 마주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마. 난 한순간도 네게 장난친 적 없어.”

“장난이잖아요. 장난이어야 해요, 형. 알잖아요.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모를 리가 없지.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동생을 좋아하고 있는걸.

예전에는 그게 너무도 거슬렸고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네가 강지석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네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견고한 척하던 위태로운 마음 덩어리에 작은 틈새를 만들고 그곳을 비틀어 열어서 날 통째로 밀어 넣기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네가 무려 ‘내 동생’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가 겉으로 드러낸 건 우서를 흔들 수 있는 감정의 파편뿐이었다.

“알아. 알기 때문에 여태껏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던 거야.”

좀 더 애틋하게.

좀 더 불안하게.

네가 날 밀어낼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마음을 가져버렸다는 것에 절망한 척, 위태롭게.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이라면 강지석 때문에라도 나름의 특기가 되어버렸다. 비록 강지석 때와 달리 이번만은 겉모습까지 따라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 전달될 것이다. 그동안 옆에서 줄곧 지켜봐 오며 내 눈에 새겨넣었던 감정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그간 내가 어떻게든 감추고자 했던 그 당시의 나 자체이기도 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해. 너무 좋아하게 돼버렸는데… 어떡하지, 우서야.”

너라면 모를 수가 없겠지. 너와 내가 이토록 닮았는걸.

신우서의 눈에 비친 나는 더 이상 강지석의 대용품이 아니었다. 점차 변화해왔던 것처럼 더는 그 녀석을 떠올리며 웃을 수도 없을 거고 내 품에 안겨서 키스를 받더라도 상대를 착각하려 들지 않을 거다.

우서의 눈동자에 선명히 새겨진 건, 강지석이 아니라 나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그냥 형 취향이라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궁지에 몰려 도망갈 구석을 찾는 자그마한 강아지처럼 귀여운 착각을 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눈에 일말의 기대가 깃드는 것을 보게 되니 입 안이 씁쓸해졌다. 내 취향을 만든 건 바로 너인데. 네 취향이 강지석 자체가 된 것처럼.

말을 하면 할수록 우서의 눈동자는 더 없는 혼란으로 물들어갔다.

그러다 점차, 가라앉는다.

주변의 덜덜 떨던 혼란스러운 분위기마저 거짓말인 것처럼 내려앉아 사라져간다.

‘괜찮아.’

가슴 한구석이 너무도 차갑게 시렸지만, 머릿속으로는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건 우서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말에 상처받을 내가 아니라, 예상한 답을 입에 담아 분명히 말해야 할 그를 위한 것이었다.

확실하게 말해줘, 우서야.

“미안해요.”

더 확실하게.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듯이.

“…정말 미안해요, 형.”

죄책감의 무게가 가녀린 우서의 어깨를 누르고 그의 고개를 숙이게 했다. 우서의 붉게 달아올라 있던 눈가에는 희미한 물기가 서리고 그친 줄 알았던 떨림이 뒤늦게 폭풍처럼 몰려와 그를 이불보다 더 두껍게 감싸 안았다.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가슴의 시린 고통과 달리 내 머릿속은 자꾸만 내 입가를 끌어올리려 한다.

“미안해요, 미안…….”

“괜찮아, 우서야.”

목소리를 가라앉히고서 우서를 끌어안아 쓰다듬었다. 괜찮다는 말을 거듭하며 쓸어주는 내 손끝은 묘한 감정에 잠식되어 멈추지 않고 떨려갔다.

“난 네게 고백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형….”

“미안해하지 마.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으면서 고백한 건 나니까 절대 미안해하지 마.”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면 말할수록, 오히려 우서는 더욱 미안해할 거다. 어중간한 죄책감이 아니라 좀 더 확실한 감정을 담아 날 바라보게 되겠지. 머릿속에서는 내 말이 수없이 되풀이되며 싫어도 날 의식하게 될 테고.

그렇게 ‘강지석’이 아닌 ‘강지건’을 바라보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다 보면 내가 그에게 행한 모든 일에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정말 링을 해제하고 싶은 거라면 같이 방법을 찾아서 그렇게 하자. 난 네 뜻대로 할게.”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을지, 너라면 한참 생각하고 곱씹어보겠지. 그러는 동안 전신을 둘러싼 죄책감의 크기와 미안함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더더욱 혼란스러워질 거야.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게, 우서야.”

그 혼란 속에서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헌신적인 나를 보며 넌 계속 우리를 빗대어 보게 되지 않을까. 너와 닮은 눈을 한 나를,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매몰차게 버릴 수 있겠어?

얼마든지 물러나.

얼마든지 밀어내.

그만큼 넌 내가 만들어둔 늪으로 조금씩 뒷걸음질 치게 될 테니까.

* * *

생각에 빠져든 우서를 침실에 혼자 둔 채 뒤늦게 샤워를 마쳤다. 저절로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리며 욕실 문을 열었다.

달칵, 부엌 쪽에서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빨리 발견했겠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당황한 척 표정을 바꿨다. 걸음을 빨리해서 주방으로 향하니, 탁자에 약간 기대어 선 채 물이 반쯤 담겨 있는 유리잔을 기울이고 있는 우서가 보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거실의 유리 테이블에 올려진 붉은 장미 꽃다발이 있었다.

우서가 꽃다발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몸으로 시야를 가린 내가 당황과 걱정 섞인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물이 마시고 싶으면 날 부르지 그랬어.”

우서 성격에 아픈 몸을 핑계로 누구를 하인처럼 부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굳이 말해보았다. 예전에는 이런 챙김에서조차 강지석이나 계약을 떠올렸을 테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우서가 날 의식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눈을 내리깔았다가 옆으로 굴리길 반복하던 우서가 고개를 조금 옆으로 빼서 굳이 내가 가린 장미 꽃다발에 시선을 둔다.

“받으신 거예요?”

“아….”

얼굴에 좀 더 당황함을 담다가 곧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쁘길래 네 생각이 나서…….”

말을 다 잇지 않고 잠시 다물었다가 멋쩍게 웃었다.

“지금은 좀 부담스럽겠다. 먼저 들어가 있어. 버리고 들어갈게.”

돌아서려는데 우서가 가운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버리…시려고요?”

“너 말고는 주고 싶은 사람이 없는걸. 그러니까 버려야지.”

“화병에 넣어서 며칠 두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요. 모처럼 샀는데 아까워요.”

꽃다발에 닿은 우서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우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얌전하고 단정한 느낌의 그와 달리 화려하고 선명한 색을 가진 장미였다. 한창 과외수업을 해주던 시절에 그 이유가 있냐고 물으니,

“눈에 띄어서라도 어떻게든 좋아해 줬으면 하고 안달하는 것 같잖아요.”

그런 솔직한 대답을 해줬었더랬다.

우서의 말대로 꽃다발을 적당한 화병에 가득 담아 방으로 가져갔다. 기왕이면 햇볕이 드는 곳, 그러면서도 우서가 침대에 앉은 상태로 언제든 볼 수 있는 서랍장 위에 화병을 배치했다. 서랍장 위 한가운데에 화병을 놓고서 돌아서니 마침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우서와 눈이 마주쳤다.

“예쁘네요.”

우서가 살짝 웃어 보이더니 곧 시선을 피해 그의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강지석이 전해준 과제라도 하고 있을 생각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아직도 그의 머릿속은 두통이 생길 정도로 복잡할 거다.

우서가 날 의식하는 공기가 찌릿거리며 전신을 찔러대었다. 그걸 느끼면서도 태연한 척, 그의 앞에서 샤워가운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돌아보았을 즈음엔 우서가 감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를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꿎은 그의 볼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침대 옆에 놔둔 의자에 앉아 우서 때문에 손에 잘 잡히지 않던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때, 약간 열어두었던 창문 틈새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신선한 장미향을 품어 코끝을 간질였고, 그로 인해 우서의 시선이 다시금 서랍장 위의 붉은 장미에 닿았다. 선명한 붉은색이 우서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눈에 띄어서라도 어떻게든 좋아해 줬으면 하고 안달하는 것 같잖아요.”

내가 그래, 우서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네가 날 좋아해 줬으면 해서 안달하고 있거든.

그걸 위해서라면 링이든, 커넥터든, 강지석이든, 네 죄책감이든.

뭐든 다 이용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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