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서로의 이마가 맞닿자마자 각자 다른 느낌을 받았다.
‘차가워….’
“역시 뜨겁네.”
이마를 뗀 형은 손으로도 만져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리저리 맞은 것도 맞은 거지만, 비에 흠뻑 젖었던 탓에 뒤늦게 열이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들어가서 약 먹고 자자.”
형의 목소리는 어딘가 지쳐 보였다.
‘역시 링 때문에…….’
왠지 다친 건 난데, 내가 죄를 지은 것 같다.
무거운 마음으로 조수석 문을 열려는데, 어느새 운전석에서 내린 형이 직접 열어주고는 날 안아 든다.
“형, 제가 걸을게요.”
다친 몸이라고는 해도 다리가 다친 건 아니었다. 병원에서도 형의 부축을 받긴 했어도 잘만 걸어 다녔다.
하지만 형은 내 말을 듣긴 한 건지 대꾸도 없이 그대로 이동했다. 몇 번이나 내려달라고 말해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형의 모습은 확실히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버둥거려봤자 형만 더 힘들 거라는 걸 알기에 이젠 얌전히 안겨 있었다. 다 큰 남자가 되어서 다른 남자에게 안아 들린 모습이 참 민망하다. 주차장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이 없기를 천만다행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나서야 형의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미안해.”
“예? 형이 왜 미안해요?”
의문을 담아 물으니 날 바라보는 형의 눈 또한 의문이 담긴다.
“왜냐는 말이 나와? 널 위협한 그 새끼, 내 전 애인이야.”
“하지만 형이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형의 미간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내가 처신을 잘못한 결과인데 그래도 내 탓이 아니야?”
“음,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은 형이 어떻게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은데요.”
형이 날 빤히 바라보다가 내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하…, 너 진짜…….”
형이 내 어깨에 묻은 얼굴을 든 건 엘리베이터가 우리들의 집 층수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기계음이 들렸을 때였다. 고개를 든 형의 얼굴은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표정이 되어있었다.
집 안까지 기어코 날 안고 들어간 형은 침대에까지 정성스레 눕혀주려 했다.
“잠깐. 잠깐만요, 형.”
황급히 형을 만류하며 일어나 침대를 돌아보았다. 워낙 자연스러워서 뒤늦게 눈치챈 거지만, 이 침대는 내 것이 아니라 형 침대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밤이 된 시간인데 벌써부터 형 침대에 누워있을 순 없었다.
“지석이에겐 내가 말해둘게. 내 탓이니까 내가 내 방에서 돌본다고.”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형 방에서 자는 모습을 버젓이 보여주는 건 마음에 걸렸다.
‘강지석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강지석을 떠올리다가 문득 그가 건네줬던 우산이 떠올랐다. 소나기를 우려하며 내줬던 그 검은 우산은 아까 청년에게 얻어맞아 끌려가는 과정에서 떨어뜨리고 말았었다.
강지석이 준 우산이니만큼 어떻게든 회수해 와야 했다. 날 위해 내준 건데 어떻게 버려두고 올 수 있을까. 부서졌다면 그거라도 갖고 와야지.
“저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형.”
형이 몸으로 문을 막아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가? 그 몸으로? 어딜?”
형에게서 무서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 방을 나가지 말라고 무언의 경고를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었기에 사정을 말했다.
“강지석에게 받은 우산을 두고 왔어요. 아까 그 사람한테 맞을 때 떨어뜨렸던 것 같은데,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니까 우산도 멀쩡히 남아 있을지 몰라요.”
“…….”
내 말을 들은 형의 눈이 순간적으로 무섭게 빛났다. 그건 딱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어깨를 움찔하게 만들 정도의 위압감이 있었다.
“내가 다녀올 테니까 쉬고 있어.”
형이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형에게 시킬 순 없어서 얼른 뒤따라갔다.
“형, 그냥 제가…….”
“우서야. …쉬고 있어.”
형은 그새 무거워진 목소리로 재차 말하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마치 내게 더 말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려서 끝내 잡을 수가 없었다.
형이 완전히 나가고 나서야 뒤늦게 ‘다녀오세요’라고 말하다가 씁쓸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민폐네, 신우서.”
형이라면 아픈 날 배려해서 직접 다녀오겠다고 말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는데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의도치 않게 형에게 일을 시켰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타박했다.
흠뻑 젖었던 옷 대신 형이 날 병원에 데려다 놓고 준비해 온 새 옷을 입고 있긴 했으나, 샤워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어서 얼른 씻고 싶었다. 보호대를 차고 있는 오른쪽 손목만 조심한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만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옷을 벗고 욕실 거울 앞에 서니 굳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누워서 진료를 받는 통에 내 상체가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지금처럼 거울 앞에 서고 나니 아까의 폭행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하게 된다.
진한 보랏빛의 멍이 명치에서부터 허리에 이르기까지 꽤 넓게 퍼져있다. 원래 피부가 하얀 편이다 보니 선명한 멍 자국이 더 또렷이 보이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명치와 그 근처 갈비뼈들을 손끝으로 훑어보았다. 그제야 의사 선생님이 ‘조금만 잘못 맞았으면 갈비뼈가 부러졌을 것’이라고 한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진한 멍 자국은 갈비뼈 라인의 바로 아래쪽에서 멈춰있었다.
몸에 새겨진 멍 자국을 보다 보니 아까의 장면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거센 발길질, 욕설, 그리고 서슬 퍼런 칼.
기억을 더듬자 갑자기 뭔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욱…!”
참을 수 없는 구토감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거대한 뭔가가 끌려 나오는 것 같던 기분과 달리, 내 이에서 흘러나오는 건 빈속임을 증명해주는 시큼한 위액 조금이 다였다.
그런데도 구토감은 멈추질 않아,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더듬더듬 샤워기를 붙잡아 물을 틀었다. 그러다 또 구토감이 몰려와 주저앉아 헛구역질하길 반복했다.
언뜻 욕실 밖에서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차마 그쪽을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연속된 헛구역질에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그 청년에게 당했던 폭행과 충격이 파노라마처럼 계속 펼쳐져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건 분명 따뜻한 물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의 상황이 또 오버랩되어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떠올린 것만으로도 손끝이 떨리고 헛구역질이 나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찾아오는 건 불쾌감과 공포뿐이다.
‘이걸 강지석이 보면… 분명 걱정할 텐데…….’
내가 종이에 손이 베인 것만 봐도 기겁을 하는 놈인데, 이 정도 범위의 멍과 내 상태를 보면 별의별 난리를 다 피울지 모른다. 형에게 꼭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똑똑-
밖의 누군가가 욕실 문을 노크했다. 설마 강지석이 벌써 왔나 싶어서 굳어 있는데, 다행히 들려온 것은 지건 형의 목소리였다.
“우서야, 샤워하고 있어? 혼자 씻기 힘들 텐데 도와줘도 될까?”
형의 조심스러운 말을 들으며 안도하던 찰나, 다시금 가슴 중앙쯤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느낌이 났다. 나올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몰려오는 헛구역질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읍, 우욱…!”
“우서야, 들어갈게!”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가 가려주지 않을까 했지만 역시나 들린 모양이었다. 형의 다급한 음성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형은 바닥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하는 날 보며 놀란 듯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와 내 상체를 일으켰다.
“괜찮아? 형 봐봐, 우서야.”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날 받쳐 든 형이 볼을 어루만져 주며 상태를 체크했다. 그러다 복부에 선명히 남은 멍을 보며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다.
형에게 기대어 안겨 있다 보니, 신기하게도 머릿속에 남은 트라우마가 차차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초점 맞추기도 힘들던 시야가 금세 자리를 잡고, 경련하는 것처럼 떨리던 몸도 점점 안정을 되찾는다. 샤워기의 물소리도 폭우가 아닌 듣기 좋은 소리가 되었다.
“…신기하네.”
안정된 숨을 깊이 내쉬며 형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형이랑 있으면 참… 신기한 게 많네요. 만병통치약, 뭐 그런 거 같아요.”
정신적인 거든 육체적인 거든, 형과 붙어있으면 이상할 정도로 금세 나아진다. 이것 역시 링의 상대끼리만 느낄 수 있는 효과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형은 나아진 내 상태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 이마와 머리에 정성스레 입을 맞췄다. 이런 건 연인이라든지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에게나 하는 간지러운 스킨십일 텐데, 형은 거리낌 없이 내게 이런 걸 해주고 있다.
‘착각할 것 같아.’
링 때문에 서로 계약한 게 아니라면, 진작에 착각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