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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43화 (43/99)

43화

강지석의 말은 내게 썩 환영받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어둔 선이 없어? 네가?

“네게 우서가 특별한 건 알겠지만, 그래 봤자 친구 아냐? 친구라는 틀이야말로 네가 그어둔 선인 것 같은데.”

강지석의 눈가가 예사롭지 않게 찌푸려졌다. 흔들리는 눈을 한 채 굳게 다문 입술이 금방이라도 거친 말을 토할 것 같았다.

그런 강지석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감정에 확신도 없으면서 함부로 끼어들지 마. 최소한 난 진심이거든.”

“형의 진심은 형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만도 못하잖아.”

하여튼 지난 연애사 때문에 저놈에게 제대로 찍히긴 한 모양이다.

피식 웃으며 말이 나온 김에 담배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었다.

“내가 우서를 포기하게 만들 자신 있으면 네가 만든 친구의 틀부터 깨봐.”

“못할 것 같아?”

“아니, 지금의 넌 충분히 할 수 있을걸? 하지만…….”

이때만은 우서의 감정이 어딜 향해 있는지도 모르는 둔한 강지석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친구라는 틀이 깨진 우서가 널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 본 적이나 있어?”

강지석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넌 나한테 안 돼.

네가 아무리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해도 이뤄질 건 아무것도 없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친구라는 틀에 오랫동안 묶어온 신우서라서,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지금만 해도 우서가 조금이라도 멀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주제에.

강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친구로라도 가장 가까이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 괜히 틀 부수려다가 애 겁먹어서 도망가게 만들지 말고.”

물론 그렇게 도망가주면 내가 한입에 잡아먹어 버릴 테지만, 기왕이면 스스로 내게 안겨 오는 게 좋다. 강지석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아니라, ‘강지건’에게.

그걸 위해서 강지석은 아직 좀 더 이용당해줘야 했다.

* * *

깊은 어둠에 접어든 적막 가득한 방에는 새근거리는 숨소리 하나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일로 피곤했던 우서는 금세 푹 잠들었고, 웬만해선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린 채 잠든 우서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리카락부터 얼굴을 구성하는 모든 게 다 사랑스러운데, 역시나 턱 근처의 상처가 너무 뼈아프다. 저걸 볼 때마다 최진호의 턱을 부숴버리고 싶어서 당장이라도 그를 불러내고 싶을 지경이다.

험한 생각을 추스르며 우서의 얼굴에 입술을 내렸다. 얼굴 곳곳에 다정히 입을 맞춰주는데도 우서는 깨어나기는커녕, 오히려 듣기 좋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참지 못하고 입술에도 입을 맞추고, 아쉬운 대로 그의 말랑한 아랫입술을 핥다가 살짝 당겨주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따뜻한 숨과 얕은 신음이 자꾸만 날 자극한다.

더 입술을 비볐다가는 잠든 우서를 그대로 탐하게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더 나아가기에는 불안요소가 너무 컸다. 가장 큰 이유로, 우서가 내게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만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조급함은 모든 걸 틀어지게 한다.

살아가면서 직접 느낀 가장 큰 명언이었다.

그 증거로, 내 마음을 깊이 파악하지 않고 조급하게 구는 바람에 3년의 세월을 날렸다. 조금만 버텼으면 우서와 내가 링으로 이어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우서가 강지석을 더 깊이 마음에 둘 겨를도 없이 내게로 시선을 붙잡아 둘 수 있었을 거다. 스스럼없이 내게 기대어 웃어주던 그때였다면.

‘괜찮아. 멀리 돌아오긴 했어도, 지금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변수 중의 변수로 강지석이 있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매트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우서의 왼손을 내 왼손으로 깍지껴 그러쥐었다. 어둠 속이라서 실루엣은 보여도 링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뛰고 몸이 안정되어가는 게 느껴지는걸.

우서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려 저 끝에 놓여 있는 노트북 가방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노트북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을 테지만, 굳이 그걸 열어서 우서가 뭘 했는지 일일이 조사할 필요는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내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볼품없이 깨진 휴대폰을 들어 우서의 메일함을 들여다본다.

받은 메일함을 내려다본 나는 입꼬리가 끌려 올라가는 걸 느끼며 눈을 빛냈다.

우서에게 굳이 노트북을 가져다주고 강지석과의 대화를 핑계로 시간을 끌었던 보람이 있다.

우서의 받은 메일함에 있던 읽지 않은 메일, 바로 C의 메일을 읽은 흔적이 남아 있다. 클릭하자마자 흔적이 남을 걸 우려해서 일부러 읽지 않고 기다려왔는데, 다행히 우서가 오늘 바로 확인해 준 덕분에 나 역시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신체접촉이 끊어진 상태로는 우서가 금세 깰 수 있었기에 그에게 다가가 다시금 손을 잡아주었다. 때마침 약간 뒤척이는 듯하던 우서가 곧 안정을 되찾는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또다시 입술에 짧게 키스하고 말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메일함을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내 입가에는 우서를 향한 따뜻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왔던 C의 메일을 확인함과 동시에 얼굴이 딱딱히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사진에 대한 분석이 끝났습니다.]

[웃어 님은 발현한 지 한 달가량 된 링을 보유한 23세 남자분이시군요.]

상대는 우서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용한 점집에 몸담은 무당이 처음 본 손님의 신상부터 착착 읊는 건 줄 알겠다. 그만큼 상대는 우서의 신상을 충분히 알아낸 듯했다.

맥락상으로 보자면 그걸 알아내게 된 건 우서가 보낸 사진 때문이었다. 남이 보면 그저 평범한 왼손 사진. 그러나 내 눈에는 누군가에게 링을 보여주기 위해 그곳에 초점을 맞춘 사진이었다.

[짝이 되는 링의 상대 분은 7살 차이의 연상인 남자분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상대는 우서만 알아낸 게 아니라, 링의 상대인 나에 대해서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고작 왼손 약지 사진 하나로.

뒤이은 문장에 심장이 덜컥, 기분 나쁘게 내려앉았다.

[링의 해제를 원하시던데,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요?]

‘링의 해제를…….’

목이 딱딱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천천히 돌려, 잠든 우서를 바라보았다. 휴대폰의 희미한 빛 덕분에 아까보다 좀 더 잘 보이게 된 우서의 얼굴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근심 하나 없이 푹 잠들어 있었다.

우서의 손을 쥔 손아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링을 해제하려고……? 누구 마음대로?’

링의 해제법을 찾고 있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낯선 사람에게 대뜸 의지하려 할 줄은 몰랐다. 분명 의심하고 있었을 텐데도 굳이 링이 있는 왼손 사진을 보낸 것도 그렇고, 어떻게 해제하게 될 줄도 모르면서 그 C라는 사람은 왜 믿으려 하는 건지.

‘그냥 해제하지 않고 살면 되잖아, 우서야.’

해제법은 없어.

없어야 해.

있다고 해도, 내가 치워버릴 거거든.

그러니까 포기하고 지금처럼 나와 연결되어 있으면 되잖아. 이대로 쭉, 평생 이어져 있으면 되는 거잖아.

가슴이 따끔거리다 못해 욱신거릴 정도로 아파졌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연애만 해온 형에게 우서를 주느니, 차라리 내가 가질래.”

강지석이 했던 말이 아까보다 훨씬 큰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후벼팠다.

‘강지석…, 옛날부터 타이밍 말아먹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이가 갈렸다.

이제야 겨우 우서의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우서는 그 벽 너머에 있던 사람이 강지석이 아니라 강지건이라는 걸 알면서도 똑바로 바라봐 주려 했다.

그런 상황에 뭐?

링을 해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강지석이 신우서를?

자기 마음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둔한 새끼가 우서를 가져?

‘웃기지 마, 강지석.’

거대한 파도가 되어 덮쳐오는 불안감을 꾹 억눌렀다.

링이 해제되면 우서를 옭아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강지석이 뻗은 손을 우서가 거절할 리가 없다.

날카로워진 눈을 내려 남은 내용을 확인했다.

[저를 믿고 링의 해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하신다면 오픈 메시지톡 https://open.kakao.com/o/sjC4lx2b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혹시라도 링의 해제에 관한 생각이 바뀌셨다면 이 메일을 곧바로 삭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픈 메시지톡 주소를 가장 먼저 복사했다. 하지만 그쪽으로 선뜻 연락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이 내용은 오로지 웃어 님께만 드리는 것이며, 타인에게 오픈 메시지톡의 주소가 유출된다면 예고 없이 방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대로 접촉을 시도한다면 상대는 이 경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오픈 메시지톡방을 삭제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은 걱정할 것 없다.

우서는 본인의 휴대폰이 부서져서 복구가 불가능할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아예 새로운 휴대폰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손에 부서진 그의 휴대폰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휴대폰을 살짝 돌려 옆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홈과 기다란 뭔가가 들어있는 자리가 손끝에 느껴진다.

USIM에 들어있는 정보라면 우서가 C와 어떤 메시지를 나눴는지 알 수 있을 거다. 그 안에는 이런 메일이 아니라 채팅에 준하는 실시간 대화가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겠지. 이미 서로 간에 읽음 표시가 되어있을 테니 내가 뒤늦게 읽는다고 한들 의심받을 일은 없다.

메일의 내용과 접근법으로 보아, C라는 상대는 링 보유자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전해지는 ‘커넥터(Connector)’가 분명했다.

링을 연결해줄 수도 있고, 해제해줄 수도 있는 특별한 능력자이자, 외부에 노출되는 걸 굉장히 꺼리는 사람이었다.

진작에 커넥터를 알고 있었음에도 우서에게는 한 번도 그에 대해 말해주지 담지 않았다. 그가 링을 해제하지 않기를 바랐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데, 설마하니 C가 먼저 우서를 찾을 줄은 몰랐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우서보다 먼저 C를 찾아낸다.

그리고 무슨 방법을 써서든, 그가 링을 해제하는 걸 막는다.

이번만큼은 최진호처럼 단순한 협박 정도로는 끝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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