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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47화 (47/99)

47화

“피곤해 보이네. 바로 잘…….”

말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형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내 이마와 볼을 짚으며 심각한 얼굴을 한다.

“열이 더 올랐어. 너무 뜨거운데, 어지럽지는 않아?”

“…….”

이 다정함도 강지석을 따라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안 그래도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던 머릿속이 한층 복잡해졌다. 그 와중에도 얼굴에 닿은 형의 손이 적당히 서늘해서 나도 모르게 살결을 비비며 기대었다.

머릿속에는 도진 형과의 대화 내용이 자꾸만 빙빙 맴돌았다.

“해제하려는 건 오로지 신우서 님의 의지이죠? 상대방분의 생각은 알고 있나요?”

“링을 해제하기 위해선 두 사람 모두의 뜻이 같아야 해요. 링을 해제하는 것 자체는 그런 제약이 없지만, 제 나름의 방침이라고 해야 할까요.”

도진 형은 내게 지건 형의 생각을 확인해보라는 의도로 그런 말을 했다. 제멋대로인 머릿속은 지건 형이 겪고 있는 상황을 각인시키며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단호하게 굴었고 당연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형이 생각하는 것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럼?’

일치하지 않으면? 형이 나와 계속 링을 갖고 있었으면 한다는 거야, 뭐야.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열이 오른 입술이 자극을 받아 더 화끈거린다.

다정한 형은 그것마저 놔둘 수가 없었던 건지, 상처가 나겠다며 걱정스레 내 아랫입술을 눌러서 빼내 준다. 그러더니 얼른 뭐라도 먹어야 약을 먹지 않겠냐며, 오는 길에 죽을 사 왔다는 말을 한다. 먹고 나면 몇 시간이든 계속 손을 잡아줄 테니 푹 자라고까지 한다.

형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려도 절대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을 마치 모든 게 날 중심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당연하게 해주려 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눈을 내리깐 채,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형은 그마저도 부축해서 앉혀주고는 뜨뜻한 내 목 언저리에 손을 대어준다. 형의 기분 좋은 서늘함이 내 열기를 감싸 안아주는 것만 같다.

형은 자리에 앉은 내 등에 곧바로 베개를 세워 대주었다.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도진 형이 했던 말을 재차 상기하며 말을 건넸다.

“형, 할 말이 있어요.”

우리 둘의 일이니만큼, 형도 알아야 했다. 다만 오늘 여기를 나가서 도진 형과 만났던 일만큼은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도진 형이 그렇게나 조심하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그보다도 지건 형의 진짜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충동적인 게 아니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던 걸 듣고 싶다.

“링을 해제하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요.”

슬쩍 시선을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내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집중해서 들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아요. 형은 워낙 바쁘시니까 제가 알아보고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

지건 형은 내 말을 가만히 들어주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해버렸다.

내 예상대로라면 형은 여기서 이렇다 할 반응이 나왔어야 했다. 잘 됐다며 기뻐하는 거라든지, 이제야 불면증에서 해방되겠다며 한시름 놓는 분위기가 보여야 했는데, 어째 무반응에 가깝다.

표정 변화도 없이 가만히 있던 형이 조금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왜 꼭 없앨 생각부터 해?”

“…예?”

당황하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애초에 형과 나는 링의 해제법을 계속 찾고 있었던 만큼, 링을 없앨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저희가 가진 링은 불필요한 거니까… 당연히 없애야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낯빛이 조금 어두워진 형이 씁쓸하게 반문했다.

여태껏 형이 링 때문에 겪게 된 일은 전부 그에게 안 좋은 것들뿐이었다. 형 역시 그 링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괴로워했던 날이 많은데, 어째서 이상한 기대감을 가질 만한 반문을 하는 걸까.

‘기대감?’

내가 떠올린 단어에 나 스스로가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기대감이라니, 어떤 기대감?

자신이 제 감정과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란, 이렇게 혼란스러운 거구나.

어떤 기대감을 말하는 건지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때까지도 내 목에 닿아있던 형의 손이 거두어짐과 동시에 약간의 한기를 느껴서 어깨를 떨었다. 형의 손이 사라진 목 언저리를 통해 몸 깊은 곳까지 한기가 드는 것만 같다.

형은 그것마저 놓치지 않았는지, 침대에 걸터앉아서는 자리에 앉아있는 내 어깨로 이불을 끌어서 둘둘 감아주었다. 그 상태로 어깨를 끌어당겨 형 품에 안아준다. 그의 입가에 잔잔하고 따뜻한 미소가 감돈다.

“내가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것도, 이런 미소를 짓는 것도, 전부 강지석을 흉내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아니에요? 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시는 거잖아요.”

내가 뱉은 말에서 이상할 정도의 거부감이 느껴졌다. 이건 또 왜 이러나 모르겠다. 여태껏 수없이 생각해온 거면서.

혼란스러운 눈으로 시선을 피하는데, 형의 손이 내 볼을 부드럽게 감싸 돌렸다. 형을 향한 내 입술에 곧 말캉한 살결이 닿는다.

간지러울 정도로 다정하게 닿아온 입술이 살살 비벼지다가 자연스레 벌어진 그 사이로 타액을 품은 혀가 침입한다. 많이는 아니어도 익숙한 키스여서 그런지 나는 밀어낼 생각보다도 알아서 형의 것과 혀를 엮기 시작했다. 서로의 혀가 입 안에서 비벼지고 구석구석을 느릿하게 탐닉한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달콤한 키스 한 번에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다.

형과 나눈 키스들은 전부 강지석을 떠올렸었다. 그 녀석과는 이런 걸 절대 할 수 없을 거라 여겼기에, 이렇게라도 망상하듯 키스하는 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기분이 좋아서 푹 빠져들 지경이었다.

그 과정 속에는 오로지 강지석에 대한 생각만 있었던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술에 취했던 그때의 키스는 그렇다 하더라도 이 집에서 형과 은밀히 나눴던 키스는 강지석을 잠시나마 머릿속에서 ‘잊기 위한’ 키스였다. 그 키스마저 좋았던 이유는 대체 뭘까.

어느새 키스에 빠져버려 얕은 신음을 흘리기 시작한 나를 꽉 끌어안은 형이 키스를 서서히 멈추고서 입술을 핥아준다.

“이런 것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고?”

“그거야…….”

선뜻 대답할 수가 없다. 형이 묻는 의도를 멋대로 짐작한 내 가슴이 키스할 때보다 더 빠르게 요동친다.

‘아니야, 설마…….’

눈을 피하며 머릿속에 들어찬 이상한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내가 여태껏 강지석을 따라 하려 했던 건 맞아. 하지만 그게 정말 단순히 너와 자고 싶어서였을 것 같아?”

형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다가와 내 가슴을 내리눌렀다.

“잠이 필요한 거라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어. 안간힘을 써서라도 계속 버텼다면, 결국 너와 난 서로의 숙면을 위해서라는 똑같은 이해관계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을 거야.”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부정하듯이 저어대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그거라면 정말 말도 안 된다.

“우서야.”

속삭이듯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하다. 유혹하는 것만 같은 그 목소리가 내 시선을 저절로 형에게 향하도록 했다.

눈을 마주친 형은 너무도 진지했다. 되는대로 대충 내뱉는 장난스러운 말 같지도 않았다.

“미안해.”

두서없는 사과가 왜 이렇게 불안하면서도 가슴 떨리는 걸까. 형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예전 같았으면 강지석과 같은 눈매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강지건이라는 사람이 보이는 씁쓸함이라고만 여겨질 뿐이다.

“네가 날 이용해서 강지석을 봤듯이, 나도 강지석을 이용했어.”

형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미안함을 행동으로 표현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형의 입술이 내 눈가와 볼에 닿았다. 얼굴이 간지러워지고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음에도 민망해하며 피하기는커녕, 그저 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형이 하는 이 행위에도 강지석은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태껏 형이 보여온 모습들과 지금의 모습을 함께 비교하듯 떠올려본다.

분명히 강지석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던 모습이었을 텐데, 지금은 왜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

“아직도 내게서 다른 사람이 보여?”

나는 형의 물음에 확실한 답을 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대답해버리면 ‘계약’ 때문이라는 핑계로 당연하게 느껴 왔던 다정함에 다른 의미를 부여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의미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제까지처럼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부담감과 혼란 사이로 작은 기대감이 재차 머리를 들었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모르는 척했다. 그러고 싶었고 그래야만 했다.

더 이상 죄책감을 늘리고 싶지 않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또다시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져 있던 형의 얼굴이 꽉 들어찬다. 형은 내 얼굴을 감싼 채 혼란스럽게 떨리는 눈가를 엄지로 천천히 닦아내듯 쓸어주었다.

“난 처음부터 너밖에 안 보였어.”

가슴에 또 다른 돌덩이가 내리꽂혔다. 묵직한 그것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그동안 쌓여 있던 것들과 함께 어우러져 자리를 잡았다.

“네가 내 전부였다고, 우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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