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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40화 (40/99)

40화

기분 나쁜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강지석이 교수 호출로 불려갔다기에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기로 했다. 강지석을 호출한 교수가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고, 그렇게 데려가면 별의별 곳을 다 순회하며 놀러 다니니 당연히 그 녀석의 귀가는 늦어질 게 뻔했다.

[우산은 있어?]

[네. 아까 지석이가 주고 갔어요.]

조금 아쉬웠다. 우산이 없으면 학교까지 데리러 간 김에 어딘가 샛길로 빠져서 드라이브를 가도 좋을 텐데.

[형은 괜찮아요?]

되물어 오는 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눈앞에 있었으면 그 작고 부드러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줬을 텐데.

[차로 이동 중이라서 괜찮지. 다른 사람 걱정할 생각하지 말고 넌 너만 걱정해.]

안 그래도 요즘 이상하게 불안할 때가 있다. 그때 최진호를 만났던 영향이 꽤 남아 있는 것 같다.

소심하고 얌전한 녀석이라서 그때처럼 미친 모습을 또 보일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찝찝하게.’

그 날 경비가 아니라 경찰에 넘겨버릴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고 있는데.

[거의 다 도착했어요. 형은 얼마나 걸려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혀줄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파트 로비에는 입주민을 위한 보안 장치도 있고 경비들도 상주하고 있었다. 그 안으로만 들어가면 안전하다고 볼 수 있으니, 이 불안감은 그저 갑작스러운 소나기의 불필요한 영향에 불과할 것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어보았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빼곡한 느림보 차량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 때문에 좀 늦어지겠지만 그래도 20분 안에는 도착할 거야. 먼저 들어가 있어.]

잘 들어갔다는 답장이 오면 일단 차를 돌려야겠다. 골목이 좀 많긴 해도 꽉 막힌 이런 큰길보다 그런 곳을 이용하는 게 더 일찍 도착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바로 오던 답장과 달리,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시간이 꽤 걸린다. 메시지를 하나 더 보내볼까 생각하던 중, 드디어 기다렸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네. 그럼 먼저 씻고 파스타 만들 준비를]

완성되지 않은 메시지에 덜컥 불안감이 밀려왔다.

신우서는 꽤 꼼꼼하고 성실하다. 가끔은 꼭 이렇게까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타 하나 없는 완벽한 메시지를 보내고, 심지어 마침표나 기호마저 빼먹지 않았다. 저번에 딱 한 번 글자 일부를 빼먹고 메시지를 보내는 실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하며 재차 단정히 써서 보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완성된 메시지가 도착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불안감을 떨치고자 메시지를 보냈다.

[파스타 좋지. 어떤 파스타 만들어줄 건데?]

혹시라도 메시지 일부가 잘린 걸 모르는 거였으면 좋겠다. 그런 거라면 이 메시지를 보자마자 아차 싶어서 다시 연락을 주겠지. 어쩌면 전화를 걸어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불안해서 몇 개의 메시지를 더 보내봤지만 응답이 없었고, 전화도 걸어보았다.

우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형 돌아오게 해 줄게.”

“신우서한테서 링 뺏어버리면 되잖아.”

“걔가 가진 링만 없으면 형도 다시 돌아올 거야. 그렇지?”

하필 왜 그 놈 목소리가 떠오르는 건지.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당장 차를 돌려 좁은 골목을 파고들었다.

어떻게 아파트 단지까지 올 수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차가 긁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마구 내달렸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난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 있었다.

폭우에 가까운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음에도 우산도 없이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우서야!”

빗소리에 가려서 내 목소리조차 잘 구별되지 않았다. 비 때문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앞도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금세 비에 젖은 정장이 묵직해진 것처럼 내 가슴도 무거워졌다. 시간으로 봐선 분명 아파트 단지 안까지는 제대로 들어온 것 같은데, 그 이후가 문제다.

하필 아파트 단지가 넓기도 넓어서, 이곳 어디에서 우서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은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지만 역시나 우서가 온 흔적이 없었기에 한달음에 되돌아 내려갔다. 경비실 사람들에게 우서의 인상착의를 말해주고 그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뒤이어 경찰에게 신고하기 위해 휴대폰을 든 순간.

‘맞아, 그때…….’

술에 취한 우서를 호텔로 데리고 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혹시 몰라서 우서의 휴대폰에 숨김형 위치추적 앱을 설치해뒀었는데, 혹시 휴대폰이 아직 켜져 있다면 위치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휴대폰을 들어 위치추적 앱을 실행했다.

다행히 휴대폰은 켜져 있었다. 다만 위치가 아파트 단지 내의 가장 외진 주차장 입구 근처였다. 천고를 측정할 수 있는 앱의 특성상 우서가 지하가 아닌 밖에 있다는 것부터가 위험신호나 다름없었다.

방수 기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휴대폰이 꺼진 것도 아니고 아주 멀쩡한데 주인은 폭우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위험신호가 머릿속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우서가 있는 위치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근처에 다다르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검은 우산이 보이고, 좀 더 달려가자 바닥에 버려진 우서의 가방이 보였다. 고작 두 물건을 봤을 뿐인데도 심장이 철렁해 숨이 막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이 알려주는 위치에 더 가까이 다가가자, 빗소리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딱 손가락 하나만 자를게.”

그건 며칠 전에도 들었던 최진호의 목소리였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는 빗소리 속에서도 또렷이 들려왔다.

“링이 있는 손가락만 자를 거야. 움직이면 더 다치니까 가만히 있어.”

…뭐?

뭘 잘라?

머리가 멈춰버린 것처럼 딱딱히 굳어버렸다.

“무슨 미친 소리야…! 저리 비……! 크흡-!”

굳었던 머리는 우서의 외침과 그가 얻어맞는 소리로 인해 단번에 정신을 차렸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내 눈에 보이는 건 예리하게 빛나는 접이식 나이프를 든 최진호와 벽에 기대어 쓰러져 앉은 우서의 모습이었다. 최진호는 내가 나타난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우서의 왼손을 내리누르고서 링이 새겨진 약지를 당장이라도 자를 것처럼 위협했다. 그걸 보자마자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씨발, 그럼 어쩌라고! 네가 링이 있으니까 내가 형한테……!”

퍽-!

최진호의 머리를 발로 가차 없이 후려갈겼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최진호에게 다가가며 이를 갈았다.

“미친 새끼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쓰러진 최진호의 멱살을 잡아 얼굴을 짓이길 것처럼 내리쳤다. 단번에 코피가 터졌지만 멈추지 않고 연달아 때렸다. 기분 나쁜 신음은 빗소리조차 가려주지 못했고, 더러운 피는 주먹 곳곳에 묻어났다.

“내가 분명히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진호야. 왜 말귀를 못 알아들을까, 너는.”

네가 뭔데 우서를 건드려.

네가 뭔데 감히 링을 없애려고 해.

피로 범벅이 된 울상이 컥컥 소리를 내며 자꾸만 형이라고 불러댄다. 같은 호칭인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까.

“한순간이라도 너 같은 새끼를 대용품 삼았던 내가 잘못이지.”

너 따윈 대용품조차 못 되는데.

얼굴을 막고 내 주먹을 밀어내려 애쓰던 팔이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음에도 구타는 계속되었다. 얼굴을 짓이겨놔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몇 번의 발길질도 더했다.

죽여버리고 싶어.

죽여버리고 싶어.

죽여버리고 싶어.

지직-

머릿속을 꽉 채운 말 사이로, 거친 바닥에 옷가지가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발길질하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벽에 기대어 늘어져 있던 우서는 어느새 슬슬 물러나다 못해 뒤로 기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비에 푹 젖어서 얼굴과 입술이 파리해진 건 물론이거니와, 거리를 두고 있어도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든 건지 색색거리는 균일하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서야.”

잔뜩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휘청거리는 우서에게 다급히 다가갔다. 차마 더러운 걸 묻힐 수는 없어, 여태껏 최진호를 구타했던 손등의 피를 내 옷에 대충 닦아내고서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몸이 단번에 굳어지고 힘겹던 숨마저 덜컥 멈춰버렸다.

겁먹은 우서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우서야, 괜찮아? 어디 봐봐.”

그제야 우서의 숨이 탁 트이듯 흘러나왔다. 딱딱하게 굳었던 몸에 힘이 빠짐과 동시에 그가 안심한 것처럼 내게 머리를 기대어 온다.

“어디를 어떻게 다친 거야? 병원부터 가자. 일어설 수 있겠어?”

힘없는 봉제 인형처럼 늘어져 버린 우서는 아직도 호흡이 균일하지 않았다. 호흡할 때마다 눈가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팔다리도 완전히 늘어져서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곧 우서의 몸이 완전히 내게 기울어,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우서야!”

어렵사리 들어 올린 눈꺼풀이 금방이라도 닫힐 것처럼 바들거렸다.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 없어, 그를 단번에 안아 들고 내 차로 달려갔다. 그때쯤엔 우서의 눈꺼풀도 완전히 닫혀버린 후였다.

우서의 몸 어디가 어떻게 다친 건지도 모른 채 병원에 도착한 나는, 젖은 상의를 벗긴 우서의 몸을 본 순간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복부에 넓게 자리 잡기 시작한 울긋불긋한 피멍은 너무도 그 색이 선명해서 마치 배가 둥그렇게 뚫려있는 것만 같았다. 볼 아래쪽과 턱에도 붉게 맞은 자국이 있었고, 인대가 늘어난 손목 역시 확연히 부은 게 보였다.

그것은 나로 인해 새겨진 최악의 흔적이었다.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우서의 링이 손가락째로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했던 극한의 공포가 내 정신을 송두리째 짓이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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