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34화 (34/99)

34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났다. 청년의 갑작스러운 반말과 귀신 닮은 괴이한 미소는 너무도 섬뜩한 조합이었다.

잡힌 팔을 뿌리치려는데, 갑자기 배에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청년에게 얻어맞은 배가 너무 아파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흐읍…!”

우산을 놓치고 두 팔로 배를 부여잡은 채 무릎을 떨궜다. 몸을 웅크린 채 가까스로 숨을 쉬는데, 이번엔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틀어 잡혔다.

“악-!”

머리를 잡힌 채 뒤로 홱 당겨져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거친 바닥에 손바닥이 쓸려 피가 배어났다.

그러든 말든, 청년은 내 머리카락을 통째로 뽑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두 손으로 머리채를 붙잡아 질질 끌고 갔다. 강하게 몸부림을 치고 싶어도 조금 전에 얻어맞은 배가 너무 아파서 아직도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어 맥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청년은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바깥쪽 옆의 샛길로 향했다. 폭우를 그대로 맞은 탓에 전신이 금세 차갑게 젖어갔다.

샛길에 접어들자마자 머리채를 붙잡은 청년의 손을 필사적으로 긁어대며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신고라도 하고자 휴대폰을 꺼내 드는데, 청년이 손목을 확 꺾어버렸다.

“윽!”

부러질 정도로 꺾인 건 아니었지만 손목에 꽤 무리가 간 건 틀림없었다. 손에서 힘이 빠져 휴대폰을 떨어뜨렸고, 청년은 주저앉은 내 배에 두 번의 발길질을 더하며 욕을 내뱉었다.

“씨발! 가만히 좀! 있어!”

바닥에 쓰러진 난 배가 뚫리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신음과 헐떡임을 반복했다. 씩씩거리던 청년이 비식 웃으며 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는 비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내 휴대폰에서 뭔가를 찾는 듯하더니, 몇 번이나 헛웃음을 흘렸다.

“나한테는 언제나 통보밖에 보낸 적 없으면서…….”

청년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휴대폰을 이리저리 뒤지는 것 같더니, 곧 신경질적으로 내던지고서 내게 다가왔다. 청년에게 거칠게 멱살을 잡혀 상체가 비스듬히 들어 올려졌다. 그 탓에 목이 졸려서 밭은기침과 거친 숨이 번갈아 나왔다.

“야, 너지?”

다짜고짜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청년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강지건이랑 링으로 이어졌다는 거, 너 맞잖아.”

형의 이름이 왜 청년에게서 흘러나오는지 몰라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그가 내 멱살을 쥔 채로 샛길의 건물 벽에 내 등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차갑고 딱딱한 벽이 주는 통증에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청년이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자마자 거친 기침이 터졌다.

“콜록, 콜록!”

빗물의 비린 맛이 밴 기침은 하면 할수록 아까 맞은 뱃가죽이 땅겨서 고통스러웠다.

“왜 너 같은 새끼랑 이어졌는지 모르겠는데, 죽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청년은 힘없이 늘어진 내 왼쪽 손목을 붙잡고서 빗물 가득한 흙탕물에 손바닥을 대게 했다. 원치 않게 쫙 펼쳐진 손등을 내려다보는데, 시야에 서슬 퍼런 접이식 나이프가 튀어나왔다.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난 누군가에게 이렇게 처맞을 정도로 뭔가를 잘못한 적도 없었고, 굳이 따져보자면 선행을 더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칼이라고는 요리할 때 쓰는 식칼이나 문구로 분류되는 커터 칼 정도를 써본 게 다였고 실제로 본 것도 그 정도뿐이다.

그래서 청년이 다짜고짜 꺼내든 흉기에 얼이 빠져버렸다.

“딱 손가락 하나만 자를게.”

“뭐……!”

더더욱 현실성 없는 소리가 나왔다.

손가락을 잘라? 내 걸?

어이가 없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정작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말한 저 청년조차 손을 덜덜 떨면서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거다.

“링이 있는 손가락만 자를 거야. 움직이면 더 다치니까 가만히 있어.”

“무슨 미친 소리야…! 저리 비……! 크흡-!”

몸부림을 치다가 또 한 대 얻어맞았다. 이번에는 얼굴 쪽이었는데, 비스듬히 턱을 맞는 바람에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이 났다. 그와 함께 구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과 어지러움까지 찾아온다.

“씨발, 그럼 어쩌라고! 네가 링이 있으니까 내가 형한테……!”

퍽-!

소리치던 청년이 갑자기 뭔가에 얻어맞아 날아가듯 쓰러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갑자기 끼어든 검은 누군가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미친 새끼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들려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지건 형의 것이었다. 이를 알아채자마자 급격한 안도감과 함께 미처 무시하고 있던 삐걱거리는 통증이 그대로 전해졌다.

반가움도 잠시.

흐린 시야 속에서 내가 본 건, 바닥에 쓰러진 청년을 인정사정없이 패고 있는 형의 모습이었다.

“혀, 컥, 형! 악-! 형, 잠깐……! 욱!”

“내가 분명히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진호야.”

“아악-! 형-! 커헉!”

“왜 말귀를 못 알아들을까, 너는.”

“흐으윽, 형…! 헉!”

“한순간이라도 너 같은 새끼를 대용품 삼았던 내가 잘못이지.”

“흐, 욱…! 헉, 허…억.”

청년의 비명이 점차 힘겨운 신음이 되어 가는 반면, 그가 맞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주먹에 맞아 바닥을 이리저리 뒹구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정없이 발에 짓밟히고 있다.

저렇게 계속 맞다간 청년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빨리 말려야 하는데…….

‘무서워….’

청년에게 현실성 없이 칼로 위협당하던 때보다 형이 저렇게 사람을 패고 있다는 게 더 무서웠다. 저만큼이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도 처음 보고, 차분한 목소리가 저토록 소름 돋는 것도 처음이었다.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즈음, 난 어느새 벽에 기댄 채 형에게서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일어날 수가 없어서 바닥을 어렵사리 기며 물러나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저 무서웠다. 흉기를 들고 있던 청년보다도 훨씬.

“우서야.”

빗소리 사이로 형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떨며 굳어 있자, 기절한 청년을 버려둔 형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형의 얼굴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때야 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머리를 휘청거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형의 팔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겁먹은 몸이 뻣뻣하게 굳고 호흡마저 집어삼킨다.

“우서야, 괜찮아? 어디 봐봐.”

나를 안은 채 조심스레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은 평소와 똑같이 부드러웠다. 흐릿한 시야를 뚫고 가까워진 얼굴은 사색이 되어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주체할 수 없는 걱정이 가득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온통 날 걱정하는 말뿐이다.

“어디를 어떻게 다친 거야? 병원부터 가자. 일어설 수 있겠어?”

아까의 무서웠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찾아온 거대한 안도감이 전신을 감쌌다. 긴장이 맥없이 풀려버리고, 그와 함께 전신에 힘이 빠져서 형에게로 쓰러지고 말았다.

“우서야!”

힘없이 숨만 몰아쉬는 나를 내려다보던 형이 단숨에 내 몸을 안아 들었다. 빗물을 잔뜩 머금어서 무거울 만도 한데, 형은 그런 것도 못 느끼는 것처럼 초조한 얼굴로 날 안고 달렸다.

점점 눈이 감겼다. 그건 흠씬 두들겨 맞은 여파라기보다, 형에게 안겨 있는 안도감에서 오는 수면이었다.

* * *

전치 3주.

복부를 중심으로 한 심한 타박상과 오른쪽 손목의 인대 손상이 주된 요인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조금만 잘못 맞았으면 갈비뼈가 부러졌을 거라며 괜히 겁을 줬다. 그러면서 복부의 타박상은 꽤 심하긴 하나, 처방해준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무리하지만 않으면 금세 나을 거라고 말했다. 더불어 손목의 인대 손상 역시 심한 건 아니라서 병원을 자주 왕래할 일은 없을 거라고 한다. 찜질만 제때 해준다면 복부보다도 먼저 나을 수 있을 정도라고.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형은 왜인지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뭐라고 말을 걸기도 힘든 분위기라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괜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강지건이랑 링으로 이어졌다는 거, 너 맞잖아.”

아까 그 청년은 아마도 형의 전 애인일 것이다. 링이 발현하고 얼마 되지 않아 헤어지고 말았다던, 나와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 애인.

난 형에게 그 사람을 신고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물론 괘씸하고 화가 나긴 했으나, 원인이 뭔지 알기 때문에 한발 물러서게 되었다.

시선을 내려 내 왼손 약지의 붉은 링을 바라보았다.

나는 몰라도 형은 이 링 하나 때문에 너무도 많은 걸 바꿔야 했다. 애인을 버려야 했고, 동생의 친구와 억지로 함께 잠들어야 했으며, 원치 않게 동생의 대용품으로서 그를 흉내 내야 했다.

이 링만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일도…….

“우서야.”

내 생각을 멈추게 한 부름에 고개를 돌리다 보니, 어느새 차가 주차장에 멈춰 서 있다는 걸 알았다.

안전벨트를 풀어준 형이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너무 가까울 정도로 바짝 다가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