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이 하는 말을 분명 제대로 들었음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이 나를? 왜?
심장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서 그런지 얼굴에 더욱 열이 올랐다. 머릿속이 가슴처럼 먹먹해지고 어질거린다.
“장난…하시는 거죠? 형이 왜 날…….”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가까이 붙어있는 형의 가슴팍을 이불 속에 숨어버린 두 손으로 어렵사리 밀어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날 둘러 안고 있는 형의 팔에 더한 힘이 들어가고 내 얼굴을 감싼 손은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게 한다.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마. 난 한순간도 네게 장난친 적 없어.”
“장난이잖아요. 장난이어야 해요, 형.”
목소리가 한없이 떨렸다. 이 상황을 납득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머릿속이든 가슴이든 다 혼란으로 뒤섞여버렸다.
“알잖아요.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알아. 알기 때문에 여태껏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던 거야.”
혼란으로 무너져내리는 내 얼굴보다도 애틋한 음색을 품은 형의 얼굴이 더 불안했다. 매번 또렷하던 눈동자에 일어난 수많은 파문이 도무지 멈추지를 않는다.
형은 나보다 더 불안해하고 있었다.
입 안에서 몇 번이나 말을 고르는 것처럼 입술이 몇 번이나 열렸다가 닫히고 고른 치아가 붉은 살을 깨물길 반복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아해. 너무 좋아하게 돼버렸는데… 어떡하지, 우서야.”
형의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가슴의 진동이 더 심해진다.
‘반칙이잖아요, 형.’
형은 마치 나와 같았다. 좋아하면 안 될 사람을 좋아해 버려서 어쩔 줄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던 나와… 너무도 닮았다.
그래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밀어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은 그래선 안 되는데, 도저히 밀어낼 수가 없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형이 아닌 나였다.
형이 내게 했던 행동 모두에 여태껏 강지석을 대입해왔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다. 지나온 일마다 강지석이 아닌 지건 형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금을 포함한 형과 나눌 앞으로의 모든 상황 속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제부터였어요?”
링이 생긴 후부터였을까. 아니면 형과 오랜만에 재회했던 그 순간부터였을까.
“내 마음을 인식한 건 네가 고3일 때였어. 하지만 좋아하게 된 건 훨씬 이전부터였을 거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땐 네가 지석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점차 거리를 뒀던 건데… 이렇게 다시 연결될 줄 몰랐어.”
형의 시선이 그의 왼손에 닿았다.
링 때문에 내게 잠깐 마음이 기운 거였다면 좋았을걸.
형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몇 년 전부터 날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좋아하게 된 나날이 짧으면 짧을수록 잠깐의 착각에 불과한 마음일 뿐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다.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뭔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링이라는 것과 수면을 위한 신체접촉, 뭐 그런 것 때문에 형이 잠깐 착각하는 거라고 여기면 된다.
하지만 링이 발현하기 전부터 쭉 마음에 품어온 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 긴 시간 동안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접지 못한 채 살아온 거라면 누구든 진심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세상에 딱 그 사람만 있는 것처럼 시선이 쏠려, 도저히 다른 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
형과 재회하기 전, 언젠가 강지석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의 강지석은 지건 형이 전 애인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새로운 사람을 사귀었다며 툴툴대었다.
“우리 형은 대체 연애를 왜 하는지 모르겠어.”
“서로 좋으니까 하겠지.”
“좋아하는 게 안 보이니까 그렇지. 형은 애인을 그렇게 까다롭게 고르면서 잘 대해준 적이 한 번도 없어. 애인들이 불쌍할 정도야.”
“겉으로 표현을 잘 안 하시는 게 아닐까? 네가 안 보는 데에선 다정할지도 모르잖아.”
“전-혀. 다정은커녕 냉기만 풀풀 날린대. 애인도 자주 바뀌는데 다들 나한테 그런 소리 하면서 펑펑 울어.”
한탄하던 강지석은 그 말과 함께 날 천천히 훑어봤었다.
“지건이 형 만나게 되면 조심해. 아마 형이 먼저 들이대진 않을 테지만, 애인들이 다 너랑 비슷한 타입이어서 좀 걱정된다.”
그땐 별생각 없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당시의 난 강지석이 그의 가족 얘기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을 뿐이었고, 지건 형에 대한 말들은 거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그냥 형 취향이라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덜덜 떨리던 머릿속이 잠깐이나마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냥 형 취향에 맞는 사람이 마침 가까이 있어서 이러는 거면 좋아하는 감정의 무한한 두께가 굉장히 얄팍할 수 있는 거다. 그런 얄팍한 감정이라면 금세 부러져서 사라질 수 있으니……!
“뭘 모르는구나.”
형이 아련한 눈으로 힘겹게 웃는다.
“네가 내 취향을 만들었잖아, 우서야.”
머릿속에 또다시 진동이 퍼졌다. 이미 엉망이 되어있던 머릿속이 다시금 이리저리 뒤엉킨다.
날 폭행했던 형의 전 애인, 그리고 형이 지나온 많은 연인.
그들의 기저에 깔려있던 건 나였다. 형은 나와 닮았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해 곁에 두었다. 내가 강지석과 닮은 형에게서 그 녀석을 보았던 것처럼, 형 역시 똑같은 걸 해오고 있었던 거다.
어쩜 이렇게 똑같지.
너무 똑같아서 형을 매몰차게 밀어낼 수가 없다.
이건 아닌데. 이건 정말 아닌데.
내게 누군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면 단연코 강지석을 떠올려 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강지석이었다.
하지만 자꾸 머릿속을 방해하듯 강지석과 함께 지건 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건 형을 좋아하냐고?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다정하고 이렇게 나만 바라봐왔다고 말하는 사람을, 과연 누가 싫어할 수 있겠냐고.
마음에 둔 사람이 없었다면 나도 형의 말에 흔들리다 못해 벌써 기대버렸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흔들림이 순간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형을 좋아해서인지 분간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서툰 키스를 먼저 시작해버렸을 게 분명했다.
난 지건 형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건 강지석을 밀어낼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강지석에게 준 내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커서 자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고는 해도, 오랜 시간 동안 밀어내지 못했던 것처럼 여전히 강지석을 사랑한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미안해요.”
눈을 내리깔고 고개 숙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정말 미안해요, 형.”
눈가가 시큰거렸다. 아무리 열이 많아서 눈가가 달아올랐다고는 하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물기가 생기는 걸 보니 내가 정말 상태가 이상하긴 한가 보다.
형의 얼굴을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이러는 게 맞는 걸까.
이건 마치, 내가 강지석에게 용기 내서 고백했더니 ‘넌 안 돼’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고 속이 아팠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미안해요, 미안…….”
“괜찮아, 우서야.”
모든 걸 감내하는 듯한 담담한 목소리의 형이 나를 포근히 끌어 안아준다. 내 얼굴이 형의 어깨에 닿자, 습관처럼 눈을 꼭 감아버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조금 떨리고 있다. 닿아있는 형의 어깨를 타고 그의 빠른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난 네게 고백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형….”
“미안해하지 마.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으면서 고백한 건 나니까 절대 미안해하지 마.”
어떻게 그래요, 형. 내가 형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있는데.
형에게 자꾸만 나 자신이 오버랩되어 가슴이 아파진다.
“정말 링을 해제하고 싶은 거라면 같이 방법을 찾아서 그렇게 하자. 난 네 뜻대로 할게.”
형이 내 머리에 얼굴을 비비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게, 우서야.”
이런 순간마저 왜 이렇게 다정해요, 형.
이 모든 게 강지석을 따라 하는 것뿐이었다면 좋았을걸. 그렇게 알고 있을 때가 차라리 나았는데, 이젠 그렇게 여길 수가 없어서 혼란만 더해진다.
그 후,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형에게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링을 해제하게 되면 서로에 대한 기억도 모두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형이 그동안 내게 품어온 마음도 전부 사라지고 말겠지.
머릿속으로는 그게 낫다는 걸 알고 있다. 서로에게 족쇄나 다름없는 이런 링은 없는 게 나았다. 나보다도 형을 위해서라면 그게 맞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형과 내가 너무도 닮은 외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흔들어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