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 머릿속은 온통 암울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꾸만 ‘만약’이라는 단어가 붙은 생각이 앞다퉈 뛰쳐나와 혼란스럽다.
만약 메시지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만약 우서의 휴대폰에 위치추적 앱을 설치해 두지 않았더라면.
만약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 생각의 끝에는 최진호에게 폭행당한 채 링이 있는 손가락을 잘리고 말았을 우서가 시체처럼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상상력이 그리 좋은 편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이때만은 피투성이가 된 우서의 모습이 너무 선명했다.
‘내 탓이야.’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최진호가 다시 찾아왔을 때 좀 더 확실하게 경고했어야 했다. 워낙 내게 맹목적인 녀석이었던 데다가 사귀는 동안 심기 한 번 건드리지 않았던 터라 방심하고 말았다. 설마하니 그딴 미친 짓을 할 줄이야.
그럼에도 큰일을 당한 당사자 신우서는 병원을 나오며 내게 당부했다.
“그 사람, 신고하지 말아 주세요.”
착해 빠졌어.
어떻게 그놈을 용서하려 들어.
올곧은 심성의 우서는 자신에게 링이 있는 탓이라고 했다. 나와 이어진 링 때문에 최진호가 억지로 헤어지게 되었으니 그가 앙심을 품을 만도 했다고. 그러면서 덧붙이길 내가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줬으니 됐지 않냐는 말을 하는데,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러면 안 돼, 우서야. 네가 어떤 꼴을 당했는데.’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차 안에서 우서와 이마를 맞대며 한숨을 삼켰다. 그놈이 벌인 일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서 몸에는 열이 오르고 있었다. 차디찬 소나기 속에서 그토록 얻어맞고 손가락까지 잘릴 뻔했는데 치료 좀 받았다고 벌써 나아질 리가 없다.
주차장을 나서서 집으로 이동하는 동안, 본능처럼 미안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서가 다친 건 전적으로 내가 그 새끼의 위험성을 간과한 탓인데.
우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그의 주변까지 넓게 바라봤어야 했다. 내 주변까지도.
내 탓이다. 내가 다 잘못한 거야. 내가… 우서를 다치게 한 거다.
하지만 내 품에 안겨 있는 우서는 정말 모르겠다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형이 왜 미안해요?”
“왜냐는 말이 나와? 널 위협한 그 새끼, 내 전 애인이야.”
“하지만 형이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미간이 살풋 일그러졌다. 우서의 말이 맞긴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난데, 당연히 내가 미안해할 일이지 않나.
“내가 처신을 잘못한 결과인데 그래도 내 탓이 아니야?”
“음,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은 형이 어떻게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은데요.”
이해되지 않는 상황. 이해되지 않는 말. 이해되지 않는 신우서.
그 모든 것이, 답답하게 꽉 막혀있던 내 머릿속을 톡톡 건드렸다. 답지 않게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며 고개 숙이고 있던 나를 우서가 정신 차리게 한다.
내 탓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런 너를 어떻게 안 좋아해.’
어둡게 잠식되어가던 머릿속이 금세 맑아진다. 멈출 것처럼 둔하게 뛰던 심장이 그새 활기를 되찾아 쿵쿵 울려댄다. 열탕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몸에 기분 좋은 열기가 퍼졌다. 내가 조금만 더 인내심 없고 조급한 사람이었다면 우서의 몸도 생각지 않고 그를 감정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을까.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우서는 그 아픈 몸으로 웬 우산을 가지러 가겠다고 말했다. ‘강지석’에게 받은 우산을.
머릿속이 금세 차가워지고 들뜬 기분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이 상황에서도 본인의 몸보다 ‘강지석의 물건’을 우선하며 직접 찾으러 나가려는 그가 너무도 답답했다.
강지석. 강지석. 강지석.
그래, 네 머릿속엔 언제나 강지석밖에 없지. 널 구해준 건 나인데도 그저 강지석만 보이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기분이 비틀린다.
여태까지 나와 닮은 동생을 원망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감사했다. 나와 강지석이 닮았기에 우서를 흔들어놓을 수 있었고, 강지석인 척 심장을 맞대고 키스를 나눌 수 있었다. 내게 있어 강지석은 우서를 손안에 감을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동생을 원망하고 미치도록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난 왜 강지석이 아니지?
아무렇지 않게 강지석의 미소를 걸고 그와 같이 다정한 모습으로 우서에게 다가갔던 게 나였으면서, 이젠 강지석이 지긋지긋하다. 우서의 가슴 속에 뿌리박힌 강지석의 모습을 전부 들어내 밟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마음은 소나기가 휩쓸고 간 주차장 근처에 다다랐을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한껏 펼친 검은 우산은 안쪽에 빗물을 가득 머금은 채 주인을 기다리듯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그게 누구의 우산인지 인식했을 땐 이미 우산살이 부러질 정도로 강하게 밟아버린 후였다. 안에 들어있던 빗물이 사방으로 터져 나와 내 발등을 기분 나쁘게 적셨다.
부서진 우산을 집어 들어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볼품없이 찌그러져 쓰레기통에 처박힌 우산을 봐도 어째서인지 내 기분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조금 더 걸어서 우서가 폭행당했던 샛길로 향했다. 최진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고, 바닥에는 아까의 광경이 모두 거짓말이기라도 한 것처럼 핏물 하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들어 벽면과 근처의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CCTV가 없는 곳을 노렸나 보네.’
아파트부지 내에는 수많은 CCTV가 있다. 하지만 이쪽 샛길은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곳이다 보니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최진호는 이걸 노린 거겠지만.
차라리 버젓이 CCTV에 찍혀 줬다면 처리하기 편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을 하며 돌아서려는데 한쪽에 익숙한 휴대폰이 보였다. 모서리가 깨진 채 몸의 반쯤이 물웅덩이에 닿아있는 그것은 얼핏 보기에도 회생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우서의 휴대폰은 액정이 산산이 깨지긴 했어도 화면 터치가 가능했다. 비록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TV처럼 화면이 지직거리고, 일부분은 잉크라도 터진 것처럼 색상이 이리저리 겹치긴 했지만.
화면에 보이는 건 자신과 나누던 메시지톡이었다. 그걸 보고 나니 최진호가 망친 평화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방수가 되는 휴대폰이라 해도 이 정도로 부서진 상태라면 기껏해야 USIM칩 정도밖에 못 건질 거라 생각하며 그거라도 빼내 보려는데, 손끝이 액정에 잘못 닿아 다른 화면을 드러낸다.
그것은 메시지톡을 나누기 직전에 우서가 보던 화면이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메일함인 것 같았다. 우서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건 사실이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사생활을 캐고 싶지는 않아서 화면을 닫으려던 순간.
[보낸 사람 – C]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사진에 대한 분석이 끝났습니다.]
아직 우서가 확인하지 않은 메일이 눈에 띄었다. ‘분석’이라는 말이 걸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것을 클릭하기 위해 손끝을 뻗고 있다.
하지만 그대로 클릭했다가는 누군가가 새 메일을 확인했다는 걸 우서에게 들키고 만다.
깨진 액정 화면에서 손을 뗀 채 한동안 내려다보고 있다가 뒤이어 클릭한 건, 우서의 ‘보낸 메일함’이었다.
* * *
-혀…형….
기분 나쁜 목소리.
그 사이로 기분 나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우서를 위해 죽을 사 들고 가면서 혹시 몰라 전화를 걸어봤더니만 최진호는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냉큼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얼굴을 얻어터지고도 발음이 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잘…못했어. 형….
어눌한 발음이어도 최진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확실해 보였다.
-내가… 미쳤었…나봐…. 미안해…. 형이… 그렇게 화낼 줄은… 몰랐어…. 미안해…. 미안….
옅은 흐느낌도 섞여 들렸다. 최진호는 방구석에 웅크려 바들바들 떠는 듯한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형이 너무… 좋은데… 안타까워서 그랬어…. 원하지도… 않는… 링이 생겨서… 그런 놈한테 끌…려 다녀야 하니까… 너무 안쓰…럽고…….
“원하지도 않는 링이라고 누가 그래?”
링을 원하지 않아? 누가? 내가?
“내가 가장 바라마지 않던 링이야. 넌 그 링을 없애려 했던 거고.”
-형…. 아니…잖아…. 형은 내가… 우리에게 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할 때도…, 윽…, 그딴 게 생긴다면… 어떻게든… 해제할 거라고……. 콜록콜록, 원치 않게… 속박되는 거… 절대 못… 참는다고… 했잖아….
간간이 아픈 신음이 섞여들어 왔지만 그딴 건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신우서는 달라.”
우서와 링으로 엮인 상황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링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우서와 함께 있을 수나 있었을까.
짧은 말이었음에도 내 진심이 전해진 건지, 최진호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얌전하던 게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그 안에 깔린 음색이 음산할 정도로 낮아진다.
-나는… 안 믿어…. 흡, 형이… 잘못 생각하는 거야…. 링이 없으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최진호.”
뭔가를 터뜨리려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그를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
“우서가 널 신고하는 건 그만둬달라고 하더라. 이해할 수 있다면서……. 나나 너와 다르게 참 착해. 미련할 정도로.”
짧은 비교였음에도 휴대폰 너머로 우득, 하는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명석한 녀석이다 보니 언제나 누군가와 비교되며 우월함을 느껴 왔을 그에게는 이 정도 비교조차 용납할 수 없는 건가 보다. 아마도 내가 헤어지자고 말한 그 후로도 계속 우서와 자신을 비교하며 이를 갈고 있었겠지.
-어차피 내가 폭행한 건… CCTV에 찍히지도 않아서… 신고도 안 될걸…?
“목격자인 내가 신고하면 돼.”
-그러면… 그 새끼도… 경찰서로 불려갈 텐데…? 신고하지 말라고 한 거… 그 새끼라며……. 형이 정말… 그 새끼를 생각한다면… 신고할 수 있겠어…? 나한테 당한 거… 다시 다 떠올려야 할 텐데……?
이것 봐라?
최진호가 머리를 심하게 맞긴 했나 보다. 감히 우서를 두고 날 협박하다니.
난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말없이 그에게 사진 몇 장과 영상들을 전송했다. 그것은 최진호가 아파트까지 찾아왔던 다음날, 회사 근처와 아파트 CCTV를 뒤져서 모아둔 스토킹 증거 자료였다.
“우서가 원하던 대로 그 애가 피해자인 폭행 신고를 하지는 않을 거야. 다만, 내가 스토킹 당했던 것까지 눈 감아 줄 필요는 없지.”
휴대폰 너머에서 최진호의 긴장 섞인 숨소리가 들렸다.
-스, 스토킹 정도는… 벌금 조금이 다야…. 그, 그 정도는 무섭지 않……!
“지금 이 대화 내용이 반영돼도 과연 벌금 조금으로 끝이 날까?”
최진호의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부터 녹음하고 있었던 터라, 그가 우서를 폭행한 범인이라는 것과 동기까지 낱낱이 음성파일화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대학 자유게시판, 접근하기 꽤 쉽던데.”
-뭐…, 뭘 하려고…….
최진호의 떨림 가득한 목소리는 이미 내가 뭘 염두에 두고 있는지 충분히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명색이 유명 대학 학생회장인데, 스토킹에 폭행……. 학생들이 알게 되면 꽤 시끄러워질 것 같지 않아?”
-형…, 왜, 왜 이래…. 나, 나는… 그냥…….
“진호야, 이번엔 제발 말귀 좀 알아듣길 바랄게.”
최진호가 부디 더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길 바라며,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한 번만 더 우서 건드렸다간, 네 인생도 같이 박살 나는 거야. 잊지 마.”
박살뿐일까.
아예 일어서지 못하도록 짓밟고, 짓밟고, 짓밟아야지.
다시는 우서를 질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