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허무맹랑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기억 삭제라니, 무슨 맨 인 블랙도 아니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차례 헛웃음을 흘렸다. 감기 때문에 열이 올라있던 머리에 이젠 두통까지 찾아왔다.
“그게 말이 돼요? 기억이 사라……. 하아, 믿었던 내가 바보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이었다니.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는.
이젠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화가 날 지경이다. 이런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링을 해제한다는 말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잃는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에요.”
“저도 쉽게 말한 건 아니에요.”
도진 형은 나와 같은 반응을 자주 본 사람처럼 태연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요. 전 다만 신우서 님에게 그만한 각오가 없다면 링을 해제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각오 문제가 아니잖아요. 말 자체가 허무맹랑한데 어떻게……!”
“기억을 잃는 것보다 이런 링에 구속된다는 것 자체가 더 허무맹랑하지 않아요?”
도진 형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입가에 걸고 있는 씁쓸한 미소조차 어렵사리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진 형의 손끝이 그의 왼손 약지를 뒤덮은 수많은 링을 쓰다듬는다.
“단순한 붉은 띠에 불과한데,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탄하듯 중얼거린 도진 형이 금세 표정을 바꿨다. 편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비밀을 속삭이듯 은밀히 말해준다.
“링을 해제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왜 아무런 정보가 없는지 알아요? 내가 나와 관련된 내용을 지우라고 한 건 왜일 것 같아요?”
“그거야…….”
단순히 눈에 띄기 싫어서? 아니, 그런 단순한 이유였다면 이렇게 치밀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뭐 때문에?
머릿속에 떠오른 내 질문에 답하듯, 도진 형이 스스로 대답한다.
“링이 사라지면 링과 관련된 모든 기억이 사라져요. 날 만난 것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난 그 사람들이 좀 더 확실하게 날 잊게 하기 위해서 나와의 교류 증거를 철저히 없애는 거예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여태껏 링의 해제에 관해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던 게 모두 설명된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링을 해제하기 위해 도진 형을 만난 것조차 잊어버린다. 그렇게 됐을 때 도진 형과 나눈 메시지조차 없다면 당연히 그가 링을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보 또한 남지 않게 된다.
“내 왼손에 머무는 링의 주인들은 다들 그런 게 있었던 것조차 모르고 있어요. 언제나 나만 기억하죠. 나만…….”
어쩐지 도진 형의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사람인지 다른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또다시 그의 낯빛이 어둡게 물들려 했다. 아차 싶은 얼굴을 하더니 도진 형이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난처해 했다.
“오늘 왜 이러나 모르겠네요. 미안해요.”
따뜻한 미소를 담은 도진 형이 그의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장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걸 왼손에만 끼고 있는 걸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링의 소유자들은 누구나 제 링을 볼 수 있어서요’라는 말을 해준다.
“메시지톡방은 나가지 않고 있을 테니까, 뭔가 물어볼 게 있거나 내가 필요하면 그쪽으로 간단히 약속장소와 시간만 보내줘요. 그냥 잡담하고 싶어서 부르는 것도 괜찮고요.”
싱긋 웃어 보인 도진 형이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링을 해제하는 건 결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천천히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봐요. 그리고 상대 분과도 충분히 얘기해보고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떤지 확인해보는 걸 추천할게요.”
상냥한 친척 형 같은 느낌을 팍팍 풍기던 도진 형이 그의 몫으로 준비한 아메리카노를 들고서 살짝 흔들어 보였다.
“커피 고마워요. 다음번에 만나면 제가 살게요.”
마지막까지 상냥한 말을 남긴 도진 형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도진 형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난 그제야 긴장이 풀린 사람처럼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말이 되는 건가.’
그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사람이 기억을 잃는다는 건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그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하물며 일정 기간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링’과 연결된 기억만 사라진다니.
‘내가 형을 잊게 된다고…….’
그 생각을 하자마자 가슴이 무거워진다.
링과 연결된 기억의 주축인 지건 형이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 건 지금도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하물며 그렇게 상대를 잊는 게 나뿐만 아니라 지건 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이상할 정도로 먹먹해지고 커다란 돌덩이가 목구멍을 아프게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싫다….’
아무리 그래도 기억 정도는 남겨주지.
링을 해제하더라도 우리에게 있었던 일 정도는 추억으로 삼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지….
그랬으면 지금처럼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사실 도진 형의 말을 아직도 완전히 믿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링으로 뒤덮인 도진 형의 손가락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걸 봤음에도 그의 이상한 링들잉 다 거짓인 건 아닐까, 의심도 했다.
기억을 잃어야 한다는 말만 아니었으면 믿었을 텐데.
머릿속에서는 도진 형이 링을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반쯤 납득하고 있음에도, 기억에 관한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내가 기억을 잃기 싫다는 거겠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링이 사라지면 지건 형도 잊게 될 거라는 걸.
내가 너무 단순했나 보다. 링이 사라지고 나면 고등학생 때처럼 서로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강지석만큼이나 진짜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면서 지금처럼 다정한 형과 언제나 편하게 대화하고 기댈 수 있을 줄 알았지.
순간 어깨가 떨렸다.
‘링이 사라지고 기억을 잃게 되면……?’
그럼 어떻게 될까.
형에게 난 뭐가 되는 걸까.
동생의 친한 친구, 단순히 그뿐이지 않을까. 교류도 없었고 다정하게 대해본 적도 없는, 그런 ‘행인 1’에 불과한 사람이 될 게 분명했다.
링이 발현하기 직전에 만났던 형은 나도 모르는 두꺼운 벽이 있었고 분위기 자체가 예전과 너무도 달랐으며, 손을 대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너무도 차가운 인상이었다. 기억을 잃고 나면 날 위해 강지석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던 형의 모습이 그때처럼 변하고 말 텐데…….
‘하지만 그게 형의 원래 모습이겠지….’
손대지 않은 눈앞의 새까만 커피처럼, 내 마음과 머릿속 또한 점차 빠르게 식어갔다.
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강지석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던 형의 모습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다.
날 위해 억지로 다정한 척 연기하던 형, 내 욕심에 맞춰주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애와 키스해주던 형, 싫을 게 분명함에도 타인의 미소를 흉내 내야만 했던 형.
새삼 내가 정말 못됐구나 싶다.
나는… 그런 형에게 뭘 해줬던가.
생각하면 할수록 형에게 미안해지고 죄책감이 쌓여만 갔다.
역시나 형에게는 내가 필요하지 않다. 내겐 형의 거짓된 따뜻함이 필요하지만, 그는 다르다.
* * *
집에 돌아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강지석도 없고 지건 형도, 아무도 없다. 그게 왜 그렇게 가슴 시린지 모르겠다. 언제나 따뜻하던 집 안이 오늘따라 너무 추웠다. 이게 그저 내가 감기에 걸린 탓이었으면 좋겠다.
밖에 잠깐 나갔다 들어온 것만으로도 몸이 약해진 것 같다. 도진 형을 만날 때와 달리 숨소리도 조금 거칠어져 있고, 열이 오른 머리가 심장 박동을 따라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손으로 이마를 짚자마자 손이 열기로 가득해지는 거로 보아, 확실히 상태가 악화된 게 틀림없다.
걸을 때마다 몸이 욱신거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욱신거리는 곳은 아직도 멍이 빠지지 않은 배 부분이었다. 복부에 손을 얹고서 꾹 누르고 있으니 그나마 조금 나은 것 같았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서 그대로 지건 형의 방으로 향했다. 어째 같은 집임에도 형 방만 따뜻한 것 같다. 날씨가 그리 추운 게 아니어서 보일러도 안 틀었는데 참 신기하지.
형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형은 감기에 걸린 날 위해서 일부러 날씨에 안 맞는 두툼한 이불을 꺼내주었는데, 이 묵직함이 꽤 마음에 들었다. 마치 형이 날 안아주고 있을 때의 포근함이 든다고 할까.
‘뭐래…. 감기 걸리더니 아주 시를 쓰네.’
머릿속에 든 생각을 비웃어주며 눈을 감았다.
수천 걸음을 걸은 사람처럼 피곤했던 탓에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들 것처럼 잠이 쏟아졌지만 정작 잠들 수 없었다. 그저 생각만 많아졌을 뿐.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즈음, 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돌아올 사람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만 감고 있었다.
방에 들어온 사람은 내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기척을 죽인 채 조용히 옷을 벗는다. 사락거리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몇 번 들린 후에야 천천히 눈을 뜬 내 앞에, 어느새 머리를 쓰다듬어줄 것처럼 다가온 형의 얼굴이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형이 다정하게 미소 지어준다. 강지석을 흉내 낸 미소가 아니라, 형만이 지을 수 있는 잔잔한 호선을.
머릿속까지 아파지는 바람에 나는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형이 강지석이 아니라 그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쿵쿵, 기분 좋게 뛰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