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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39화 (39/99)

39화

톡톡.

감자 써는 소리가 제법 그럴듯하게 들려왔다.

“우서랑 무슨 얘기 했어?”

손목을 핑계로 우서를 방에 밀어 넣더니, 목적은 추궁이었나 보다.

모양이 제각각인 감자 조각들을 도마 한쪽에 밀어 놓은 지석이 식칼을 내려놓으며 튼실한 당근을 집어 들었다.

“내가 화냈던 것과 별개로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형이 건드려놓은 거 아냐?”

“내가?”

궁중팬에 이상한 모양으로 잘린 양파와 고기, 감자를 털어 넣으며 피식 웃었다.

“건드려둔 건 너지.”

“내가 뭘?”

모르겠다는 얼굴로 당근을 박박 씻은 그가 감자칼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요리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어떻게 쓰는 건지도 이해하지 못해, 결국 식칼로 껍질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표면을 이리저리 잘라내는 거였는데, 분명 두께가 튼실하던 당근이 순식간에 수수깡처럼 변해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네 가장 큰 문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한 거야.”

“그게 문제라고?”

우서의 이야기를 하던 중에 누가 들으면 칭찬이라고 할 법한 말을 하니 이해가 안 될 만도 했다. 사실은 그게 가장 큰 단점인 건데.

특별한 사람이 그 스스로의 특별함을 알게 해주려면 주변과 차이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웃어주고 기대게 해주면, 정작 그의 진실된 특별함을 받는 사람은 그게 특별한 건지 모르게 된다.

강지석은 그걸 모른다.

그러니까 우서한테 갈수록 상처를 주지.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은 내 사람에게도 똑같이 친절할 뿐이지 특별하게 대하는 게 아니야. 잘 새겨들어두는 게 좋을 거야.”

강지석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재차 묻지는 않았다. 더 물어본다 해도 이 이상은 그가 직접 체감하고 깨달아야 할 문제다.

링의 발현 이후, 내 안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특별한 것은 신우서가 되었다. 링에게 홀린 건지, 아니면 이때껏 묵혀온 감정이 내 생각보다 더 크고 절실했던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느 쪽이건 뭐가 중요해.

내가 신우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하지만 그때의 난 내가 우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데에 도취해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게 집요하게 따라붙은 녀석이 내 시선 끝의 우서까지 눈여겨볼 줄은.

* * *

“거기서 그러고 싶냐, 인간아?”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한민아가 주먹질을 하려는 것처럼 팔을 들었다. 어차피 때리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에 픽 웃으며 대꾸했다.

“스릴 있어서 좋던걸.”

“좋기는 개뿔! 내가 일부러 피넛 버터를 발로 차버렸으니 망정이지, 그거 아니었으면 지석이한테 다 들켰어.”

“들켜도 상관없었는데.”

한민아가 ‘미친놈’이라며 상소리를 내뱉었지만 그저 웃기만 했다.

사실 강지석에게 우서와 키스하는 장면을 보여줄 생각은 아니었다.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헐떡거리며 야해진 얼굴을 아깝게 누굴 보여줘.

하지만 강지석이 문으로 다가올 땐 그에게 충동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품 안에서 바들거리는 우서에게는 강지석의 경악한 얼굴을 보여주면 단번에 무너지겠지.

강지석에게는 우서가 내 거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고, 우서에게는 더 이상 강지석의 친구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새겨준다. 그러면 결국 우서가 매달릴 수 있는 건 나만 남게 되겠지.

아직도 우서의 마음속에는 강지석의 자리가 너무도 컸다. 한민아가 자극제가 되어 강지석의 옆자리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렇게나 떨고 말이다.

하지만 위험한 키스 이후, 우서는 넷이서 모여 술을 마시는 도중에도 별다른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간간이 나와 눈을 마주치면 의식하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레 눈을 돌렸다. 그건 날 피한다기보다,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우리가 나눈 키스가 떠올라서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의식하고 있으면 그걸로 됐어.’

강지석을 생각하는 것만큼 날 많이 생각해주면 된다.

언젠가 우서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른 얼굴이 강지석이 아니라 강지건이 됐을 때, 그땐 아마 우리의 링이 다른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을까.

그 길로 한민아를 바래다주고 주차장에 차를 세워 내려섰다. 집에서 나올 때 강지석이 꽤 심하게 취해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우서가 그를 침대에 눕혀 놓고서 홀로 술자리를 정리하고 있을 거다.

‘올라가서 정리 좀 도와주고 상황 봐서…….’

“형.”

강지석도 인사불성이라 훼방을 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테니 이럴 때 우서와 둘이서 편안히 술이나 마실까 하던 찰나, 근처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이런 늦은 시간에 남의 집 주차장에 있을 리가 없는 놈이 서 있다.

빛이 잘 닿지 않는 어두운 기둥 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녀석이 슬그머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가장 마지막에 헤어진 애인이자, 의도치 않게 우서의 대용품이었던 최진호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더 마른 것이, 또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서는 말랐어도 매끼 잘 챙겨 먹는 게 참 기특하다.

“형, 저기…….”

우물쭈물하며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 우서와 닮은 느낌이 났지만, 그를 볼 때처럼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를 보며 드는 감정은 그저 짜증과 귀찮음 뿐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스토커냐?”

그에게는 이 집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애초에 애인이라 불리던 이들 중 누구도 내 집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일부러 근처에도 데려오지 않았다. 그러니 최진호가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그는 버젓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최진호는 스토킹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억울함과 애처로움 섞인 표정으로 내게 자꾸만 다가올 뿐이었다.

“형, 나 다 알아.”

“네가 뭘 알아?”

최진호의 입꼬리가 씰룩이더니 금세 울상이 된다.

“형한테 링이 생긴 거라며. 그래서 나랑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잖아.”

최진호의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링이 발현하기 직전에 만났던 사람 중에 링의 상대가 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을 일일이 들쑤시는 과정에서 최대한 숨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링에 대해 밝힐 수밖에 없었던 이들 몇 명이 있다. 최진호가 작정하고 스토킹을 했다면 그들을 통해 내 왼손 약지에 링이 자리 잡았다는 걸 알아챘을 수 있다.

“그런 거였으면 말해주지 그랬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형만 원망했잖아…. 우리 형이 아무리 차가워도 날 막 버리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진호야, 네가 잘못 아는 거야.”

친근하게 이름을 불리니 단번에 화색을 띤 얼굴로 날 올려다본다.

“나 잘 버려.”

진호의 얼굴이 점차 딱딱해진다.

“쓸모가 다하면 버려야지. 안 그래?”

파리한 안색으로 입가를 파들거리는 최진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것처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난 한 번 버린 거 안 줍는다, 최진호.”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으리라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저 녀석 덕분에 우서와 둘이 있을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 난 쓰레기가 아니야! 버려진 거 아니라고!”

귀가 울릴 정도로 빽 소리친 최진호가 눈물을 머금은 채 씩씩거렸다.

“링 때문이지? 링 때문에 그 사람하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거지?!”

“하…, 말귀 진짜 못 알아 처먹네.”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분명하게 경고했다.

“내가 너 버렸다고, 쓸모없어서. 그러니까 넌 너대로 너 쓸모 있다고 하는 놈 만나.”

이런 말을 왜 줄줄이 해줘야 하는지, 원.

귀찮은 놈이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 옆에 설치된 경비실 인터폰을 눈여겨보았다. 계속 귀찮게 하면 경비라도 불러서 끌어내야겠다.

“…내가 형 돌아오게 해 줄게.”

“무슨 수로?”

코웃음을 치며 인터폰을 들었다. 경비실 호출 버튼을 누르려는데, 그새 더 가까이 다가온 최진호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섬뜩한 말을 내뱉는다.

“신우서한테서 링 뺏어버리면 되잖아.”

분명하게 내뱉는 우서의 이름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최진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 키득거리고 있다.

“걔가 가진 링만 없으면 형도 다시 돌아올 거야. 그렇지?”

“신우서 건드리지 마.”

위협하듯 다가서서 멱살을 틀어쥐었다. 꽤 강한 압박이 들어갔을 텐데도 최진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를 똑바로 마주 보는 걸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살기에 잠식된 뇌가 최진호를 갈가리 찢어 죽이는 상상을 몇 차례에 걸쳐 보여준다.

“진호야….”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그리도 좋아하던 내 목소리를 귓가에 선명히 흘려 넣어준다.

“걔 건드렸다간…, 네가 죽어.”

최진호가 웃음기마저 잃어버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출한 경비가 최진호를 끌고 주차장을 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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