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49화 (49/99)

49화

8. 강지건

우서에게 새 휴대폰을 전해준 건 최진호의 폭행 사건이 있던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오전이었다. 그때쯤엔 이미 우서가 C라는 사람과 메시지톡을 통해 중요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눈 후였고, 둘이서 만날 약속만 확정지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아마 휴대폰이 없으면 밖에서의 연락수단이 없어서 섣불리 약속 날짜를 정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상대가 링을 해제할 수 있는 커넥터라 해서 무작정 우서와 만나지 못하도록 막기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막는다고 해서 우서가 쉽게 포기할 것 같지도 않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휴대폰이고 뭐고 아무 연락수단도 없게 만들고서 방 안에 가둬두고 싶었지만, 절대 조급해해서는 안 된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녜요, 해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데요. 그리고 딱히 연락 올 곳도 없었어요.”

새 휴대폰이 담긴 박스를 받아든 우서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눈을 내리깐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형에겐 늘 받기만 하네요.”

“내 탓인데 당연히 내가 해줘야지.”

“그게 왜 형 탓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마요.”

내리깔리기 무섭게 들어 올려진 눈동자가 너무도 맑아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휴대폰이 들어있는 상자를 꼭 쥐고 있는 두 손과 그의 단호한 눈동자를 보고 있다 보면, 정말 그의 말대로 내겐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피식 웃으며 우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전엔 채 적응되지 않아서 한 번씩 움찔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얌전히 머리를 내어주다 못해 눈가가 사르르 풀리는 귀여운 모습까지 보여준다.

상자에서 휴대폰을 꺼낸 우서는 이전까지 그가 써오던 앱을 하나둘 설치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서는 내가 개통 직후에 휴대폰 속에 숨겨둔 위치추적 앱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 내부 파일을 일일이 뜯어보지 않고는 알아챌 수 없을 거다.

휴대폰에 필요한 앱을 설치하는 모습이 마치 해바라기 씨를 두 손에 쥔 햄스터처럼 보여서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저절로 피어난 작은 미소를 걸고서 침대에 걸터앉아, 자연스레 우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앱 설치에 정신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간 긴밀한 스킨십을 자주 해왔던 터라 역시 거부감은 보이지 않았다.

“형이 오늘 오후에 급한 미팅이 잡혀서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당연하죠, 어린애도 아니고.”

“그래. 혹시라도 졸리면 괜찮으니까 형 불러. 최대한 빨리 끝내고 와서 손 잡아줄게.”

순간적으로 당황한 우서가 날 힐끔 보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매일 옆에 붙어있는 동안 언제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도록 일부러 옆자리에 밀착해 있거나 손을 잡아주곤 했다. 새삼 입에 담아 말해주니 부끄러운가 보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천천히 다녀오세요.”

순간적으로 우서의 눈이 휴대폰 속 메시지톡 어플에 닿는 것처럼 보였다. 난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점심 메뉴는 뭐가 좋을지 등의 한가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 * *

우서가 새 휴대폰에 그의 메시지톡 계정을 연동하는 바람에 이전의 부서진 휴대폰으로는 아무것도 엿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될 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부서진 휴대폰을 작은 상자에 곱게 넣어 조수석 서랍에 넣어두었다.

서랍에 닿아있던 내 시선이 조수석에 놓인 붉은 장미 꽃다발에 닿았다. 피부가 하얗고 웃는 게 예쁜 우서에게 특히나 잘 어울리는 꽃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감긴다.

우서와 C의 대화 내용은 이미 알 만큼 알고 있었다.

[C : 정말 링을 해제할 생각이 있으신 거라면 꼭 한 번 만나주세요. 만날 장소는 신우서 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정해주시고, 시간도 제가 전적으로 맞출게요. 그래도 불안하시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만나도 괜찮아요. 제가 목소리를 줄이면 되니까요.]

[C : 재차 말씀드리지만, 직접 만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어요.]

C, 그러니까 커넥터라는 사람은 듣던 대로 조심성이 많은 자인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 이토록 뭉뚱그린 소문만 남아 있는 거겠지.

‘입막음도 제법 잘 하고.’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능력만으로도 입막음에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링을 해제하고 연결할 수 있는 커넥터가 있다는 소문은 링이 생긴 다음 날, 링의 상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찌르다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것도 꽤 어렵사리 전해 들은 거였는데, 문제는 정확히 어떤 원리로 링의 해제와 연결을 할 수 있느냐였다. 이에 대해 링 보유자들에게 재차 물었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쪽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협업체의 팀장이 추가 계약을 조건으로 은밀히 정보를 건네었다.

“링을 해제하면 링에 연결된 서로의 기억을 다 잃게 된대요. 링이 연결되기 이전에 있었던 것도 깡그리 말이죠.”

그 말을 듣자마자 그걸 믿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 팀장은 링 보유자였던 그의 상사가 커넥터의 정보를 알려주고 얼마 되지 않아 링의 상대에 대한 기억을 전부 잊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링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서 오히려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할 땐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분이 진짜 링을 해제하고 싶어서 해제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 발설하고 다니는 거 알면 정말 그 커넥터가 와서 링을 뺏어갈지도 몰라요. 난 우리 와이프를 잊고 싶지 않다고요.”

정말 겁에 질린 것처럼 떨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보아, 심심함이 극에 달한 나머지 애꿎은 거래처 대표를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커넥터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무는 게 분명한 이들에게 슬쩍 찔러보았다. 링의 상대에 대한 ‘기억 상실’에 대해.

굳이 줄줄이 얘기할 필요도 없었고 거창한 확인도 필요 없었다. 그들의 놀란 듯 긴장한 얼굴과 약간의 불안을 담은 눈동자를 보자마자 그 말이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차를 멈춰 세우고서 운전대를 잡은 왼손 약지에 시선을 두었다. 가느다란 붉은 링 한 줄이 선명히 새겨진 걸 볼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떨린다. 아마도 그 링의 상대가 신우서이기 때문이겠지.

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수석의 꽃다발을 들고 운전석에서 내려섰다. 주차장에서 나온 내가 향한 곳은, 우서의 휴대폰 위치가 잡히는 4층짜리 대형 카페 앞이었다.

1층 카운터 근처에는 우서가 서 있었다. 이동하는 걸 곧바로 잡아서 뒤따라왔으니 시간으로 보자면 아마 메뉴 주문을 한 직후인가 보다. 음료를 받는 곳 근처에 서서 휴대폰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우서는 내가 은밀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1층 테라스에 있는 빈자리에 앉아, 어깨너머로 우서를 주시했다. 열 때문에 약간 얼굴이 달아올라 있는 게 여기서도 훤히 보였다.

‘며칠 더 있다가 시간을 만들어 줄 걸 그랬나.’

아직 열도 있고 멍도 다 빠지지 않았는데 너무 시간을 급히 만들어 줬나 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컸다.

우서는 곧 음료 두 잔을 받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과 혼자서 음료 두 잔이 나올 때까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점으로 보아, 상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2시 14분이다.

우서는 약속 시각에 지각하는 법이 없다. 예전에 과외수업을 받을 때도 언제나 늦어도 10분 전에는 도착해 있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번 역시 그럴 것이다.

테이블에 선명한 붉은 장미꽃을 올려둔 채 왼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흥미도 없는 인터넷 기사를 아무렇게나 띄웠다.

많은 사람이 오갔다. 지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까지도 붉은 장미 꽃다발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내가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줄 알고 저들끼리 수군거리기까지 했는데, 실상은 이게 미끼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약 5분 정도가 지났다.

한 젊은 남자가 카페 입구를 향해 걸어왔다. 단순한 카페 이용객처럼 보이는 남자였지만,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보자마자 왼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왼손에만 장갑을 낀 남자가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휴대폰을 내린 내가 남자에게 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잠깐 얘기 좀 하게.”

“…….”

약간 놀란 기색의 남자가 잠깐 입을 다물더니 순순히 마주 앉았다. 역시나 그는 ‘커넥터’가 분명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서글서글한 인상이 호감인 남자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턱짓으로 보란 듯이 장미 꽃다발을 가리켰다.

“눈길을 끄는 건 색이 선명한 꽃다발 쪽일 텐데, 그쪽은 이것보다도 왼손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더군요. 수상하게 왼손에만 장갑을 낀 것도 그렇고.”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남자는 이채를 띄더니 내 왼손 약지에서 뭔가를 읽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선을 고정했다.

“강지건 님은 일부러 링을 이용해서 절 신우서 님보다 먼저 만나려 하신 거죠?”

놀랍게도 내가 우서의 상대라는 걸 알고 있던 남자는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렸다. 보기 좋은 미소이긴 하나, 그의 눈은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제가 누구일지는 이미 아시는 것 같지만, 신우서 님이 아무 말도 없으셨던 걸 보면 두 분이 상의하신 건 아닌가 봐요.”

“맞아요. 이건 내 독단이죠.”

남자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서서히 내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네요. 강지건 님은 신우서 님과의 링을 해제할 생각이 없어요. 그렇죠?”

그는 내가 왜 독단으로 먼저 만나려 했는지 쉽게 알아챘다. 만약 링을 해제하고자 하는 우서와 뜻이 같았다면 굳이 이렇게 따로 만나려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남자의 단호한 말이 이어졌다.

“죄송하지만, 저는 신우서 님도 링에 대해 확실히 아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강지건 님이 아무리 절 막아도 신우서 님께 분명한 선택지를 드려야 공평……!”

“착각하지 말아요.”

앞서 나가는 남자의 말을 끊으며, 미팅용으로 갖춰 입은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난 그쪽 입을 막겠단 말은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럼 왜 따로 만나려고 한 거죠?”

남자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입에 문 입 안으로 나를 닮은 매캐한 연기가 안쪽 깊이 들어왔다가 알싸하게 흘러나간다.

“우서에게 링의 해제에 대한 걸 숨기지 말고 다 말해줘요.”

선뜻 이해하지 못한 남자의 미간이 움찔했다. 그런 그에게 작은 저음으로 좀 더 명확한 말을 건넸다.

“링을 해제하면 나에 대한 기억까지 전부 잃게 된다는 걸 우서에게 확실히 이해시켜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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