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07. 신우서
하루 내내 초조해서 휴대폰을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C : 저는 직접 링의 해제와 연결이 가능한 ‘커넥터(Connector)’거든요.]
C라는 사람이 밝힌 그의 정체는 아직도 현실감이 없다.
링의 해제와 연결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정말?
그럼 왜 여태껏 그리도 찾아 헤맬 땐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던 걸까. 거기다가 여기저기에 퍼진 링 해제 관련 글에도 커넥터라 불리는 사람에 관한 건 전혀 없었다.
그저 링 자체가 도시 전설 같은 느낌이었듯,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도시 전설로서 링을 알아보고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의 소문이 있었을 뿐이다. 하도 정보가 없기에 누가 지어낸 루머에 불과하다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게 커넥터를 의미하는 거였다는 걸 알 것 같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건 그 소문의 진원지가 커넥터를 아는 누군가일 텐데, 어째서 ‘링을 알아보고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에서 그쳤는가이다. 커넥터가 밝힌 내용대로라면 그 사람의 핵심은 ‘링의 연결과 해제’일 텐데.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의심스러운 게 있다.
상대가 정말 링의 해제와 연결이 가능하긴 한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의심이다. 이는 여태껏 커넥터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이 제대로 돌지 않았던 것과 연관 지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사람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조심스럽다는 것도 그 의심에 한몫했다.
휴대폰을 들어 지난 대화 내용을 확인했다.
[나 : 정말 링을 해제할 수 있어요? 어떻게요?]
[C : 그건 이런 채팅으로는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 만나서는 조금…….]
[C : 오래 시간 뺏진 않을게요.]
[나 : 솔직히 전 아직 C님을 확실히 믿기가 어려워요.]
링의 해제를 바란 건 나임에도 그럴 수 있다는 사람이 불쑥 나타난 것에 대해 순수히 믿고 그렇게 해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요즘 세상은 별의별 것을 다 이용해서 사기를 치니, 상대에겐 미안해도 의심할 수밖에.
[C : 그럴 만해요. 하지만 만나지 않으면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증거가 될만한 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주의라서요.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으니까 부디 이해해주세요.]
C라는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하긴, 쪽지나 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이 사람은 너무 신중하긴 했지.
[C : 정말 링을 해제할 생각이 있으신 거라면 꼭 한 번 만나주세요. 만날 장소는 신우서 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정해주시고, 시간도 제가 전적으로 맞출게요. 그래도 불안하시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만나도 괜찮아요. 제가 목소리를 줄이면 되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의심과 함께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C : 재차 말씀드리지만, 직접 만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어요.]
이 사람의 말도 맞는 말이다. 만나지 않으면 이 사람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다. 언제까지고 내 링이 찍힌 사진만 들이밀 수도 없으니까.
결국 난 커넥터라는 사람과 약속을 잡아버렸다. 아직 감기 기운이 있기도 하고 내 곁에 계속 함께 있어 주는 지건 형도 있었기에 한참 뒤에나 만날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다행히 형은 오늘 급한 미팅이 잡히는 바람에 서너 시간 정도 집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이때다 싶어 약속을 잡긴 잡았는데 확실히 감기 기운이 세긴 한 건지, 겨우 내려가던 열이 다시 오르는 것 같았다.
‘들키면 잔소리 좀 듣겠는데.’
좀이 아니라 귀가 아플 정도로 들을 것 같다. 강지석이든 지건 형이든.
그러고 보니 요즘 강지석이 좀 이상하다.
여태껏 내가 아프면 이것저것 살뜰히 챙기며 그와 동시에 부모님도 안 하는 잔소리를 하루 내내 해대곤 했는데, 어째 이번엔 조용하다. 챙기는 건 그대로여도 뭐랄까, 말을 아끼는 느낌이라고 할까. 가끔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한 게, 어째 날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게 된다.
친구 사이에 눈치를 보긴 왜 봐. 사람 서먹하게.
분명 한집에 살고 있으면서 어째 더 멀어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 밑바닥에는 민아 누나라든지 그로 인한 내 못난 감정이 깔려있었기 때문이지만, 강지석까지 거리를 두는 느낌이 드니 내 기분은 자꾸만 아래로 깊이 가라앉아갔다.
강지석이 내 눈치를 보던 장면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지건 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답답한 마음에 강지석의 그런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잔잔히 웃어주었다.
“지석이가 아직 어려서 그래. 네가 다쳤다고 하니까 녀석도 조심스러운 거겠지.”
강지석과 닮은 얼굴로 훨씬 어른스러운 미소를 짓던 형을 떠올리니 내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감돈다. 그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형이 좀 불편하고 어색했는데, 지금은 하도 같이 잠들고 위로까지 받다 보니 너무도 편안한 사람이 되었다. 형 품에 안겨서 잠드는 밤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친해져 버렸다.
‘그러니까 더 해제해야지.’
내가 형을 편하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의 링은 사라져야만 했다.
그런 착하고 멋진 형이 내게 얽매여 있는 건 역시나 아닌 것 같다. 링 하나 때문에 형이 원하는 삶에 제약을 받는 건 원치 않는다.
…아니, 사실은 내가 너무 겁쟁이라서다.
언젠가 형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게 과연 어떤 눈빛을 보내게 될까.
지금이야 내게 자상하다지만, 내가 짐짝이 되는 순간에도 똑같이 대할 수는 없을 거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고 싶어도 내가 얽혀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형은 당연히 날 원망할 거다.
링은, 형의 자유를 뺏는 최악의 족쇄다.
어느새 나는 링으로 인한 내 문제보다도 지건 형에게 끼칠 해악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나는 상관없어, 하지만 형은 안 돼, 형이 날 방해물처럼 바라보는 건 싫어.
‘어린애 같아….’
내게 이런 어린애 같은 생각이 가득하다는 게 웃기다. 타인에게 미움받는 걸 즐기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나는 그게 특히나 싫었다. 이래서 가정환경이 중요한 건가 싶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누군가의 다정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머릿속은 자꾸만 어린애가 되어간다.
그래서 여태껏 강지석에게 패기롭게 고백해보지도 못했다.
나는, 여자만 좋아한다던 강지석에게 시원스레 차이고도 그 녀석과 편안히 지낼 수가 없다. 그저 차이기만 하면 다행이지, 한순간이라도 강지석이 내 눈을 피한다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내 쪽에서 강지석과 거리를 두게 되지 않을까. 그게 내 가슴을 자학하는 일이라 해도.
‘그만, 그만.’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꾸만 잡생각을 한다.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을 채운 생각을 떨쳐내었다. 깊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머릿속을 정리한 뒤, 휴대폰을 들었다.
오후 2시 28분.
만나기로 한 시간은 2시 30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번화가의 사람 많은 카페 2층에 자리를 잡았는데, 아직 계단 쪽에서는 아무도 올라오고 있지 않다.
1층도 그랬지만 2층도 꽤 시끌시끌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그중에는 혼자 앉아있는 사람도 많아서 아무래도 커넥터라는 사람이 도착하면 내 위치를 알려줘야 할 것 같다.
‘인상착의라도 보내둘까.’
곧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바짝 긴장되었다. 적당히 식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뒤, 상대에게 내 인상착의를 하나하나 적어갔다.
꽤 세세하게 적고서 그대로 전송을 누르려는 찰나, 2시 30분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홀로 앉은 테이블을 누군가가 똑똑, 문을 노크하는 것처럼 두드린다.
“신우서 님이죠?”
흠칫하며 고개를 드니, 정면에 웬 남자 한 명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다. 지건 형 또래 정도로 보이는 그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좀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예? 어떻게 아셨…….”
나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테이블을 노크하던 남자의 왼손에 시선이 닿았던 탓이다.
남자의 왼손 약지에는 내가 사진으로 봤던 것과 같은 붉은 실 같은 게 이리저리 얽혀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붉은 실이 워낙 많아서, 멀리서 보면 왼손 약지만 상처투성이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내 시선이 약지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아챈 남자가 손끝을 뻗어 내 링을 가리켰다.
“여기에 링을 가진 사람은 신우서 님뿐이라서요.”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링을 볼 수 있다고 했지.
실제로 만나고 보니 너무 신기했다. 여태껏 나와 지건 형만 볼 수 있었던 우리의 링이 타인에게도 버젓이 보인다는 사실이 내 가슴까지 설레게 했다.
남자는 내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 자리에는 내가 미리 준비해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있었는데, 그걸 보고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모습이 같은 남자가 봐도 호감이다. 어려운 사람이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남자는 꽤 편안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인상과 달리, 남자는 친해지기 위한 기나긴 서두 대신 다른 걸 이야기했다.
“만나자마자 죄송하지만, 저희가 나눈 대화 내역부터 지울까요?”
“…예?”
서로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남자가 꺼낸 말은 날 당황하게 했다.
“메일과 쪽지까지 전부 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