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뭐 하자는 거야? 부러뜨리기라도 하게?”
“그럴 생각 없었어. 잠깐 감정이 격해져서…….”
당황 섞인 목소리로 해명하려던 강지석과 눈이 마주쳤다.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그는 내 눈을 보고 놀란 후였다.
내 손을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놔 준 형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러더니 현관에서 끌려오느라 미처 벗지 못한 운동화를 직접 벗겨준다.
“힘으로 몰아붙이지 마. 애 놀란 거 안 보여?”
강지석이 반박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몇 번의 한숨만 내쉬며 화를 삭였다.
“형은 왜 이제 와?”
한 짝뿐인 운동화를 바닥에 놓은 형이 지석의 물음에 그때까지 받치고 있던 내 발을 조심히 내렸다.
“회사에 일 있다고 했잖아. 밖에서 자고 곧바로 다녀오겠다고 연락했을 텐데.”
“둘이서 돌아오는 타이밍이 비슷하니까 이상하잖아.”
의심을 담은 딱딱한 목소리가 나와 형을 감쌌다.
원래대로라면 형은 내가 먼저 들어가고 한 30분이 지난 후에야 주차장에서 올라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현관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들어와 버렸다.
충분히 이상할 수 있는 상황임이 맞긴 한데, 형은 딱히 곤란해하지 않았다.
“이상할 게 뭐가 있어? 아니면… 이상하길 바라는 건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지석은 날 몰아세우던 아까처럼 무겁고 거친 분위기를 흘렸다.
“…형. 내가 지금 농담 받아줄 정도로 여유롭지가 않거든?”
“나도 마찬가지야.”
몸을 일으킨 지건 형이 강지석을 마주한 채 몸으로 날 가리며 섰다. 형이 날 지키듯 서준 덕분에 고개를 들어도 강지석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맺혀 있던 눈물이 그새 두어 방울 흘러내렸다는 것을 깨닫고서 소매로 눈가와 볼을 비벼서 닦아냈다.
“애꿎은 애한테 큰소리로 뭐라 할 생각하지 말고 네 감정이나 추슬러.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굴 거야?”
차갑게 내뱉은 형이 몸을 돌려 내 어깨를 감싸 일으켰다. 이전의 격한 감정으로 인해 마구 뛰어대던 심장이 형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온 온기 덕분에 조금씩 차분해졌다.
내 어깨를 감싸 안은 형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괜찮아, 우서야? 방으로 들어가자.”
강지석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다정한 목소리였다. 딱히 달래는 말을 가득 늘어놓은 것도 아닌데 목소리만으로도 위로받는 것 같다.
형과 함께 내 방으로 향하니, 강지석이 뒤를 따라 들어오려 했다.
“우서야, 아까는 내가 미안했어. 잠깐만 얘기 좀 하자.”
강지석의 목소리 또한 아까와 다르게 꽤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나 해보자고 하기엔, 내 감정이 너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자 문 앞에서 형이 강지석을 막아섰다.
“얘기는 나중에 해.”
“형이 뭔데 막아서?”
강지석의 목소리가 다시 까칠해졌다. 형은 한 번 코웃음을 치더니 지석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밀어내었다.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으려는데 그 사이로 강지석의 목소리가 또 파고들었다.
“형, 주차장에서 이제 막 올라온 사람이 어떻게 내가 큰소리를 냈단 걸 알아?”
지석의 예리한 질문에도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없이 문이 닫히고, 내 방에는 나와 지건 형만이 남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제야 막혔던 눈물이 다시금 맺혀가기 시작한다.
가까이 다가온 형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형은 지석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어깨에 내가 편히 기댈 수 있게 해주었고, 다른 손으로는 지석에게 아프게 붙잡힌 손목을 몇 번이나 쓸어주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 다 알고 있는 듯한 무언의 위로와 형의 온기가 마구 요동치던 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손목을 쓰다듬던 손이 이번엔 내 눈가를 쓸었다.
“우는 거 처음 보네.”
그 말에 부끄러워져서는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벅벅 비벼대는 게 아파 보였던지, 형이 내 팔을 잡아 내리고는 엄지로 눈물 맺힌 눈가를 직접 닦아내 준다.
“강지석 때문이겠지만, 정확히 왜 울었는지 물어도 돼?”
형의 물음에 쉽사리 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느낀 감정들은 차마 내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질투, 체념, 원망, 허탈, 자책.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너도나도 터져 나와 제대로 수습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냥…….”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제가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아서요.”
말을 할수록 울컥해서는 다시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웬만한 일로는 아무리 힘들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나인데, 오늘은 어찌 된 건지 자꾸만 어린애처럼 울먹이게 된다.
“강지석이 화낼 때…, 내가 왜 그 녀석에게 혼나야 하는지 몰라서 억울했어요. 근데 그거보다 더 어이가 없었던 건… 그 녀석에게 미움받았을까 봐 걱정하고 있던 저예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강지석이 여태까지 날 기다려줬다는 데에 설레고 가슴 뛰고……. 그러다가 내가 왜 어제 집에 돌아오지 못했던가 생각하면 서럽고…….”
감정의 동요를 되짚으며 하나둘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으려니 또다시 내가 한심스러워졌다. 형은 이런 얘기, 하나도 재미있지도 않고 귀찮기만 할 텐데.
우울한 얘기나 늘어놔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형의 손의 다정하게 내 볼을 매만졌다.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뭐든 다 해. 네 얘기라면 뭐든 들어줄게.”
이건 반칙이지.
강지석 때문에 힘든 건데 그 녀석과 닮은 얼굴의 자상한 지건 형에게 위로를 받고 있다. 더군다나 형이라면 내가 여태껏 숨겨왔던 마음이나 생각마저도 다 알고 있으니 숨길 것도 없다.
위로라는 건 기본적으로 상대의 감정이나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가능한 거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건 형뿐이었고, 내가 기댈 수 있는 것도 형뿐이었다.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형이 없었다면 지금쯤 난 혼자 온갖 감정을 누르느라 피폐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형과 링으로 연결된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링이 없었더라면 형과 지금처럼 가까워질 수도 없었을 거다.
많은 걸 얘기하지 않아도 그저 형에게 기대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빠르게 안정되었다. 형은 이것저것 묻지 않고 묵묵히 날 안아주거나 쓰다듬어주며 한동안 자리를 지켜주었다.
* * *
걸을 때마다 뒤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뿐 아니라 숨죽인 발소리까지 들린다.
‘뭐 하자는 거지?’
미간을 찌푸린 채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곧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니 미리 장을 봐둔 것들로 요리를 하기 위해 랩핑된 몇 가지 채소들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가 너무 한 번에 많이 꺼내서인지, 당근이 품에서 데굴거리며 떨어진다.
당근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뒤에서 갑자기 쑥 뻗어져 나온 손이 아슬아슬 멋지게 당근을 잡아챈다.
“…….”
당근을 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천천히 위로 올라와, 내 품에 당근을 살포시 얹어준다.
“…뭐 하냐?”
당근을 얹어주고 뒤로 빠지던 손을 노려보며 물었다. 몇 번 우물쭈물하던 그 손이 슬쩍 내려가 내 뒤로 회수된다.
“그냥… 도와줄 건 없나… 해서…….”
조심스러움으로 도배가 된 것 같은 말이었다.
품에 안고 있던 랩핑된 채소들을 주방 카운터에 우르르 올려두고서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강지석이 얼른 시선을 내리깔더니 우물쭈물하며 어찌할 줄 몰라 한다.
팔짱을 낀 채 그런 강지석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까만 해도 무섭게 윽박지르고 몰아세우더니, 지금은 비 때문에 산책도 못 나간 대형견처럼 끙끙거리고 있다. 덩치까지 큰 녀석이 우울감까지 몰고 다니며 뒤를 쫓는 상황이란, 사실 좀 무서울 지경이다.
“그냥 가만히 방에 가서 기다리는 게 도와주는 거야.”
요리를 해보겠답시고 갖가지 사고만 일으켰다던 강지석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했다.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차라리 방으로 돌아가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실은 그것보다도…….’
날 앞에 두고 우물쭈물하는 강지석을 보며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까의 일 이후로 우린 진지하게 다시 얘기를 하거나 서로 사과를 나누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강지석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죄인처럼 시선을 떨군 채 입을 꾹 다물어버렸고 나 역시 눈물을 보였던 것 때문에 민망해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무시하고 요리만 하고 방에 틀어박히려 했는데, 이 찰거머리 같은 강지석이 무슨 그림자라도 되는 것처럼 자꾸만 뒤를 따라다닌다.
“저기…….”
소심한 어린아이처럼 우물쭈물하던 강지석이 날 힐끔거리며 조금 가까이 다가왔다.