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계의 고리-32화 (32/99)

32화

와인과 다양한 안주가 가득했던 그 날 밤.

지건 형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민아 누나를 집까지 바래다주러 나간 지 이십여 분이 흘렀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던 나와 달리 음료수 마시듯 쭉쭉 들이켰던 강지석은 그때쯤 거실에 완전히 널브러져서 인사불성이 되어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강지석을 부축해서 그를 방까지 데려가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침대까지 데려가는 것도 꽤 힘든 일이었다.

“야, 좀… 잘 서봐…!”

숨을 몰아쉬며 발목이 거의 휘어지다시피 비틀거리는 강지석을 가까스로 침대에 던져버렸다. 그러다 나도 지쳐서 그가 누운 침대 끝에 털썩 걸터앉았다.

“후우….”

깊이 숨을 내쉬며 강지석을 돌아보았다. 그는 천장을 보고 편안히 누워서는 잠든 것처럼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태평하기는.’

누구는 아까까지만 해도 가슴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강지석이 자신을 스쳐 가서는 민아 누나가 든 짐들을 너끈히 받아 옮길 때는 질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들고 있는 걸 가져가 줄 텐데, 라는 옹졸한 마음도 들었고 민아 누나에게 온 정신을 뺏긴 것처럼 보이는 그가 못마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거슬렸던 건, 편안히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는데도 사사건건 신경을 쏟는 나 자신이었다.

강지석이 민아 누나를 좋아하든 말든, 어차피 내가 할 일은 그가 전혀 껄끄러워할 일 없는 좋은 친구로서 옆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고자 마음먹었는데, 바보처럼 또 일일이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하루 내내 그렇게 바보처럼 굴 뻔했는데 지건 형의 충격요법(?)이 꽤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형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강지석과 민아 누나의 투샷보다도 아까의 무서운 키스 쪽이었다. 떠올릴수록 오싹해서 어깨가 떨렸다. 정신을 거의 놓을 뻔했을 정도로 극강의 쾌감과 자극을 가져다준 키스가 뇌리에서 도통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술이 뒤늦게 올라오기라도 한 것처럼 볼이 뜨끈해졌다. 아직 키스의 여파가 남아서 형 옆에서 잘 때 푹 잘 수나 있을까 걱정이다.

‘슬슬 형이 돌아올 테니까 거실을 마저 치우고…….’

“으음….”

갑자기 들린 신음과 함께 뒤에서 몸이 휙 당겨졌다. 놀랄 새도 없이 허리를 휘감겨 당겨진 나는 의도치 않게 강지석의 몸 위에 포개지듯 누워버리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건 잔뜩 풀린 눈을 반쯤 뜨고 있는 강지석의 얼굴이었다.

“어라…, 우서다….”

강지석의 입가에 헤벌쭉한 미소가 걸렸다.

“히히, 우서야…. 웃어, 우서야. 웃어…. 우서…. 우서야아….”

“잠깐, 팔 좀……. 야, 강지석, 좀 놔 봐.”

강지석 위에 엎드린 꼴이 된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 팔로 완전히 꽉 껴안듯 붙잡혀서는 도통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형제들은 왜 다들 힘으로 구속하는 걸 좋아하는 거야.’

아까도 침대에 완전히 내리눌러져서는 마구 쏟아지는 키스를 가만히 받아내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지건 형의 얼굴과 열기 섞인 눈동자가 떠올라 얼굴이 홧홧해졌다. 하여튼 키스의 여파는 정말 무시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다. 이런 설레는 상황에서조차 지건 형과의 키스를 떠올리다니.

맞닿은 가슴을 타고 강지석의 빠른 박동이 여실히 느껴짐에도 가만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강지석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한참을 낑낑거렸다. 하지만 그도 지건 형만큼이나 워낙 힘이 셌던 터라 결국 완전히 지쳐서는 그대로 늘어지고 말았다.

‘모르겠다. 형이 오면 알아서 구해주겠지.’

또다시 지건 형을 떠올리게 되어,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신기하게도 뭘 하든 다 형 생각이구나.

‘링 때문일까? 키스? 아니면…….’

자꾸 형 생각이 나는 이유를 생각해 보고 있는데, 허리를 두르고 있던 두 팔 중 하나가 움직이며 내 머리를 서툴게 쓰다듬었다.

“우서야아…. 우리 우서….”

“그래, 너네 우서다.”

심드렁하게 대꾸하는데, 강지석이 정신이 번쩍 들만한 말을 내뱉는다.

“내가아 우리 우서… 좋아하는 거 알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뜩 풀린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좋아한다, 신우서어…. 좋아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는 형 생각으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연신 날 불러대며 좋아한다고 중얼거리는 강지석의 얼굴과 음성만 남았다.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내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또다시 강지석의 입에서 내 이름과 함께 좋아한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놀라서 입만 벙긋거리다가 얼굴이 단번에 달아올랐다. 쐐기를 박듯 연신 되풀이되는 말에 귀가 녹을 것 같다.

“야…, 이….”

차마 말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입 안을 이리저리 맴돌다 사라졌다.

‘정신 차려. 그냥 술주정이잖아.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단순한 술주정이라 생각하면서도 자꾸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시금 확인해보고자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려 했다.

삑삑-

현관 쪽에서 도어록의 기계음이 들렸다. 그제야 강지석에게 홀렸던 정신을 되찾은 내가 활짝 열린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지건 형이 문 앞에 나타났다.

“…뭐 하고 있어?”

지건 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어왔다.

“좀 도와주세요, 형. 이러다 질식사할 것 같거든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강지석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짚고 상체를 일으켜보았다. 하지만 얼마 일으키지도 못하고 강지석의 다른 팔에 등을 둘러싸여 밀착된다. 한 팔도 힘들었는데 두 팔은 정말이지 벗어날 수가 없다.

낑낑대는 사이, 형이 못마땅한 듯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옆으로 성큼 다가온다.

“으응…? 형이다! 우리 형…. 지건이 혀엉….”

웅얼대는 강지석의 두 팔을 잡은 형이 단번에 활짝 열어젖힌다. 덕분에 올가미 같던 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나는 이때다 싶어 몸을 일으키며 형 뒤로 물러났다.

“우우웅…. 우서가 없어어….”

칭얼대듯 투정하던 강지석이 제 팔을 놔주며 이불을 덮어주는 지건 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헤벌쭉한 미소가 걸린다.

“우리 형…, 좋아아…. 건이 형, 좋아….”

지건 형의 뒤에 숨듯이 서 있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 그렇지.

오늘 독한 와인을 병째로 마셔댔기에 취했을 뿐이지, 사실 강지석은 주량이 상당히 센 녀석이라 밖에서 잔뜩 취해서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예전에 대학 MT를 갔을 때는 자꾸 벌칙 게임에 걸리는 바람에 만취했던 전적이 있었다. 그때 보는 사람마다 좋다고 달려들던 걸 겨우 말려서 재웠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게 벌써 2년 전 일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바보짓 했네.’

왼쪽 가슴을 툭툭 때렸다.

그러게 작작 뛰지 그랬어.

아까의 두근거림이 무색할 정도로 잠잠해진 심장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불을 꼼꼼히 덮어준 형이 내 손을 붙잡고 방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의 일에 대해 내색하지 않고 거실을 마저 치우러 가려는데, 형이 그대로 끌고서 그의 방으로 향한다.

“형, 거실 좀 치우고 나서…….”

“졸리니까 잠부터 자자.”

날 끌고 방에 들어간 형은 문을 잠그는 걸 잊지 않았고, 조금 급한 모양새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더니 이불을 훤히 걷고는 그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린다.

“이리 와.”

“……?”

보통은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는데, 형은 어째서인지 자꾸만 가슴팍을 두드려댔다.

천천히 다가가 옆자리에 당연한 것처럼 누우니, 형이 옆으로 누운 채 내 몸을 두 팔로 와락 안고는 그대로 몸을 90도로 돌려버린다. 형은 천장을 바라보는 바른 자세가 되었지만, 나는 조금 전의 강지석에게 당했던 것처럼 엎드린 모습이 되었다. 그것도 형 위에 완전히 포개져서.

“…이게 뭐 하시는…….”

“따라 해야지.”

표정도 없던 형이 강지석을 따라 하는 게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지석이가 하는 거면 다 따라 해야 좋아할 거 아냐.”

따라 해야 좋아할 거라니, 그런 게 아닌데.

이젠 강지석이 짓던 미소가 반대로 형의 오리지널처럼 느껴져서 난감할 지경인데.

“그런 건……. 그보다 내려갈게요. 저 무거워요.”

“이렇게 가벼운데 무겁기는. 그리고 이 자세, 무게감 있어서 오히려 기분 좋은걸.”

형의 손이 내 머리를 감싸 눌렀다. 내 머리가 닿은 곳은 형의 왼쪽 가슴 바로 위쪽이었다. 근육이 잡혀 있어서 적당히 딱딱한 그 부분은 꽤 좋은 베개가 될 것 같았다.

옆으로 눌려서 귀가 가슴팍에 닿아있었던 덕에 형의 심장 박동이 또렷이 들려왔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내 가슴이 울리는 박동과 굉장히 닮아있었다.

이런 자세로는 신경 쓰여서 도저히 못 잘 것 같았는데, 심장 박동을 듣고 있어서인지 그게 자장가의 역할을 해버렸다.

형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과 박동은 어느새 내 뇌리에 남아 있던 강지석의 ‘좋아한다’는 말을 금세 지워버렸다.

결국 내 머릿속에는 지금처럼 마음 편히 기대어 잠들 수 있는 지건 형에 대한 것만 남아버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