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최진호의 신음 섞인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전화를 끊고 나니 조금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정도로 끝낼 게 아니라 심신 모두 도저히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밟아주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혹여 최진호의 폭행 사건까지 드러나서 우서가 연관되는 건 원치 않았다. 그에게는 최진호가 뒹군 자그마한 흙탕물 한 방울조차 튀지 않았으면 했다.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의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다. 그 몸으로 혼자 샤워를 하고 있을 우서를 생각하니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부름에 응답하듯 들려온 건 물소리에 채 묻히지 못한 우서의 구토 소리.
다급히 안으로 들어가자, 알몸으로 주저앉아 헛구역질하는 우서가 보였다. 구토로 인한 생리적 눈물이 눈가에 고여, 보기만 해도 안쓰럽고 위태로웠다.
상체를 일으켜 안아주자마자 복부에 남은 넓은 멍 자국이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그나마 나아졌던 기분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듯했다.
나 때문에 생긴 흔적이 너무도 뼈아팠다. 마치 내가 직접 폭행이라도 한 것 같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인해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었다.
“…신기하네.”
목이 멘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내게, 품속의 우서가 편안해진 숨을 흘리며 속삭였다.
“형이랑 있으면 참… 신기한 게 많네요. 만병통치약, 뭐 그런 거 같아요.”
우서의 말은 내 가슴을 다른 방향으로 뛰게 만들었다. 자괴감으로 얼룩져 흥분해 있던 가슴이 기분 좋은 울림을 퍼뜨리며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차오르던 죄책감과 자괴감이 점차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져 갔다.
우서의 말은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도 우서는 그 무엇보다 신기한 명약이었다.
우서의 몸을 생각해서 직접 샤워를 시킨 후, 그를 내 침대에 앉혀주었다. 아직 식지 않은 따뜻한 죽과 몇 가지의 반찬을 준비해 쟁반에 담아 기분 좋게 방에 들어서자마자.
“형, 혹시 우산은…….”
손끝이 덜컥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없었어. 누가 주워갔거나 날아갔겠지.”
사실은 두 가지 모두 아니었으나,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그냥 우서가 더 이상 그 우산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유치하지만, 이때만큼은 내 우산으로 이 방을 가득 채워서라도 우서가 오직 내 물건만 생각했으면 했다.
우산이 없었다는 말에 우서의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그 분위기를 깨기 위해 음식이 담긴 쟁반을 놔주었지만, 우서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틈에 침대 옆에 의자까지 가져와 앉으니, 숟가락까지 내리고는 지금 함께 먹자며 권유한다.
귀엽고 착한 신우서.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챙기는 걸 마다하지 않는 그가 오늘만은 순수히 좋기만 할 수가 없다. 최진호와 강지석이 자꾸만 머릿속을 기분 나쁘게 건드려대서 짜증이 날 정도다.
그뿐 아니라 거실에 놔둔 내 가방 속 우서의 휴대폰이 유독 신경 쓰인다.
[보낸 사람 – 웃어]
[받는 사람 – C]
[안녕하세요. 쪽지 나눴던 웃어입니다.]
[말씀하신 왼손 약지 사진을 첨부해서 보내드려요.]
[그런데 이런 사진만으로도 정말 절 도와주실 수 있으신 건가요?]
[제겐 너무 절실한 일이라서 부디 해결법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C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우서가 C라는 사람에게 보냈던 메일이었다.
‘절실한 일….’
우서가 처음 메일을 주고받는 사람에게 왜 왼손 약지 사진을 첨부해서 보냈는지 확실치는 않다. 마음 같아서는 어떤 경로로 알게 된 건지 휴대폰을 좀 더 조사해보고 싶었지만 액정이 이리저리 깨져 있어서 터치가 잘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 보니 기껏해야 메일함을 둘러보는 게 다였다.
‘그 메일을 확인해야 할 텐데.’
우서에게 도착한 ‘C’의 메일. 그 안에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이 들어있음을 확신했다.
식사를 멈춘 우서를 우려해서 그다지 식욕이 돋지 않음에도 칼로리 바를 입에 물어야 했던 나는 그에게 새 휴대폰을 사다 주겠다는 말을 건넸다. 역시나 우서는 그가 직접 사겠다고 했으나 결국은 내게 휴대폰 구입을 일임하게 되었다.
그거면 된다.
비록 부서진 휴대폰이지만 이대로 조금만 손을 본다면 와이파이를 이용해 우서의 메일을 계속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서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보다는 조급함이 먼저 찾아왔다. 이런 게 결코 그 어떤 말로도 정당화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우서가 C에게 보낸 메일과 상대방이 보낸 미확인 메일에서 자꾸만 기묘한 불안감이 퍼져 나온다.
“오늘 뭔가 좀 이상하세요.”
나도 모르게 티를 냈나 보다. 조급함과 불안 때문에 평소처럼 우서를 향해 웃어줄 여유조차 없었다는 걸 깨닫고서 일부러 미소를 보였다.
“굳이 일일이 흉내 내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형이 형답게 웃었으면 좋겠는데.”
나답게?
우서가 원하는 미소라면 강지석의 것일 텐데, 왜 나다운 걸 원하는 걸까.
실낱같이 따뜻한 뭔가 안에서부터 흘러나와 내 미소의 형태를 바꿨다. 강지석을 흉내 내야만 했던 높이 올라간 입꼬리가 점차 원래의 내 것처럼 차분히 내려앉는다.
그걸 본 우서가 마주 웃어주며 말한다.
“지금이 훨씬 낫네요.”
분명 얼굴은 강지석과 너무도 닮았을 터였다. 그간 봐왔던 동생의 미소도 어렵잖게 흉내 낼 수 있었고, 앞머리를 조금 다듬어 내렸을 땐 잠결에 우서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다.
그렇게나 강지석과 닮아있던 내가 처음으로 우서 앞에서 ‘강지건의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우서는 그게 훨씬 낫다고 말해준다. 강지석의 미소보다 훨씬 낫다고…….
우서와 바에서 술을 마실 때 내가 그에게 건넸던 말이 생각난다.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해주는 행동이면 누구나 의미를 두고 싶어 하잖아.”
내 가슴이 미친 듯 뛰는 걸 보면 그야말로 정답 중의 정답이다.
의미를 두고 싶었다. 우서가 내게 강지석을 투영해 보기보다는 강지건 자체를 보고 싶어 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강지석의 흉내에 만족할 수가 없다. 자꾸만 거칠게 날뛰는 심장이 그에게 강지석이 아닌 강지건을 쑤셔 넣으라고 강요한다.
‘조급해하지 마, 강지건.’
C의 메일을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조급해하던 나를 진정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도 내 미친 심장을 진정시켰다.
아직은 아니야.
거칠게 밀어붙여선 안 돼.
천천히, 놀라지 않게 천천히 다가가서 통째로 삼켜야지.
삼켜졌다는 것조차 모르도록.
* * *
강지석에게는 우서의 상태를 다소 완화해서 알렸다.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과 복부의 심한 타박상을 숨긴 채 약간 접질린 손목과 얼굴의 작은 상처, 그리고 다소 열이 있다는 정도만 알려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강지석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우서를 걱정하더니, 내 방에서 그를 재우는 것까지 크게 반발했다. 그래도 가장 큰 결정권을 가진 우서가 강지석이 아닌 나를 택할 걸 알고 있었기에 길게 실랑이할 것도 없었다. 실상 우서에게는 강지석과 함께 잠들고 싶어도 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일 테지만, 이때만큼은 내가 선택받았다는 것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승리감에 도취할 것 같았다.
꽤 진지한 눈으로 우서를 바라보던 강지석은 내게 눈짓으로 밖으로 향할 것을 제안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제법 살벌한 시선이 나를 노려본다.
“정말 빗길에 미끄러진 거 맞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본인이 그렇다는데.”
강지석의 눈매가 나를 따라 하듯 치켜 올라간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빗길에 미끄러졌는데 손목 접질리고 그게 끝이라고? 길바닥을 잘못 짚어서 접질릴 정도면 손 근처에 조금이라도 까진 흔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가끔 강지석은 평소의 둔함이 다 연기였나 의심될 정도로 예리하다. 그래, 신우서만 걸려 있으면.
“단순히 빗길 미끄러진 거 아니지? 뭔가 다른……!”
“망상은 거기까지 해. 우서 본인이 그렇다잖아. 우리가 뭘 더 캐물어서 얘기해 줄 것 같았으면 벌써 털어놨을 거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우서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렇게 하면 강지석도 더는 추궁하지 못할 걸 알고 있다. 신우서에게만은 예전부터 약해도 너무 약했던 녀석이었으니까.
“…알았어.”
역시나 강지석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발 물러났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굳이 한 마디를 더 얹는다.
“아픈 애 건드리지 마.”
나도 모르게 강지석을 향해 조소했다.
“아프지 않으면 건드려도 되고?”
“형, 나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야.”
“나도 알아. 그래서 나도 장난 없이 경고나 하려고.”
강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똑같은 눈높이의 그를 노려보았다. 강지석의 왼쪽 가슴을 검지로 꾹 누르며 위협하듯 목소리를 깔았다.
“친구까지만 해. 네가 그어둔 선 넘지 말고, 친구까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아무리 동생이라 한들, 절대 가만히 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손끝에 닿은 빠른 박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손을 떼려는데, 가슴을 짚은 손가락이 강지석에 의해 꽉 붙잡힌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강지석의 눈이 나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난 애초에 우서한테는 그어둔 선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