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남자가 어깨를 크게 떨었다. 그의 미간이 심각하게 찌푸려진다.
“그건… 어떻게 안 거예요?”
불안한 듯 손끝을 떨던 남자는 두 손을 깍지껴 꽉 맞잡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안한 떨림을 막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죠. 그쪽도 어차피 해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말해줘야 하는 내용 아닌가?”
눈앞의 남자에겐 그가 직접 밝히지 않은 중대한 ‘비밀’이 새어나간 거나 다름없으니 중요한 사안일지 몰라도, 내겐 아니었다.
남자의 손끝만큼이나 그의 눈동자도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나도 내 링이 걸렸는데 어디 누설할 수나 있겠어요? 그쪽이 마음만 먹으면 내 링 정도는 금방 가져갈 수 있다는 거 알아요.”
그런 부분에서의 주도권은 명백히 저 남자에게 있는 것이니만큼 나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무작정 누군가의 손에서 링을 빼앗아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동의하에 링을 해제해주는 건 괜찮을지 몰라도, 강제로 취하는 건 극도로 꺼리는 게 분명하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지금처럼 불안한 기색을 보일 시간에 테이블에 보란 듯이 올려져 있는 내 왼손을 노려봤겠지.
“전부 입막음했다고 생각했는데…….”
작게 중얼거리던 남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뒤이어 지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강지건 님이 말하지 말라고 해도 제가 할 일은 하나뿐이에요.”
“좋아요. 그거면 됩니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짧게 대화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그새 2시 25분을 넘어가고 있다.
“절 만난 건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군요. 그편이 그쪽의 의무를 다하기 좋을 거예요.”
잠깐 만나서 대화한 것뿐이었지만, 남자는 섣불리 입을 놀려 말의 신빙성을 좌지우지할만한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권고를 무시했다간 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걸 그 역시 파악했을 거다.
그만 가 보라고 하려는데, 남자가 날 유심히 바라보며 입을 뗐다.
“강지건 님은… 신우서 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거죠?”
남자의 눈이 그제야 내 왼손 약지에 닿았다.
그의 눈에 비친 링은 여전히 한 줄뿐.
입 안이 씁쓸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아등바등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가져보고 싶어서.”
“…….”
남자는 마치 링에서 뭔가를 읽는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와 같은 씁쓸한 얼굴로 눈을 들었다.
“링은 무작정 생기는 게 아니에요. 모든 링에는 만들어진 이유가 있죠.”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링을 단순한 족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강지건 님도, 신우서 님도.”
어딘지 모르게 아프게 웃어 보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게 그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남자가 보여준 건 그가 가진 1:1 오픈 메시지톡 주소였다.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연락처 노출을 극도로 꺼리던 그답다고 해야 할까.
남자는 우서에게 했던 것처럼 내게도 연락처 대신 오픈 메시지톡 주소를 공유했다. 탐탁지 않았지만 그의 주소를 메모해두고서 별생각 없이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한도진입니다.”
“좋아요, 한도진 씨.”
꽃다발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지나갔다.
“아픈 애 붙잡고 길게 얘기하지 말고 짧게, 팩트만. 알았죠?”
한도진은 내가 멀어져가는 그 순간까지도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우서가 한도진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약 30분 후.
잠들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우서를 위해 더 참지 못하고 집 안으로 향했다. 잠든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눈에 담은 채 천천히 겉옷과 베스트를 벗어 걸어두었다. 넥타이까지 풀고 나서 우서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즈음엔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잔잔하게 미소 지어주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열이 더 올랐어. 너무 뜨거운데, 어지럽지는 않아?”
우서는 날 바라보면서도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안쓰러운 느낌이 들어, 열을 체크하는 척 볼을 감싸주니 알아서 기대어 볼을 비빈다. 본능적인 행동인 것처럼 눈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그러고 있는 우서를 보다 보니 가슴이 저려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쓰러뜨려 입을 맞추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형, 할 말이 있어요.”
상체를 일으켜 앉은 우서는 여전히 생각이 많은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뭔가를 다짐한 듯이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링을 해제하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요.”
우서는 커넥터인 한도진과 직접 만났다는 말을 삼켰다. 그걸 밝히게 되면 걱정 가득한 날 두고 밖으로 나갔었다는 말을 해야만 한다. 내가 그를 걱정해서 일까지 재택근무 형태로 바꾼 상태이니만큼 걱정거리를 더 얹어주는 말은 어떻게든 숨길만 했다.
“아무래도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아요. 형은 워낙 바쁘시니까 제가 알아보고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눈을 든 우서는 한도진을 떠올릴 정도로 불안해 보였다.
그걸 보며 가슴 한구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안과 긴장으로 이루어진 기분 나쁜 전율이 아니라, 희열에 가까운 두근거림이었다.
‘그렇게 불안해하면 어떻게 해, 우서야.’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게.
이때까지 밑밥을 깔아둔 승률 높은 도박이었다고는 해도, 보란 듯이 성공했다.
신우서는 나와의 기억을 잃어도 좋을 만큼 링을 해제할 자신이 없다. 한도진이 무서울 정도로 명확히 말해준 사실 덕분에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우서는 여전히 날 가슴 속의 저울에 올려둔 채 아무런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서라도 각자의 링을 해제해 자유를 얻을지, 아니면 이대로 쭉 링에 속박되어 내 곁에 머물지.
예전 같았다면 나를 위한다는 핑계로 전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머뭇거릴 게 뭐가 있을까. 그의 마음속에는 강지석뿐이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내 자리가 생겼어.’
부정할 수 없는 내 자리.
강지석과 견줄 만큼 커진, 나만의 자리.
나는 그 자리를 더 견고히 해야 했다.
그뿐이랴.
더 단단하게 커지고 커져서 강지석을 완전히 몰아낼 것이다.
“왜 꼭 없앨 생각부터 해?”
희열을 감춘 어두워진 낯으로 그를 응시했다. 나의 씁쓸한 척하는 목소리만큼이나 그의 음성 역시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희가 가진 링은 불필요한 거니까… 당연히 없애야죠.”
아니잖아, 우서야.
불필요한 게 아니라고.
링이야말로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널 붙잡을 유일무이한 족쇄인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것도, 이런 미소를 짓는 것도, 전부 강지석을 흉내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우서를 끌어안아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레 벌어진 입술과 작은 혀까지 모두 사랑스러워, 이리저리 유린해서라도 신음을 뽑아내고 싶어진다. 본능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입 안을 탐하며 물었다.
“이런 것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고?”
“…아니에요? 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시는 거잖아요.”
순수한 목소리 속에 담긴 떨림이 한층 커졌다. 견고하던 그의 가슴 속 자리가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주인은 그걸 미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좀 더 명확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가 품었던 마음 사이로 누가 들어가기 시작했는지.
“내가 여태껏 강지석을 따라 하려 했던 건 맞아. 하지만 그게 정말 단순히 너와 자고 싶어서였을 것 같아? 잠이 필요한 거라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어. 안간힘을 써서라도 계속 버텼다면, 결국 너와 난 서로의 숙면을 위해서라는 똑같은 이해관계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을 거야.”
말이 이어질수록 우서의 얼굴에 점차 붉은 기가 돌았다. 내 말이 그의 머리와 가슴을 정신없을 정도로 뒤흔들어놓는다.
더 흔들어야 해.
더 확실히, 더 명확하게, 더 애절하게.
“네가 날 이용해서 강지석을 봤듯이, 나도 강지석을 이용했어.”
끌어안은 우서의 심장 박동이 점차 빠르고 크게 울려왔다. 얼굴에 입을 맞추니 그 박동이 한층 확실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내게서 다른 사람이 보여?”
이제 내게서 다른 사람을 찾는 건 그만둘 때도 됐잖아.
아니, 이미 강지석 따위는 내 얼굴 위로 보이지도 않잖아.
“난 처음부터 너밖에 안 보였어.”
5년 전에도, 지금도.
“네가 내 전부였다고, 우서야.”
너만이 내 전부야.
그걸 깨달은 이상, 난 절대 널 놔줄 생각이 없어.
우서의 눈동자가 내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눈동자에는 강지석과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의 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