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집으로 올라와 문을 열자, 마침 짐 정리를 급하게 끝내고 밖으로 나오려던 강지석과 맞닥뜨렸다.
“어? 누나!”
강지석이 눈을 빛내며 민아 누나를 반갑게 맞았다.
“지석아-!”
가장 앞에 있던 나를 지나쳐 뒤에 있던 누나에게 한달음에 달려간 강지석은 그녀가 무거워하던 짐을 거뜬히 빼앗아 들며 히죽거렸다.
“누나, 합격 축하드려요!”
“낮에 전화로도 말했으면서 뭘 또 축하한대. 그래도 축하받는 건 역시 기분 좋구나-!”
입꼬리를 길게 올려 활짝 웃어 보인 민아 누나가 지석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둘이서 전화도 하는구나. …난 못 봤는데.’
그러고 보니 낮에 지석이 잠깐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다. 그때 통화했던 건가.
‘말하면 이해 못 해줄 것도 아닌데 굳이…….’
민아 누나와 통화하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었던 걸까. 아니면 둘이서 은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새 복잡해진 머릿속을 주체하지 못해 씁쓸하게 뒤를 따르는데, 빠른 걸음으로 주방 테이블 위에 쇼핑백들을 올린 지건 형이 내게 다가와 금세 내 짐까지 가져가 버렸다.
“무겁진 않아?”
“…아, 네.”
둘만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즐거워 보이는 강지석과 민아 누나에게 정신이 팔려 한 박자 늦게 대답해버렸다. 지건 형은 내가 들었던 짐까지 내려놓고서 귀에 입술을 가까이해 속삭였다.
“와인 외에는 대부분 조리할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 한민아랑 지석이한테 맡겨 두자.”
몇 개의 쇼핑백이 무겁다 했더니, 그 안에 와인이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쇼핑백들을 놔두고 형에게 끌려가다시피 해서 거실에 앉게 된 나는 자꾸만 주방으로 쏠리는 신경을 제어하지 못하고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가는 걸 느껴야 했다.
‘마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강지석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맺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지금처럼 쭉 친구 상태로 지내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민아 누나와 강지석이 눈앞에서 죽고 못 살더라도 태연하게 두 사람을 축하해주고 응원해줘야 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자꾸만 심장이 아프게 뛰고 손끝이 떨려서 주먹을 꽉 쥐어야만 참아낼 수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이 느껴질 때쯤, 무릎 위에 올려둔 내 왼쪽 주먹을 지건 형의 왼손이 감싸 쥔다. 그러고선 주먹을 펴서 손등을 덮듯이 깍지를 꼈다. 내 왼손 약지의 붉은 띠 옆으로 형의 링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는다.
손등을 덮은 지건 형의 손이 깍지를 낀 상태로 손바닥을 돌려보더니 눈가를 찌푸렸다. 손바닥에는 네 개의 굴곡진 손톱자국이 붉게 새겨져 있었다.
“손바닥 아프겠다.”
다른 손으로 손바닥의 손톱자국을 문질러준 형이 내 고개를 돌려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마주 보게 했다.
“티 나니까 그만 봐, 우서야.”
그제야 흠칫하며 눈가를 떨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 형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에게 이상한 눈길을 받았을 것 같다.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형이 날 끌고 일어났다.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준비되면 불러.”
“뭐? 우리만 두고 편하게 방에 있으려고?”
민아 누나가 뾰로통하게 눈을 부라렸다. 지건 형이 특유의 차가운 눈빛으로 민아 누나를 압도하며 당당히 내뱉었다.
“내 집이니까 당연하지.”
“야! 나 막 이것저것 박살 낸다? 응?”
“해 봐. 손해배상 청구받고 싶으면.”
“와…. 저 무서운 놈….”
민아 누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사이, 지건 형은 나를 끌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엔 주방에서 지석이 뛰어나와 말로 붙잡았다.
“우서는 왜 데려가?”
“이번에 개발 중인 앱 좀 보여주려고.”
앱 얘기는 듣지도 못했지만 지석에게 눈짓으로 다녀오겠다는 신호를 보내고서 형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왜인지 아까의 쾌활하던 모습 대신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건 단순히 두 사람을 돕지 않는 데에 대한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문이 닫히자마자 저 너머에서 또다시 즐거운 두 사람의 목소리가 오고 간다.
형의 방에 끌려와 문에 기대어 선 나는 눈을 내리깐 채 답답한 가슴을 달랬다. 탁 트인 공간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을 보고 있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을 말해주듯,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이 천천히 사그라진다.
한동안 그렇게 문에 기대어 있는데, 형이 이불을 걷어내며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이리 와서 누워봐.”
왜냐는 질문 대신 형을 가만히 바라보니,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또다시 침대를 두드린다. 천천히 다가가 형이 원하는 대로 침대에 누우니, 형이 이불 안으로 함께 들어와서 당연한 것처럼 끌어 안아준다.
그다지 거부감은 없었다.
최근에는 매일 이런 식으로 끌어안은 채 잠들어왔고, 손만 잡고 자거나 엉성하게 붙어서 잘 때보다 훨씬 더 기분 좋았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괜스레 민망할 때도 있고 특히나 형이 불편해할까 봐 걱정도 있었지만, 오히려 형은 이 느낌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너무도 적극적이었다.
기분 좋은 편안함은 오로지 수면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잠들 생각 없이 서로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감과 긴장이 사그라들고 머릿속도 차분히 정리되어간다. 그야말로 신기한 현상이었다.
“…형은 꼭 아로마 향초 같아요.”
“신기한 비유네.”
“그게 심신 안정에 굉장히 좋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굳이 성능 면에서 따져보자면 지건 형이 월등히 나았다. 끌어안자마자 효과가 나타나니까.
형이 버릇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당장 잠들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조금만 넋을 놓으면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아직도 신경 쓰여?”
형의 말에 천천히 가라앉던 정신이 단번에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눈을 뜨니 웃지 않는 얼굴의 형과 시선이 맞닿았다.
“…당연하죠.”
민아 누나를 만나고 밤에 강지석의 고백 아닌 고백을 들었던 날이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서 완전히 마음을 다잡기엔 무리가 있었나 보다. 더군다나 저렇게 눈앞에서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니, 가슴이 뒤틀리듯 아픈 건 어쩔 수가 없다.
“제가 적응해야죠. …강지석 옆에 계속 있으려면.”
“…….”
체념 섞인 내 말을 들어주던 지건 형이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보고 있어서 왜 그렇게 보냐고 물으려는데.
“잠깐이나마 잊게 해줘?”
“예?”
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형은 재차 말하는 대신, 끌어안고 있던 나를 놔주고서 갑자기 내 위에 올라타 버렸다.
“형?”
몸에 무게가 실려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거기다가 형은 내 두 손을 어깨높이로 올리더니 깍지껴 내리눌렀다.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형을 올려다보니, 역광으로 인해 그늘진 형의 얼굴이 조금 음흉하게 변한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저번에 보니까 이게 꽤 효과가 좋던데.”
“어떤……?”
형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와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키스했더니 한동안 내 입술만 보더라고. 간간이 얼굴 붉히는 것도 귀엽고.”
“제가 언제 그랬어요!”
“쉿…. 문 안 잠겨있어.”
형의 말에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형에게 가려서 보일 리 없는 문으로 시선을 두게 되고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지석이는 버릇이 잘못 들어서 형 방에 노크하며 들어올 줄 몰라. 그래서 내가 매일 잘 때마다 문을 잠가두잖아.”
형이 잘 때 문을 잠가두는 버릇이 있다는 건 매일 같이 잠들다 보니 알 수밖에 없었다. 그 버릇이 예전부터 무턱대고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는 강지석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형의 말을 듣자마자 급속도로 초조해지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대로 아무 짓 안 하더라도 강지석이 본다면 충분히 이상해 할만한 그런 자세였다. 심지어 이대로 키스까지 나누고 있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형, 무, 문은 잠그고…….”
키스에 대한 긴장보다도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이 더 컸다. 키스를 하든 말든, 일단 문부터 안전하게 걸어 잠그고 싶었다.
하지만 형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위험요소가 있을수록 자극이 크고 오래 가는 법이야. 한동안은 두 사람이 어울리던 모습보다 나와 키스했던 게 더 많이 생각날걸.”
형이 유혹하듯 속삭였다. 웃긴 건, 그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는 나다.
“싫으면 고개 돌려. 그럼 그만할게.”
작은 소리로 피할 방법을 알려준 형이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말랑한 두 개의 입술 끝이 기분 좋게 비벼지고, 뒤이어 꾹 눌린 입술 사이로 형의 살덩이가 치아를 긁었다.
노크하듯 건드리는 그 느낌에 나는 스스로 입술을 벌렸다. 맞닿은 형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느낌이 들자마자 형의 속살이 내 입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