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Ym
“우서야, 아까는…….”
막상 입을 열긴 열었으나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자칫 말실수라도 할까 봐 한참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의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점차 작아지다 못해 잔잔해져 버렸다.
그래서인지 피식 웃음이 났다. 고등학생 시절, 고민이 있을 때마다 저런 모습으로 끙끙거리던 강지석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느낌이다.
“연락 안 했던 건 미안해. 술에 취해 있어서 답장이고 뭐고 생각을 못 했어. 정신 차렸을 땐 배터리도 나가 있는 상태였고.”
내가 먼저 사과를 건넸다. 아직 복잡한 마음이 다 정리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강지석을 계속 원망할 순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럴 자신도 없다.
강지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달음에 너무 가깝다 싶을 정도로 바짝 붙은 강지석이 눈을 반짝거렸다.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새벽 내내 너무 걱정돼서……. 아니, 이게 아니라……. 아까 너무 무턱대고 큰소리 내서 미안하고 힘으로 휘둘러서 그것도 미안하고……. 음, 그리고 아까 울려서 미안……!”
“적당히 해, 적당히.”
뭔가 줄줄이 나오기에 가슴팍을 퍽 때려서 입을 다물게 했다. 하필 울었던 것까지 끄집어내다니.
강지석은 그의 가슴팍을 때린 내 손을 갑자기 덥석 잡더니 아직도 붉게 물든 손목을 울상이 되어 내려다보았다.
“어떡해, 아직도 빨간 것 봐.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되겠다, 우리 병원 가자.”
“호들갑 떨지 마. 이젠 별로 아프지도 않으니까 내버려 두면 나아.”
손을 빼내려는데 강지석이 꽉 붙들어서는 놔주질 않는다.
“이 손목으로 음식 만들다 보면 더 심해져. 안 돼. 차라리 내가 할래.”
진지한 얼굴로 날 잡아끌더니 방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네가 뭘 어떻게 한다고 그래? 내가 할 테니까 보조나 해, 그럼.”
“안 돼! 절대 안 돼!”
짐짓 엄한 얼굴로 큰소리를 내자, 지건 형이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강지석, 내가 우서한테 큰소리 내지 말랬지.”
빠르게 다가온 형이 지석에게서 내 손을 빼내며 눈을 치떴다.
“또 힘쓰려고?”
“아니야, 우서가 자꾸 손목 아플 텐데 요리한대잖아.”
그러자 지건 형의 시선이 내 손목에 닿았다. 한 손으로는 손목 위쪽을 붙잡고서 다른 손으로는 내 손을 붙잡아 살살 돌려보던 형이 슬쩍 내 반응을 확인했다. 확인할 것도 없이 정말 아프지 않았기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이상은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조심해야 해. 이 녀석 흥분했을 땐 힘을 감당할 수가 없거든.”
내 손을 놔준 형이 지석과 합심해 나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요리는 우리가 해볼 테니까 안에서 쉬어.”
“하지만 둘 다 요리는 못한다고…….”
비록 오늘 메뉴가 간단 요리 설명서까지 있는 보편적인 카레라고는 하지만 두 사람에게 맡기는 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아주 손쉬운 요리마저 박살 수준으로 만든다는 얘기를 하도 들었던 터라 카레여도 안심할 수가 없다.
지건 형이 불안해하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카레 포장지 뒷면에 설명서까지 있었잖아. 그거 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되겠지.”
“맞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고 있어.”
지석이 씩 웃더니, 형의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기가 내 머리를 당당히 쓰다듬어준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기분 좋게 느끼고 있다 보니, 강지석이 날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손을 노려보고 있으니, 분위기를 파악한 강지석이 얼른 뒤로 물러나 직접 문을 닫아준다.
“완성하면 데리러 올게.”
배시시 웃는 모습을 끝으로, 방문은 작은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멀뚱히 문을 바라보다가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서로 사과하다가 갑자기 주방에서 쫓겨난 것으로도 모자라, 어떤 해괴한 것이 나올지 모를 점심을 먹어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형에게 과외를 받으며 셋이서 거의 매일 만나던 그때는 대학 외엔 큰 걱정이나 고민도 없었다. 형도 사업 준비 때문에 바쁘긴 해도 우리에게 꽤 많은 시간을 내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고 지금에 비하면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성격이 더 밝은 쪽이었다. 그때도 셋이서 뭐라도 만들어 먹자고 했다가 집안 조리기구를 다 박살 낼뻔한 기억이 있는데, 몇 년이 지났기도 하니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불안하지만 한번 믿어보자고 생각하며 의자를 꺼내 앉았다.
막상 방으로 내쫓기고 나니 할 게 없었다. 공부를 하자니 밖이 신경 쓰여서 집중도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어떻게든 밖으로 나갔다가는 또다시 이 안에 갇히거나 정말 병원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결국 선택한 건 인터넷 서핑이었다.
[링 불면증]
[링 수면]
[링 신체접촉]
[링 영향]
[링 해제]
[싱글 링]
거의 매일 비슷한 걸 찾다 보니 검색했던 목록에 뜨는 건 전부 링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별다른 수확이 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링 해제]를 검색해 본다.
‘형을 위해서라도 링은 해제해야 해.’
예전에는 그저 내 죄책감이라든지 내가 느끼는 배덕감 때문에 링이 사라졌으면 했고, 원치 않는 관계의 고리 따윈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강지석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건 그를 닮은 친형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할 거라,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해제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기적인 난, 날 위해서만 해제법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나보다도 지건 형을 위해서 링을 해제할 수 있었으면 했다. 형같이 능력 있고 자상한 사람이 수면을 위해 한참 어린 대학생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동생 흉내나 내줘야 한다니, 정말이지 미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직도 형에게서 강지석을 보고 있으니, 나도 참 답이 없다.
‘예전으로 돌아가야지.’
링의 영향 덕분에 형과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점은 딱 거기까지 같다. 링이 생기기 전까지는 경험할 수 없었던 편안한 숙면이나 상대와의 중독성 있는 스킨십은 지금도 생각이 날 정도다. 하지만 상대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다는 크나큰 단점으로 인해 주변에 폐를 끼치거나 상대를 억지로 끌고 다녀야 할 일이 생긴다.
형이 그러는 거라면 몰라도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 기업의 대표가 한낱 대학생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맞춰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컸다.
당장 저번 술자리 때만 해도 그렇다. 형은 다음날에 있을 미팅 때문에 잠을 자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내 고집을 들어주느라 비싼 술도 사주고 호텔까지 빌려 가며 또 돈을 써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형은 강지석을 떠올리는 나를 위해 또다시 동생 흉내를 내며 키스까지 감행했다.
키스를 떠올리니 또 볼이 뜨끈해져서, 상대적으로 서늘한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체온을 내렸다.
‘형을 위해서라도 꼭 해제법을 찾아낼게요.’
반드시 어딘가 해제법이 있을 거다. 정말 없다면 너무 불합리하지 않나. 억지로 새겨진 링 때문에 원치 않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니.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멈추지 않고 검색을 계속했다. 하지만 새로 올라온 글들은 영양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부는 해제는커녕 링의 낭만적인 부분을 어필하며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려 애쓰고 있었다.
링이라는 게 그리 낭만적인 게 아닌데, 하고 중얼거리며 이번엔 인터넷 카페를 들어가기 위해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쪽지’라 되어있는 부분에 숫자 1이 떠 있는 걸 확인했다. 몇 개의 링 관련 카페와 앱 개발 정보 카페에 가입되어 있으니 그쪽에서 보낸 공지사항이 아닐까 추측하며 쪽지함을 열었다.
[보낸 사람 – C(chel*****)]
[안녕하세요. ‘지식윈’과 ‘링버스’, ‘링프로텍터’, ‘링사모’, ‘운명의 고리’ 인터넷 카페에 링 해제법을 애타게 찾으시던 ‘웃어’님이시죠? 저는…]
쪽지 내용의 미리 보기 부분을 대충 읽어보니 인터넷 카페에서 보낸 공지 내용은 아닌 모양이었다. 보낸 사람도 카페 운영진이 아니다.
‘내가 올린 글을 읽은 사람인가?’
미리 보기 내용에 적혀있는 것처럼, 난 각종 지식적 질문과 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지식윈을 포함해 각종 링 관련 카페에 혹시라도 링 해제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그들을 찾는 장문의 글을 적었었다. 링이 생기자마자 인터넷으로 했던 게 바로 그 일이었는데, 글이 밀려날 때마다 다시 써서 올리고 또 올리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가끔은 이 사람 또 왔다는 식의 비난 댓글이 달리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고 매일 새 글을 올렸다. 그만큼 난 필사적이었다.
그런 글을 보고 연락한 사람이니 무슨 말을 하는지 읽어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알아? 링 해제를 아는 사람일지.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내용을 확인하자, 그 안에는 생각보다 긴 내용이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