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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33화 (33/99)

33화

그 날 이후.

내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정확히는, 형까지 포함해 둘 다 이상해졌다.

[너^^]

예전 같았으면 이런 메시지를 받자마자 눈살을 찌푸리거나 저의를 알아내기 위해 뚫어지도록 쳐다봤을 텐데, 지금은 그저 소리 없는 웃음만 흘러나올 뿐이다.

[자꾸 그렇게 이상한 소리 하시면 각방 쓸 거예요.]

[미안. 난 뭐든 상관없어. 네가 해주는 건 다 맛있더라.]

솔직히 난 이렇게 시답잖은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는 타입이 아니었다. 용건이 있으면 메시지보다는 전화를 선호하는 쪽이었고, 그마저도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딱 필요한 것만 묻고 답한다. 그게 간단명료하고 좋았다. 듣자 하니 형 역시 그렇다던데, 왜인지 우리는 잡다한 이야기로 시간마다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지건 형 외에 내가 유일하게 ‘별거 아닌 메시지를 허용한 사람’이라면 딱 한 명 있었다.

“우서야, 나 교수님 호출 떨어졌다.”

그 유일한 사람인 강지석이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는 앱 개발 회사의 대표이자 같은 학과 졸업생을 형으로 둔 탓에, 가끔 이렇게 교수님들의 부름을 받곤 한다. 가봤자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과거 이야기부터 해서 결국은 지건 형에게 특강 한 번 해줄 수 있을지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받는 게 전부일 것이다. 그렇다고 재학생인 강지석이 교수가 무슨 말을 할지 뻔하다는 이유로 호출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건 형에게 ‘그럼 오늘도 제 마음대로 만들게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고선 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잘 다녀와. 집에서 청소나 하고 있을게.”

“넌 전생에 집사나 시종, 뭐 그런 거였어? 왜 이렇게 집안일만 하려고 그래?”

“나도 내 몫을 해야지. 요리만 갖고는 모자라.”

강지석이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때렸다.

“신우서,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모르네. 너 없었으면 나랑 형은 지금쯤 MSG에 중독돼서 죽었을 거라니까?”

“오버하지 마. 그거 중독된다고 죽는 사람 아무도 없어.”

진지하게 말하는 강지석을 토닥여주며 먼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수업은 다 끝났으나 강지석이 교수님을 만나고 와야 한 대서 빈 강의실을 지키던 중이었다.

“그럼 먼저 가 있을게.”

“조심해서 가. 어디 다른 데로 가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가고, 밥 꼭 챙겨 먹고, 청소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또…….”

“적당히 해, 적당히.”

기나긴 당부를 늘어놓는 강지석의 어깨를 툭 때리며 강의실 밖으로 향했다. 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지석이 달려와 붙잡는다. 이번엔 또 뭔가 싶었는데, 불쑥 검은색 3단 우산이 튀어나온다.

“갖고 가. 이따가 소나기 온다고 했어.”

우산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얼결에 받아들었다.

“넌?”

“난 교수님이 차로 바래다준다고 하셨으니까 그거 타면 안 맞아.”

씩 웃은 강지석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체크하더니 짧은 인사만 남기고서 급히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눈치 없는 가슴이 또 설렌다. 곱게 접힌 우산이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귀하게 느껴졌다.

강지석의 말대로, 어느 순간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폭우에 가까운 소나기를 퍼부어댔다. 강지석이 챙겨준 우산이 아니었다면 완전히 물에 푹 빠진 꼴이 되었을 것이다.

집으로 향하며 간간이 지건 형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우산은 있어?]

[네. 아까 지석이가 주고 갔어요.]

[그놈이 그렇게 준비성이 좋은 놈이 아닌데.]

[형은 괜찮아요?]

[차로 이동 중이라서 괜찮지. 다른 사람 걱정할 생각하지 말고 넌 너만 걱정해.]

형의 메시지를 보며 작게 웃었다.

[저는 형 걱정하고 싶은데|]

메시지를 쓰다가 멈칫했다. 가슴뿐만 아니라 손끝까지 간질거리는 느낌이라, 얼른 지우고 다른 내용을 썼다.

[거의 다 도착했어요. 형은 얼마나 걸려요?]

우산을 쓴 채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아파트 단지 초입이 보였다.

[비 때문에 좀 늦어지겠지만 그래도 20분 안에는 도착할 거야. 먼저 들어가 있어.]

강지석이 오늘처럼 늦을 땐 형이 일부러 칼같이 퇴근해서 일찍 들어온다. 강지석이 없으면 굳이 링의 상대와 함께 있는 척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왠지 날 혼자 두지 않으려는 행동 같은 착각이 들어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네. 그럼|]

메시지를 입력하다가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딱히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로 우산을 쓴 채 제 갈 길을 가기 바쁠 뿐.

이런 게 바로 기분 탓이라는 건가,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요즈음 좀 이상하긴 했다. 자꾸만 누군가가 날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스토커…는 아니겠지.’

별 볼 일 없는 대학생에게 스토커는 무슨.

자의식 과잉이라 생각하며 다시금 메시지를 입력하며 나아갔다. 우산을 든 상태로 메시지를 쓰는 거다 보니 꽤 신경을 써야 했고, 그러다 걸음이 좀 느려졌다.

“저기요-! 잠깐만요!”

누가 부르면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우산 속으로 웬 청년 하나가 쏙 들어온다.

“저기, 헉, 우, 우산 잠깐만 같이 써도, 하아, 써도 될까요?”

완전히 폭삭 젖은 젊은 청년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뛰어나왔는지 모를 청년이 몸까지 떨며 부탁하는 통에, 그를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네, 그래요. 어디까지 가세요?”

“저쪽 지하주차장이요. 차를 저기에 대놨거든요.”

청년의 말에 메시지를 작성 중이던 휴대폰을 넣어두고서 걸음을 옮겼다. 폭우에 3단 우산에 좀 말랐긴 해도 건장한 청년 둘이다 보니 서로 한쪽 어깨가 젖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청년은 감기가 걱정될 정도로 비를 푹 맞아버려서 조금이나마 덜 젖도록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소나기라니, 너무하지 않아요? 그것도 완전히 폭우라…….”

빗소리에 둘러싸인 정적을 깨기 위한 것처럼 청년이 선뜻 말을 걸었다. 그래서 나도 별 뜻 없이 대꾸했다.

“그러게요. 주차해두시고 어디 다녀오셨나 본데, 소나기라 놀라셨겠어요.”

“맞아요. 이 앞 은행 좀 잠깐 다녀온 사이에 이 난리네요.”

“이 앞 은행이라면,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거요?”

“네, 거기요.”

청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은행이라면 아파트 단지 상가 안에 있는 것이다 보니, 지하주차장에서 곧바로 이동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아파트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은행이기도 하고 전국적으로 가장 지점이 많은 곳이라, 거주민이라면 대부분 그곳을 이용하고 있다고 들었다. 굳이 차가 없더라도 지하 1층 주차장에서 편히 이동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지라, 굳이 아파트 단지의 구불구불한 길을 선택하며 은행 입구까지 가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최근에 이사 오셨나 봐요.”

그런 거라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아뇨, 여기서 한 3년 살았어요.”

하지만 3년이나 살았다면, 저 은행에 들어가는 건 밖으로 갔다고 해도 그 안에서 비를 피해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길을 모를 리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건가? 왜?’

처음 보는 사이에 왜 굳이?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이 오싹한 불안을 가져왔다.

‘아니야, 뭔가 이유가 있을 수 있지. 의심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나기도 소나기이지만, 지하주차장의 이쪽 입구는 구조상 사람 왕래가 극히 적은 곳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마치 공포영화의 중심에 선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우웅-

아까부터 계속 울리던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 어차피 누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굳이 꺼내보지 않았다.

청년의 시선이 휴대폰이 든 내 재킷 주머니 쪽에 닿았다.

“계속 진동 울리는 것 같은데,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청년이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다. 태연한 척하며 휴대폰이 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예, 이따가 몰아서 답장해도 돼요.”

“아하….”

청년이 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자꾸만 날 힐끗거린다.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등에 소나기라도 쏟아진 것처럼 서늘한 느낌이 든다.

지하주차장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엔 조금 걸음이 빨라졌다. 청년은 말없이 웃는 얼굴로 그저 얌전히 따라갈 뿐이었다.

입구에 다다라 비가 들지 않는 자리에 멈춰 섰다.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도 없고 지나다니는 차도 없었기에 불안감만 가중되었다.

“여기까지면 되죠?”

“예, 감사합니다.”

“아녜요. 그럼 전 이만……!”

얼른 돌아서려는데, 청년이 우산을 든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더니 기괴할 정도로 입가를 진하게 비틀어 웃는다.

“너, 생각보다 착하네? 아니면 그냥 호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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