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머뭇거리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지건 형뿐이었다.
“그냥 여기서 잘게. 나나 네 침대는 둘이서 자긴 좁잖아.”
“아냐, 딱 붙어서 자면 잘만 한데……! 아야!”
지석의 이마에 형의 매서운 딱밤이 가해진다.
“결정 났으면 나가. 아플 땐 자는 게 최고니까 바로 재울 거야.”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강지석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당부했다.
“혹시라도 형이 이상한 짓 하면 바로 나한테 와. 문 열어둘게.”
“알았다, 알았어.”
장난인 줄 알고 건성으로 대답하는데, 마주친 강지석의 눈이 여느 때보다 더 진지하다.
몸을 일으킨 강지석이 형에게 방 밖을 눈짓하며 잠깐 얘기 좀 하자고 제안한다. 형은 귀찮은 듯했지만 알았다며 강지석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시끌시끌하던 방에는 나 혼자 남아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사람은 방 밖이 아니라 또 베란다로 향한 건지, 어디선가 흘러들어오는 소리조차 없다.
‘자고 싶은데…….’
오늘 하루 동안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벌써 지쳐버렸다. 거기다가 폭우를 맞은 탓에 감기 증상까지 와버려서 더 자고 싶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강지석이 눈앞에 있는데 다짜고짜 형을 붙잡고서 같이 자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할 수 없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해보지만, 역시나 생각만 많아지고 잠이 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럴 땐 정말 링이 있는 게 원망스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수 있었던 과거가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가 깨닫게 된다. 당연하게 누리고 있을 땐 짐작도 못 했던 혜택이 새삼 거대하게 느껴진다.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만 굴려대다가 결국 눈을 떴다. 얘기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 무작정 기다리기보다,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간단하게 시간을 보내기 좋은 건 역시 인터넷만 한 게 없다.
침대에 앉아서 형이 가져다준 내 노트북을 열었다. 인터넷 프로그램을 열자마자 언제나 뭔가 많은 걸 써넣었던 하얀 검색창이 보인다.
‘정말 방법이 없나….’
매일 링 해제법을 문의하고 혹시 해제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기 위해 관련 글을 집요하게 올렸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수확이 없어서 너무도 지쳐가고 있었다.
‘저번에 그 사람도 연락이 없……!’
오늘도 메일함이 비어있을 거라 생각하며 로그인하는데, 새 메일의 도착을 알리는 알림 마크가 떠 있다. 다급히 메일함으로 들어가 보니 그렇게도 기다리던 ‘C’라는 사람의 메일이 한 통 와 있다.
[보낸 사람 – C]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사진에 대한 분석이 끝났습니다.]
‘분석?’
사진을 ‘분석’했다니, 무슨 뜻일까?
‘프로그램도 심지 않은 평범한 사진이었는데…….’
이전에 상대에게 보냈던 메일의 사진이라면 휴대폰으로 찍고 바로 보낸 사진이었다. 딱히 사진에 뭔가를 섞어 보내진 않았는데, 상대는 마치 뭔가를 분석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우선은 메일을 열어보기로 했다. 상대는 그때 내가 사진을 보낸 사람임이 확실하니, 어쩌면 기대해볼 만한 내용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완전히 놀림감이 되었거나.
다행히 메일의 내용은 전자였다.
그것도 눈을 휘둥그레질만한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사진에 대한 분석이 끝났습니다.]
[웃어 님은 발현한 지 한 달가량 된 링을 보유한 23세 남자분이시군요.]
[짝이 되는 링의 상대 분은 7살 차이의 연상인 남자분으로 보입니다.]
[링의 해제를 원하시던데,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요?]
[저를 믿고 링의 해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하신다면 오픈 메시지톡 https://open.kakao.com/o/sjC4lx2b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혹시라도 링의 해제에 관한 생각이 바뀌셨다면 이 메일을 곧바로 삭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내용은 오로지 웃어 님께만 드리는 것이며, 타인에게 오픈 메시지톡의 주소가 유출된다면 예고 없이 방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웃어 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메일을 다 읽고 나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뒤이어 무슨 사이버 공포물이라도 본 것처럼 몸이 딱딱하게 긴장한다.
‘날 어떻게…….’
내용은 처음부터 충격적이었다.
사진에 대한 분석, 아니, 정확히는 링에 대해 분석 당했다. 애초에 링이라는 건 타인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누가 분석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단순히 붉은 실 하나 두른 것처럼 보이는 얇은 링일 뿐인데, 거기서 읽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그런데도 상대는 정말 링을 통해 날 분석한 것처럼 보였다.
‘내 나이나 성별은 메일을 해킹하면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어. 내가 올리던 글들도 링이 발현한 다음 날부터 매일 올렸으니 날짜 추측도 가능할 테고.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세 번째 부분이었다.
[짝이 되는 링의 상대 분은 7살 차이의 연상인 남자분으로 보입니다.]
‘형은 어떻게 알았지?’
다른 건 몰라도 지건 형까지 알아낸 건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누구인지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링의 상대로 추리했다면 지건 형이 아니라 강지석이 내용에 올라야 했을 거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서운 긴장이 찾아왔다.
응해야 할까, 무시해야 할까.
하지만 처음부터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링의 해제에 관한 단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얘기해봐야 해.’
한 달 가까이 글을 올리고 인터넷을 전부 다 뒤져봐도 링의 해제에 관해서는 찾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한 명이 죽어야 사라진다는 둥의 살벌한 이야기가 다였다.
속는셈치고 응해보는 게 답이었다.
당장 연락해보기 위해 침대 근처를 더듬어보는데, 뒤늦게 휴대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휴대폰도 그렇고 강지석이 준 우산도 그렇고, 오늘 정말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그들이 준 링크의 메시지톡은 PC 전용으로도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급히 인터넷을 뒤져서 PC 전용의 오픈 메시지톡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설치 과정이 굉장히 짧고 간단했기에 노트북으로도 곧 오픈 메시지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메시지톡 주소 검색창에 메일로 받았던 주소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었다.
나타난 건 1:1 메시지창이었다.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나 : 안녕하세요.]
[나 : 메일 받고 연락 드립니다.]
[나 : 혹시 C라는 분이신가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시간을 체크했다. 어느덧 밤 11시가 다 되어간다. 어쩌면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보낸 메시지에 읽음 표기가 떴다.
상대는 지금 내 메시지를 모두 보고 있었다.
긴장과 흥분이 차올라 입이 바싹 말라 갔다. 상대의 답장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C : 안녕하세요.]
[C : 메일 드린 C라고 합니다.]
[C : 반가워요, 신우서 님.^^]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상대는 내 나이와 성별뿐만이 아니라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아까 추측한 대로 내 계정을 해킹해서 들여다봤다면 이름도 충분히 알고 있을 만했다.
[나 : 혹시 제 메일을 해킹하신 건가요?]
아예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날 해킹한 후에 다른 링의 상대는 지레짐작으로 추측한 것일 수도 있다. 막 던진 추측이었을 뿐이라면 기겁할 정도로 너무 잘 맞아떨어진 셈이 되지만.
[C : 제가 도와드리려는 분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하시네요.^^;]
[C : 애석하게도 저는 컴퓨터를 기본적인 것밖에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해킹과는 거리가 멀답니다.]
[나 : 그럼 대체 어떻게 조사하신 거죠?]
[C : 메일에 적어드렸잖아요, 신우서 님.]
[C : 저는 단지 사진 속에 있는 신우서 님의 링을 분석해드린 것뿐이에요.]
[C : 그게 제 능력이거든요.]
낮에 만난 청년의 칼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말이었다. 링을 분석하는 능력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하물며 직접 만나서 하는 것도 아니고 대충 찍은 사진 한 장만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건 절대 믿을 만한 말이 아니었다.
[나 : 분석이라고 해봐야 메일 주소 하나만 알면 다 해킹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나 : 솔직히 안 믿겨요.]
[C :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씀하세요.]
메시지창 너머에서 상대가 작게 웃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여전히 확실한 신뢰가 가지 않는 상대인지라 의심만 커져가는 가운데.
C라는 사람이 사진 한 장을 올렸다. 그건 내가 보냈던 것처럼 왼손 약지를 중심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이건… 링…?’
내 것과는 확연히 다른 링이었다. 왼손 약지의 뿌리 부분부터 손톱 근처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붉은 줄이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게 링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본능에 가까웠다. 내가 지건 형의 왼손 약지에 있는 붉은 줄을 보자마자 그걸 나와 이어진 링이라고 확신했던 것처럼.
하지만 사진 속의 링과 같은 형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보통은 다들 뿌리 부분에 한 줄로 자리 잡은 싱글 링이었고, 서로 마음까지 맺어진다 해도 두 줄이 서로 얽혀있는 형태가 되는 게 전부였다. 세간에 떠도는 링의 형태를 그려놓은 그림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링이었다.
[C : 제 링은 확인하셨겠죠?]
[나 : 링 맞아요? 형태가 너무 다른데요.]
[C : 본능적으로 알아보셨잖아요. 제 것도 링은 맞습니다.]
[C : 다만 제 링은 신우서 님의 것과 완전히 다른 거예요.]
이어진 말에는 내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내용이 들어있었다.
[C : 저는 직접 링의 해제와 연결이 가능한 ‘커넥터(Connector)’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