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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고리-29화 (29/99)

29화

[안녕하세요. ‘지식윈’과 ‘링버스’, ‘링프로텍터’, ‘링사모’, ‘운명의 고리’ 인터넷 카페에 링 해제법을 애타게 찾으시던 ‘웃어’ 님이시죠?]

[저는 웃어 님께서 링 해제법을 찾으시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한 가지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가능하시다면 제게 메일로 왼손 약지 사진을 찍어서 첨부해주실 수 있을까요?]

[절대 이상한 곳에 쓰려는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웃어 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요청드리는 것이니 부디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올리셨던 글이 단순한 시선 끌기 용이었다면 이 쪽지는 무시해 주시기 바라며, 되도록 해당 글들은 모두 삭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웃어 님의 메일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내용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의문이 든다. 상대가 누구이고, 이 쪽지의 저의가 무엇인지 역시 의문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의문은 바로 ‘왼손 약지의 사진’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왼손 약지 사진은 왜?’

내 왼손을 손등이 보이게 쫙 펼쳐보았다. 내 눈에는 왼손 약지의 한 줄로 된 붉은 링이 선명히 보이지만, 이걸 볼 수 있는 건 같은 링으로 연결된 지건 형뿐이다. 설령 링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그와 연결된 상대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링을 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러니 상대가 링에 대해 잘 알건 모르건, 왼손 약지의 사진은 하등 쓸모없는 첨부파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해킹이라든지 바이러스 배포…를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닐 테고.’

그런 거였다면 이런 쪽지로 연락했을 리가 없다.

해킹 프로그램이나 바이러스를 심으려 했다면 첨부파일을 넣을 수 없는 쪽지 대신 메일을 사용했을 거고, 그 안에 프로그램을 끼워 넣거나 클릭할 수밖에 없는 링크를 교묘하게 적어두었을 것이다.

다시금 쪽지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역시나 가장 크게 걸리는 것은 왼손 약지의 사진을 요구한 점이다.

‘여태까지는 이런 연락도 온 적이 없었으니 한 번 시도해 볼만 한데…….’

해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사람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어쩌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보이지도 않을 링 자리를 찍어 보내라는 건 꽤 의아하지만.

고민하던 나는 휴대폰을 들어 내 왼손 약지를 잘 보이게 찍어보았다. 저장된 사진 속에 담긴 내 왼손 약지에는 실물을 보는 것 같은 붉은 링이 확실히 자리 잡고 있었다. 형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손을 찍은 것처럼 보일 테지만, 이걸 보내면 저 쪽지의 상대가 뭔가를 알려줄지도 모른다.

부디 상대가 시답잖은 장난을 정성껏 친 게 아니길 바라며, 그에게 내 약지 사진을 첨부해 메일로 보냈다.

“우악-!”

사진을 전송하고도 혹시 몰라서 쪽지로도 메일을 보냈다는 답장을 하자마자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해서 나가보니, 카레용 재료들을 미리 볶아두기 위한 오목한 궁중 팬에서 중국집의 중화요리용 팬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불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천장을 다 그을려버릴 것 같은 엄청난 높이의 붉은 불길이 활활 치솟아 올랐음에도 궁중 팬을 붙잡고 있는 형은 태연하기 그지없다.

옆에서 비명을 지르던 강지석이 엉성하게 깎은 당근을 휘두르며 비명을 질렀다.

“집을 다 태워버릴 셈이야?!”

“이 정도 불은 되어야 익지.”

“우리가 익겠다니까?!”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형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지석의 말마따나 우리가 익을 판이다.

“다들 나와요. 내가 할 테니까.”

“안 돼.”

“안 돼!”

동시에 돌아보며 말하는 두 사람을 향해 사정없이 눈을 부라렸다.

“그걸 먹는 사람 안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먹고 죽기 싫으면 빨리빨리 나와요.”

내 협박을 받은 두 사람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주방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 * *

왼손 약지 사진을 보낸 지 벌써 일주일 째.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역시였던 모양이다. 메일과 쪽지함을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했지만 도착하는 거라고는 인터넷 카페 공지용 쪽지나 스팸 메일 정도뿐이다.

‘역시 기대하지 않는 게 나았어.’

속는 기분으로 보냈던 거긴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오지 않으니 입 안이 썼다.

휴대폰으로 텅 빈 메일함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던 나는 카트를 끌고 오는 지석을 보며 액정화면을 껐다.

“오늘은 많이 안 살 건데 뭘 카트씩이나 끌고 와.”

“혹시 모르잖아, 뭔가 많이 사게 될지도.”

“네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충동구매도 없거든?”

지석이 마치 충동구매를 불사하겠다는 것처럼 헤실거리며 웃었다. 오늘은 절대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와 함께 대형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려 했던 건 고작해야 봉투 하나 정도였는데, 나올 땐 왜인지 세 개가 되어있다. 나는 내가 들던 것까지 빼앗아서 양손에 묵직한 봉투를 든 지석의 당당한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극적으로 말려야 하는데 내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닌지라 확실히 한계가 있었다.

‘다음부터는 나 혼자 와야겠어.’

짐꾼이 되어주는 건 고맙지만, 이러다간 생활비를 내주는 지건 형에게 미안해서 안 될 것 같다.

아파트에 다다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액정에 뜬 지건 형의 이름을 확인하며 단번에 전화를 받았다.

“예, 형.”

-집이야?

옆에서 지석이 누구냐고 묻는 것처럼 눈빛을 보내기에 입 모양으로 ‘형’이라 알려준다.

“지금 막 강지석이랑 장보고 왔어요. 아파트 1층의 엘리베이터 앞이에요.”

-잘됐네. 짐은 지석이한테 올려보내고 주차장으로 와 봐.

“지금 오셨어요?”

-응.

지석을 힐끔거리며 형에게 물었다.

“그, 링의 상대분이랑은…….”

-오늘 일이 좀 일찍 끝나서 미리 만나고 왔어.

혹시나 지석이 듣고 있을까 싶어서 형이 내게 말을 맞춰준다. 나는 일부러 형이 해준 말을 되풀이해서 지석에게 들리게끔 말하고는 그에게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말했다.

“뭔데?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석연찮은 얼굴의 지석이 자꾸만 같이 가려 했지만, 그의 양손에 들린 묵직한 봉투가 눈길을 끌었다.

“금방 올라갈 테니까 올라가서 그거나 냉장고에 정리해 놔. 계란 들어있으니까 깨지지 않게 조심하고.”

“응….”

시무룩해진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석이 재차 빨리 올라오라는 말을 남겼다. 기어코 알았다는 말을 받아낸 강지석이 보기 좋게 싱긋 웃는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난 그 옆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아파트 지하 1층은 주차장이었는데, 형이 항상 주차해두는 지정 자리가 있었기에 그곳까지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서 가까이 다가가자, 형이 운전석에서 내려섰다. 눈을 마주하자마자 보기 좋게 싱긋 웃어 보인 형이 돌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우서야, 부탁할 게 좀 있는데…….”

“뭔데요, 형?”

형이 부탁하는 거라면 되도록 뭐든 해줄 생각이었기에 나름대로 의욕적이었다. 하지만 형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조수석에서 나온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 저번에 대학에서 봤던 걔구나! 지석이 친구!”

맑고 활발한 목소리에 흠칫하며 상대를 바라보니, 그녀는 바로 지석의 첫사랑이자 이상형인 한민아 누나였다. 누나가 왜 여기 있나 싶어 굳어 있는데, 형이 몇 가지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이번에 한민아가 면접 합격했다고 뭘 많이 사 왔는데, 아무래도 손이 모자라서.”

“아….”

형이 들고 있는 쇼핑백만 해도 양손에 5개씩은 되는 것 같았다. 민아 누나 역시 뭔가 많이 들고 있었고, 뒷좌석에도 몇 개의 쇼핑백이 남아 있다.

애써 표정을 다듬으며 뒷좌석으로 향했다. 남은 쇼핑백들을 들고나와 문을 닫는데, 어느새 바짝 다가온 민아 누나가 미간을 모으며 한없이 미안해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같이 사는 줄 몰랐어. 지건이가 지석이랑 다른 사람까지 해서 셋이 산다기에 거짓말인 줄 알았지, 난. 알았으면 그냥 지건이랑 지석이 불러서 밖에서 만날걸.”

듣다 보니 울컥했다. 민아 누나로서는 타인인 내게 폐가 될까 봐서 두 사람을 밖에서 만날 걸 그랬다고 말하지만, 그쪽이 더 사양이다. 넓은 아파트에 혼자 남아 두 사람이 어떤 상황일지 상상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눈앞에 있는 게 낫다.

‘두 사람?’

생각하고 보니 이상하다. 강지석이야 그렇다 쳐도 지건 형까지 내가 일일이 신경 써도 되는 걸까.

“우서야?”

당황스러운 생각을 깨주듯, 형이 얼굴을 가까이하며 내 낯빛을 살폈다.

“왜 그래?”

“아뇨…. 어서 들어가죠. 더 있다간 강지석까지 내려올 거예요.”

조금 다급히 형의 눈을 피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뒤에서 날 따라 걷는 두 개의 발소리와 함께 지건 형을 향한 민아 누나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6년 전에 가봤던 집보다 지금 집이 더 낫냐는 둥, 그때도 꽤 넓었다는 둥, 지건 형과 지연 누나, 강지석까지 포함한 네 명이 요리를 도전하다가 전자레인지를 폭발시켰던 기억이 난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

나 혼자 모르는 이야기였다.

벌써 극심한 소외감이 찾아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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