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다짜고짜 연락한 내용을 지우라고 하니, 거부감부터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왜 꼭 그래야 하나요? 저희가 나눈 대화라고 해봐야, 딱히 누굴 보여줄 만한 내용도 아닌데요. 물론 처음 만난 사이니까 불신하시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오해하지 마세요. 전 이런 일로 만나는 모든 분께 모두 같은 부탁을 드리니까요.”
남자가 미안한 얼굴을 하며 눈꼬리를 내렸다. 나는 그를 석연찮게 바라보다가 그와의 대화 내용이 담긴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C : 만나지 않으면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증거가 될만한 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주의라서요.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으니까 부디 이해해주세요.]
때마침 남자가 보냈던 메시지 내용 중에서 딱 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머뭇거리다가 결국 남자의 말대로 그의 눈앞에서 대화 내용 전부를 삭제했다. 지건 형이 새로 사다 준 휴대폰은 내가 쓰던 것과 달리 최신형이라서 아직 조작이 능숙하지 못했고, 그래서 메일과 쪽지까지 삭제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려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남자는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메시지와 메일, 쪽지까지 전부 다 삭제하고서 남자에게 보란 듯이 확인시켜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현재의 내가 매달릴 구석이라고는 이 남자뿐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깨끗이 사라진 내역을 보며, 남자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따뜻한 미소를 걸었다.
“고마워요. 딱히 녹음도 안 하고 계시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부터 얘기할게요.”
“녹음이라니,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그건 좀 너무 앞서가지 않았나.
하지만 남자는 그런 일이 으레 있었다는 것처럼 반응했다.
“신우서 님과 달리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었어요. 그래서 사실은 이런 사람 많은 카페를 약속장소로 잡아주는 걸 보고 저도 믿을 수 있었던 거죠.”
그렇게 말한 남자가 내 휴대폰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지운 내역을 보여줄 때, 남자는 지워진 내용보다도 액정 화면의 가장 상단 부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휴대폰으로 녹음 중인지 체크한 건가.
생각하면 할수록 무슨 되지도 않는 스파이로 의심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게 티가 났는지, 남자가 거듭 미안해한다.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이렇게 확인해야만 할 이유가 있으니까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알았어요.”
여전히 수상한 사람임에는 변함없으나, 그보다도 듣고 싶은 건 그가 말하고자 했던 ‘본론’이었다. 링을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을 듣게 된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린다.
“링은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해제해드릴 수 있어요.”
남자의 말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간단하게 해제될 수 있는 건가?
남자가 내 왼손을 그의 오른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러더니 갖가지 붉은 링으로 뒤덮인 왼손 약지 끝으로 내 링을 간지럽히듯 쓸어준다.
“링을 해제하면 신우서 님의 링은 제 왼손 약지로 옮겨와, 다른 링들과 함께 영원히 머물게 될 거예요. 한쪽의 링이 해제되면 연결되어 있던 다른 링 역시 사라지게 되니, 더 이상 불면증을 겪지 않게 되죠.”
바라마지 않던 내용이었다. 서로의 링이 사라지고 더는 불면증으로 인해 억지로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면 지건 형도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나도 힘들었…나?’
나 자신에게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링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고 강지석과 형에게 죄책감을 가졌던 건 사실이었으나, 솔직히 모르겠다. 형과 링이 이어진 채 그리 긴 시간을 보낸 건 아니어서일까. 힘들었다기보다는 형에게 링을 빌미로 위로받고 기댈 수 있었던 게 더 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허전한 느낌도 들었다. 왼손 약지에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새겨져 있던 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상상은 아직 어색하기만 하다.
“정말 링을 해제했으면 좋겠어요?”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더니, 남자가 속삭이듯 물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흠칫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형과 이어진 이 링은, 내게 있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네. 해제…하고 싶어요. C 님께서 정말 링을…….”
“한도진이에요, 제 이름. 편하게 도진 형이라고 불러줄래요?”
뒤늦게 이름을 말하며 호칭까지 정해준 남자가 어째 안타까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읽지 못해, 난 하려던 말을 쭉 이어서 말했다.
“…한도진 형이 정말 링을 해제할 수 있는 거라면, 꼭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내 선택은 말을 다 내뱉을 때까지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링을 해제해서 형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고, 나 역시 가슴 속을 채운 죄책감을 떨쳐내고 싶었다. 링이 해제되고 나면 형이 예전처럼 다시 벽을 치듯 돌아설지라도 역시 이게 맞는 거였다.
한도진이라는 남자는 한동안 내 왼손 약지에 걸린 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가슴은 자꾸만 빠르게 뛰었고,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올지 몰라 걱정과 긴장을 반복했다.
도진 형의 입술이 천천히 열려갔다.
“해제하려는 건 오로지 신우서 님의 의지이죠? 상대방분의 생각은 알고 있나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형도 링을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형의 생각? 당연히 해제하고 싶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해제하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형은 링 때문에 억지로 애인과 헤어져야 했고, 3년간 확연히 벌어져 버린 거리가 무색하게도 그의 집 안에까지 날 들여놔야만 했다. 동생을 좋아하면서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다가 우울해지기 십상인 나를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독여줘야 했고, 싫어도 강지석처럼 웃어줘야 했다.
링만 없었다면 형이 그렇게 날 챙겨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말은 안 해도 꽤 귀찮아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돌멩이 정도가 아니라 묵직한 바위를 넣어둔 것만 같다. 형이 날 귀찮아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자마자 죄책감의 무게가 점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다.
‘역시 해제해야지.’
이 자리는 한도진 형이 하도 신신당부하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몰래 나왔지만, 지건 형에게는 솔직히 말해야 할 것 같다. 링에 대해서만큼은 나보다도 형이 가장 큰 피해자이니만큼 이제 걱정할 것 없다고 밝은 척하며 말해줘야 했다. 그러고 나선 나도 홀가분하게 강지석의 집을 나와 어디 작은 원룸이라도 하나 얻어서 들어가야겠지.
‘하아, 진짜…….’
원룸에서 살던 당시의 썰렁한 매트 위를 생각하니 가슴이 착잡하다. 이런 순간에도 왜 난, 형의 곁에서 편안히 잠들던 날들을 떠올려버리는 걸까.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나만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이젠 턱까지 괸 채 날 바라보고 있던 도진 형과 눈이 마주친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 두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도진 형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링을 해제하기 위해선 두 사람 모두의 뜻이 같아야 해요. 링을 해제하는 것 자체는 그런 제약이 없지만, 제 나름의 방침이라고 해야 할까요.”
서글서글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신우서 님도 아직 다짐이 부족한 것 같으니, 좀 더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그때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요.”
“예? 잠깐만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링을……!”
“신우서 님.”
도진 형의 목소리가 낮게 내리깔렸다. 그 안에는 뜻 모를 힘이 있어, 다급한 내 입을 저절로 다물게 만들었다.
“링을 해제하는 건 쉽지만, 뒤이어 찾아올 결과는 그리 쉽게 생각할만한 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도진 형의 눈동자가 아련하게 흔들리다가 천천히 내리깔린다.
“링이 해제된다는 건, 이어진 인연을 비틀어 없앤다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 의문을 담은 눈으로 도진 형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입 안에서 말을 고르는 듯하던 도진 형이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다.
“인연이 비틀려 사라지면, 그 이전의 흔적까지도 모두 지워지게 돼요. 그래야만 링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거든요.”
“이전의 흔적…이라는 게 뭔데요?”
내리깔렸던 도진 형의 눈동자가 그제야 나와 마주친다. 도진 형의 눈동자에 비친 내 눈은 왜인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억….”
도진 형의 입술 사이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로의 인연을 없애기 위해, 각자가 가진 상대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지게 될 거예요.”
그 말은 순간적으로 뇌가 정지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